#Prologue. 이별

그날은 여느 때보다 유난히 캄캄했다. 해는 길어질 대로 길어진 여름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흐렸던 날씨 때문인지 이미 하늘은 어둑했다. 습기는 얼마나 많던지, 분명 공기는 선선한 저녁 날인데도 불구하고 살은 끈적하기만 했다. 저녁 5시가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길가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풀과 꽃이 잘 가꿔진 구청 앞의 화단 사이에는 민우와 푸름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미안해.”

민우와 푸름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둘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분명 이들이 이별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법한 모습이었다. 민우는 푸름에게 마지막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우의 두 눈은 아직도 사랑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푸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직 두 사람에게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이게 정말 최선일까?”

푸름의 두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최선일지를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진동했다.

“3년.”

민우는 ‘3년’이라는 말만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녕을 말하는 민우의 옷차림은 허름했다. 그는 신고 있던 여기저기 해진 신발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푸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로 입만 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땐, 웃으면서 만나자.”

.

.

.

.

.

.

.

.

<영원히 잠들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엘라 스미스-

.

.

.

.

.

.

같은 꿈이었다. 3개월째.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는 날이면 늘 민우와의 마지막 날의 꿈을 꿨다. 항상 같은 장면에서 잠에서 깨곤 했다. 민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땐’ 그리고 ‘웃으면서 만나자’라고 말하고 나면 그녀는 번뜩 눈을 떴다. 그와 함께 지낸 3년을 잊으려고 노력한 지 이제 겨우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푸름의 노력 덕인지 민우가 이별을 고한 이후,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은 펑펑 울며 택시를 타고 집에 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일주일 동안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 그 이후로 한 달간은 그녀의 삶은 거기서 멈춰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푸름의 한쪽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살짝 고였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오른쪽 책상 아래에 놓인 서랍의 제일 위 칸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연필을 쥐고 기록했다.

-2019년 7월 30일 같은 꿈, 마지막 말은 ‘나중에 다시 만날 땐, 웃으면서 만나자.’

꿈을 꾸는 날마다 기록하고 민우의 마지막 말을 적을 때면 푸름은 늘 같은 자세를 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나중에 다시 만날 땐….’

‘나중에 다시 만날 땐….’

자신의 꿈에 다시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걸까, 아니면 그의 시험이 끝나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걸까. 잊으려 애를 썼지만, 그가 꿈에 나타날 때마다 그녀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오늘도 깊은 생각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 푸름은 연필을 내려놓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가니-?”

팔이 없는 민소매 티셔츠 위에 흰색 린넨 남방을 걸친 푸름은 한쪽 어깨에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을 하나 걸치고 빠르게 자신의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도 식구들에게 얼굴도 비추지 않고 나가려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삼 개월 째, 늘 해온 것과 같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을 나설까 하던 푸름도 어느덧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을 할 여유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잘 다녀와.”

푸름의 대답에 인사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못 본 사이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푸름이 아픔을 앓았던 만큼, 그것을 지켜보던 그녀의 얼굴에도 주름이 늘어난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푸름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현관을 나왔다. 현관문 위에 걸려있는 낡은 종이 디링-! 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의 다짐만큼이나 소리는 확고하고, 경쾌했다. 지난밤의 꿈을 메모하느라 다른 요일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그녀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을 멈췄을 때, 딱 맞춰 버스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니 차가운 바람이 천장의 에어컨을 통해 불어왔다. 인공 바람을 싫어하는 푸름은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팔을 들어 머리 위에서 바람을 뿜어내는 에어컨 뚜껑을 닫아버렸다.

***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푸름이 향한 곳은 파란 바탕에 하얀색 크루와상의 모양이 그려진 간판을 가진 빵집이었다.

“안녕하세요!”

