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일까, 아니면 인연일까?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에서 끝나는 여행. 그녀는 어느새 독일에 도착해 있었다. 여행계획을 세우는 시간보다 여행을 하는 시간이 훨씬 짧게 느껴졌다.

태양은 붉은 여운을 남기면서 아름다운 건물들 뒤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햇빛이 사라진 바닥은 얼마 없던 열기마저 순식간에 잃고 차가워졌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걸은 탓에 땀방울이 그녀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혀 있다.

무거운 배낭을 의자에 툭 내려놓은 그녀는 안주 없이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맥주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에 담긴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겨봤다. 오늘 지나온 곳들이 마치 한참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테이블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곳인데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묘한 뿌듯함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혹시 여기 앉아도 될까요?”

낯선 나라에서, 낯선 도시에서 들리는, 어느새 낯설게 느껴지는 한국어에 고개를 들었다.

크로스백을 대충 걸치고 있던 그는 이마까지 푹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축축하게 젖은 이마에 콧잔등 위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난감함과 간절함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 네. 그러세요.”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한마디에 작은 숨을 내쉰 그는 가방을 빈 의자에 벗어 던지고 의자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손등으로 쓰윽 콧잔등을 닦아내며 코끝을 실룩거렸다.

“감사합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에 앉은 그는 지친 얼굴과는 반대로 한 손을 힘차게 흔들며 큰 목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메뉴판을 건네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잔을 가리켰다.

“디스 원 플리즈.”

그는 손가락으로 연신 그녀의 앞에 놓인 맥주잔을 가리켰다. 그의 행동에 그녀를 보던 웨이터는 그녀가 살짝 내민 맥주잔을 보고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둘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의 행동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에 그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금세 그의 앞에도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놓였다. 아직까지 바깥의 찬 기운이 손끝에 남아 있었지만 맥주잔을 감싸 쥔 손에 느껴지는 시원함은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맥주잔을 들고 입가에 가져가려는 순간 자신을 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맥주잔을 들어 허공에 잠시 가져다 대었다.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맥주잔을 가져다 대며 소리 없이 잔을 부딪쳤다.

“한국에서 오셨나 봐요.”

“네.”

낯선 사람의 질문이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와 맥주가 주는 편안함에 그의 질문을 가볍게 받아 주었다.

영국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에서 끝나는 여행 중이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살짝 놀랐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여행 루트와 정반대에서 출발해서 정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방향은 달라도 결국 먼 이국에서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은 다 비슷비슷 하구나 생각했다.

그동안 여행에서 봤던 모습을 공유하고 다음에 가 볼 곳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만들어 서로의 가방 속에 담아주었다.

맥주를 마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쳐있던 그의 표정은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독일 맥주가 시원하고 맛있어서인지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어느새 붉은 가로등 불빛이 바닥 구석구석으로 깊이 깔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게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서로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둘은 그렇게 신비로운 추억을 테이블 위에 남기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던 그녀는 그가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더 할래요?”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말투. 평소라면 망설임 없이 웃으며 거절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몇 명 있었다.

여행이어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합석에 동의했을 뿐 별다른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같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는 동료애 정도만 살짝 느껴졌을 뿐이다.

‘내가 괜한 여지를 줬나?’

그 잠깐의 순간에 들어온 그의 모습. 너저분하게 기른 머리는 모자에 눌려서 우스꽝스럽게 뻗쳐있었다.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 크로스백을 대충 걸쳐 맨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한 손에는 모자가 꾸깃하게 들려 있었다.

살짝 취기가 오른 그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어 보였다.

“그럴까요?”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은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외모가 거절하면 후회할 정도로 잘생긴 외모도 아니었다. 대화를 하면서 느꼈던 말하는 본새나 중간중간에 보였던 행동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한 혼자만의 여행에 즐거움을 준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화 내내 보여주었던 꾸밈없었던 그 미소. 지금도 여전한 그 미소. 보면 볼수록 편안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누군가의 미소를 보고 이런 마음이 든 것은 상당히 오래간만이었다.

조금 더 이 시간을 늘려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 아는 데 있으세요?”

가로등 아래 그늘진 그의 표정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 혹시나 하고 던진 말을 받아 준 그녀가 믿기지 않았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지만 또렷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니 그녀가 한 말이 확실했다.

‘간다고?’

그제야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던진 말이라 따로 아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가봐야지 하고 찾은 곳이 방금 전에 나온 그 맥주집이었다. 복잡했던 머리는 점점 더 새하얘졌다.