푸름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입구로 들어섰다. 구워지고 있는 고소한 빵 냄새가 그녀의 코로 들어왔다. 묵은 에어컨의 퀴퀴한 바람 냄새를 맡다 코로 들어온 빵 냄새는 더 향긋하게 느껴졌다. 푸름은 빠르게 주방으로 들어가 은색 대형 냉장고 옆에 걸려있는 파란색 앞치마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앞치마를 목에 걸고 허리끈을 뒤로 묶었다. 하얀 셔츠 위의 파란 앞치마, 빵집의 파란 간판, 파란 식기 들과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Part 1. 왜 자꾸 나타나, 나를 괴롭혀

“푸름 씨, 오늘따라 활기찬 것 같네요-.”

주방 안에서 흰 모자와 가운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일하는 두 달 동안 이런 모습 못 봤는데.”

“몸이 안 좋았던 게 이제 점점 기운이 나나 봐요.”

“보기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푸름은 선반 위에 갓 구워진 빵들이 놓인 쟁반을 올리는 그녀에게 싱긋-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아직 그녀의 가슴의 한쪽은 비어있는 듯 공허했지만, 이제 이 정도의 연기 아닌 연기는 할 수 있는 시기가 온 듯했다.

“여기 첫 번째 줄에 끼운 빵들, 위에 케첩이랑 파슬리 가루 뿌려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푸름은 사장의 지시대로 선반에서 쟁반을 빼서 넓은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냉장고로 향해 케첩을 꺼낸 후 일렬로 놓여있는 빵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장이 다음 지시를 내리기 전, 알아서 다음 선반에서 빵을 꺼내 이번엔 미리 준비된 생크림을 빵 속에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눈에 보이죠?”

“네. 빵이 매일 조금씩 달라지긴 해도, 준비된 것 들을 보면 뭘 해야 할지 보여요.”

어느새 일에 빠져 들어버린 푸름은 사장을 쳐다보지 않고 장갑을 낀 손으로 계속 빵을 만졌다. 빵집이 오픈하기 2시간 전, 사장과 푸름은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다 빵을 준비하는 것에 집중했다. 푸름은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일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준비를 마치고 카운터로 자리를 옮기면 또다시 공허함은 밀려들어 왔다. 머리로는 민우를 생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의식은 습관처럼 그를 찾았다.

***

“수고했어요, 푸름 씨-.”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하루, 벌써 영업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푸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장님.”

“오늘도 먼저 들어갈게요. 정리하고 문 잠그고 조심히 들어가요.”

옷을 갈아입은 사장은 푸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푸름은 대답을 하는 대신 눈으로 인사했다. 사장은 출입문을 열고 나가면서 유리창에 붙은 ‘OPEN’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CLOSED’로 바꾸었다. 푸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 즈음, 청소기를 가지러 주방 옆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대중으로 창고 깊숙한 곳에서 청소기를 발견하고는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달칵-. 하고 빵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사장님인가?’

푸름은 집어 들던 청소기를 다시 내려놓고 앞치마에 두 손을 닦았다. 그리고 창고 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계세요-?”

푸름의 눈앞에는 키가 크고 피부가 밝은,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연갈색 머리와 잘 어울리는 하늘색 셔츠와 푸른 빛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청년을 잠시 쳐다보고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OPEN’ 글씨가 보이는 팻말을 가리켰다.

“영업 마감됐습니다.”

푸름은 남성이 돌아갈 것을 예상하며 손을 내리고 다시 창고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그때, 남자의 맑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화들짝 놀란 푸름은 뒤를 돌아 남성을 쳐다보았다.

“혹시….”

‘뭐지?’

전혀 나쁜 짓을 할 것 같지 않은 남자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쭈뼛거리며 수상하게 굴었다. 푸름은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녀를 찾는 남성을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봤다.

“혹시… 아… 정말 죄송한데….”

“뭐죠?”

“혹시, 남은 빵 있나요?”

“네-?”

‘빵 남았냐고 묻는 게,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일인가?’

푸름은 남성을 향해 앞쪽으로 목을 뺐다.

“남은 빵은 왜 찾으세요?”