‘어딜 가지? 아는 곳이 없는데. 진짜 가는 건가?’

그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표정으로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대화 내내 흥분하면서 이야기하던 표정이나, 지금처럼 난감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이나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저러면서 어떻게 한잔 더 하자고 말한 걸까?’

그녀는 자신을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막 검색해서 띄운 핸드폰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갈까요? 혼자 가기 좀 그런 곳이라 안 가려 했는데 같이 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네? 아 그러죠.”

그녀가 앞장서서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으로 향하였다. 그는 재빨리 그녀 옆에 붙어 서며 말없이 그녀가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분위기에 취해 마시기는 했지만 역시나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생각보다 숙취가 심했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두꺼운 커튼 탓에 방 안이 어두웠다.

“아으. 추워.”

배 아래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보고는 몸이 굳어 버렸다.

‘왜 옷을 다 벗고 있는 거지?’

속옷만 입고 있는 몸. 박하게 난방을 틀어주는 유럽호텔 탓에 항상 두툼한 옷을 껴입고 잤다. 그런데 지금은 위아래 속옷만 달랑 입은 채였다.

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 순간 욕실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온 신경을 욕실에 향하였다.

‘누구지?’

들리던 물소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닫혀있는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문 건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윽고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천천히 열리는 문으로 걸어 나온 그는 긴 바지를 입고 상체는 벗은 채 목에 수건만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수건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몸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 일어났어요?”

그의 목소리에도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대신 끌어올린 이불을 더욱 꽉 잡아 쥐며 목 끝까지 잡아당겼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사장님?”

태민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댄 채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평소에는 남 일에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뚝뚝하던 서브셰프 다희까지 주방 입구에 기대선 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연락처는?”

“그냥 와인 한 잔 먹고 헤어졌어. 무슨 연락처까지 물어보냐? 그냥 잠깐 대화 정도 한 거지.”

“아 참 답답하네. 그럴 땐 좀 들이댔어야죠. 대화라니…….”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태민의 시선에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행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에 아차 싶었다. 그녀와 있었던 그 뒤의 이야기까지 하면 태민의 성격상 뒷수습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날 아침 그녀의 표정과 행동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잔뜩 질려 있던 그녀의 표정 때문인지 더욱 이야기하기가 꺼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좋을 것도 없었다. 욕을 먹었으면 욕을 먹었지.

조용히 서 있던 다희는 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서 팔꿈치를 떼고 의자에 기대앉은 태민은 김이 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장 안이 다시 조용해 졌다. 아직 오픈 전이라 다 켜지지 않은 불빛 때문에 구석구석이 어두컴컴했고, 높은 천장 탓인지 공허한 바람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때때로 들리는 주방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벽을 타고 울렸다.

“들이대긴 뭘 들이대.”

“그래도 보통 그 정도면 연락처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아요?”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기도 했고.”

“어려 보이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참나. 거기서 그런 걸 따지나.”

생각해보면 태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람인데 전화번호는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 그날 밤의 일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장님도 이제 34살 아니에요? 33살인가?”

태민은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리면서 툭 내뱉었다.

“32살이야.”

“그니까. 저랑 4살 차이잖아요. 사장님도 아직 젊은 나이 아니에요?”

“너한테 젊다는 소리 들으니까 이상한데? 그리고 그 사람 너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어.”

“어쨌거나 혼자 여행할 정도면 최소 20살은 넘었다는 건데. 이래서 어디 연애나 하겠어요?”

“왜 이게 내 연애사까지 가냐?”

태민은 핸드폰에 향해 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두 눈을 지그시 뜨고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애들 말도 일리는 있네. 그 여자도 전화번호 안 물어봤으면 뭐 얘기 끝난 거지.”

“무슨 애들 말? 너 혹시 다른 사람한테 얘기했냐?”

태민은 자신이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돌려 그에게 보여줬다.

화면에 보이는 메신저에는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야, 인마! 너 이 자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태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다.

자리에 서서 그런 태민을 내려다보던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지만 딱히 쏘아붙일 말도 없었고, 있다고 한들 태민 성격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릴 것이 뻔했다.

태민은 때마침 주방에서 나오는 다희를 불러 세웠다.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사장님이 방금 얘기한 거. 전화번호를 물어봤어야 했지?”

다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민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다희의 대답은 또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눈이었다.

“글쎄.”

“글쎄 라니. 누나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은데?”

“글쎄.”

“하. 말을 말자 말을 말어.”

태민은 손사래 치며 대화를 끊어 버렸다.