“어머니가 여기 빵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오늘 생신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인상을 찌푸렸던 푸름의 표정이 한층 편안하게 누그러졌다. 푸름은 ‘잠시만요’라고 빠르게 말한 후 주방으로 향했다. 다시 주방에서 나오는 그녀는 자신의 어깨보다 넓은 쟁반 위에 투명한 비닐봉지에 포장된 빵을 열댓 개 들고나왔다.

“민폐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청년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 괜찮아요. 저희도 어차피 팔지 못하면 버리는 거니까요.”

푸름은 손목에 끼고 있던 고무줄을 꺼내 풀었던 갈색 머리를 다시 묶었다. 그녀의 목선은 가늘고 길었다.

“자….”

그녀는 남성의 앞에 놓인 선반 위에 빵을 차례대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거의 하나씩 밖에 남지 않았어요.”

모든 빵을 다 올려놨을 때 그녀는 두 손을 마주쳐 소리를 내며 털었다.

“이건 크림 소보루 빵이고…이 다음 건 블루베리 크림치즈 번, 다음 건….”

“이거 다 주세요.”

남성은 푸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빵 전부를 가리켰다. 푸름은 입술을 앞으로 쭉 빼고 서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계산기를 다시 켜야 되는데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네. 참고로 현금이에요.”

“그래도 기다리셔야 해요.”

“네.”

남성은 차렷 자세로 서서 전혀 부드럽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푸름은 계산대 아래에서 제일 큰 비닐봉지를 꺼냈다. 봉지의 겉면에는 검정 테두리의 크루와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봉지를 벌려 빵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네. 계산기가 이제 켜졌네요. 총 가격은 48500원입니다.”

“네!”

남자는 대답을 하더니 바지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내 푸름에게 건넸다.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다. 푸름은 계산기를 열어 지폐를 넣었다. 그리고 남성에게 거스름돈을 건네려 천 원짜리 한 장과 오백 원짜리 하나를 꺼내려던 찰나, 돈 통에 돈이라고는 오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다. 푸름이 오천 원을 꺼내며 남성의 얼굴의 높이로 들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잔돈이 이것밖에 없네요.”

푸름은 남성의 얼굴 옆쪽으로 눈길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마감 시간보다 삼십 분은 더 지난 시간이었다. 푸름의 시선을 눈치챈 그는 손을 머리로 가져가 살살 긁었다.

“아, 제가 죄송합니다. 늦게까지. 그냥 거스름돈은 안 받을게요. 천오백 원인데요, 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 때문에 다시 빵도 꺼내주시고 감사드립니다. 얼른 주세요. 퇴근하셔야죠.”

“네, 감사합니다.”

푸름은 빵 봉지를 남자의 손에 건넸다. 남자는 봉지를 받자마자 재빨리 가게를 떠났다.

‘휴….’

푸름은 남자가 완전히 가게를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끝이 어깨에 닿아 찰랑거렸다. 아직 청소기도 밀지 못한 푸름은 언제 퇴근을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늘 하루 청소기를 밀지 마…?’

그녀는 고개를 양 옆으로 휘적거리며 속으로 ‘아니야’를 외쳤다. 게다가, 어느새 그녀는 청소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

푸름이 가게를 나서며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가게 입구를 잠그며 어깨에 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에 들어가 번호 하나를 눌렀다.

따르릉 신호가 몇 번 지나자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름 씨, 이렇게 늦게 웬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어요?”

“사장님, 남자 손님 한 분이 마감하고 나서 와서, 남은 빵을 다 사 갔어요.”

“그래요? 와-.”

“근데 제가 청소기를 다 밀고 나니까 열한 시인데….”

푸름은 사장에게 약간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그러네. 집에 가면 거의 열두 시겠네요. 푸름 씨 미안해요-. 내일은 내가 혼자 오픈 할 테니까 점심 먹고 나와요. 오늘 늦게까지 수고했어요!”

사장은 바쁜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푸름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전화기를 끊었다.

“감….”

푸름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