문을 열고 매장 밖으로 나가려던 다희는 마주 오던 여성을 보고는 살짝 몸을 돌려 길을 열어 주었다.

늘 그렇듯이 상큼한 자몽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너무 진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 않은 딱 좋은 정도의 향기.

자신의 앞을 비켜준 다희를 향해 그녀는 늘 같았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가?”

“그냥 바람 좀 쐴까 해서요.”

“그래? 현우 안에 있지?”

그녀는 다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닫히는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밖에 홀로 남은 다희는 유리문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코끝에서는 자몽 향이 그득했다.

레스토랑 안에 들어온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그를 발견했다. 머리는 덥수룩했고 소매 밖으로 보이는 손은 전보다 훨씬 새까맸다.

“야, 임현우. 넌 여행 갔다가 왔으면 갔다 왔다고 연락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어! 현아 누님이다.”

현우는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서 자신을 향해 쏘일 듯 달려오는 현아를 쳐다보았다.

“어, 누나. 머리 잘랐네.”

현아는 어깨 위까지 짧게 자른 자신의 단발머리를 힐끗 훔치고는 그대로 눈을 치켜뜬 채 현우를 노려보았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여전히 엎드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현우의 표정은 안 그래도 화가 난 현아에게 기름을 끼얹었다.

다른 말없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현우 앞으로 다가간 현아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뗀 채 다시 엎드리려는 동생의 뒤통수를 그대로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현우는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는 듯했으나 겨우 테이블을 기대 잡고 넘어지기 직전에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너는 갑자기 여행을 간다고 한 달 동안 가게 문을 닫지를 않나. 언제 오냐고 하니까 때 되면 갈 거라는 정신 나간 소리만 해대고. 갔다 와서는 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애들한테 연락해서 가게 문을 열어 놓고는 누나한테는 연락 한 통 안 해?”

현우는 의자를 고쳐 잡고 앉아 누나에게 맞은 뒤통수를 쓱쓱 문질렀다. 방심한 사이 맞은 탓에 골이 세게 울렸다.

현우 옆에 있던 의자를 빼내 앉은 현아는 힐 끝으로 현우의 정강이를 톡톡 찼다. 뒤통수를 친 것부터 지금 하는 행동까지 하나하나가 성질을 긁었지만 꾹 눌러 담으며 참았다. 기가 센 누나의 성격을 알기에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했다. 누나 말대로 연락 한번 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기에 받아 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입만 꾹 다물고 있는다고 지금 상황이 금방 끝날 거 같지도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살짝 화를 내줄 필요도 있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누나한테 일일이 다 보고하고 다녀야 해?”

“철 좀 들어라, 장현우. 네가 잘하면 내가 이러겠냐? 계속 이딴 식으로 나오면 확 아주 투자금 빼버린다!”

“치사하다, 치사해. 누가 빌려 달라고 그랬나? 내가 빨리 갚고 말지.”

“이렇게 장사해서 과연 어느 세월에 갚으실까요? 입소문 좀 타서 이제 조금 자리 잡나 했더니 어떻게 이 시기에 가게 문을 한 달이나 닫아버리는 그런 탁월한 선택을 하실까. 내 동생이지만 참. 너 좀 모자라니?”

“아, 그만 좀 해라. 잔소리하지 말고 가서 누나 가게나 열어.”

“얻다 대고 명령 질이야, 이게. 제 가게는 사장이 없다고 문을 닫아야 하는 그런 허술한 곳이 아니어서 잘 돌아가고 있거든요. 초보 주제에 건방지게 까불고 있어. 밤에 가게나 들려 그 머리 좀 어떻게 하게.”

현아는 자리에 일어나서 주름진 코트를 두 손으로 탁탁 폈다.

“안 가.”

“마감 시간에 들려. 직원들한테 너 몰골 보여주기 쪽팔리니까.”

“안 간다고!”

“태민아 누나 간다. 너도 고생이 많아. 사장이 모지리라서.”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가요.”

“저 자식 사지 멀쩡한 거 봤으면 됐지 뭐. 더 보고 있다가는 울화통이 터져서 있을 수가 없다, 있을 수가 없어. 넌 엄마랑 아빠한테도 전화 좀 하고. 내가 네 대변인이냐?”

“아, 시끄러워. 안 간다고 했어.”

자신이 때린 뒤통수를 쓰다듬은 채 시선을 피하는 현우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4살이라는 적지 않고 많지도 않은 나이 차이. 철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예상치 못하게 튀는 것 보면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아이 같기도 하다.

밑도 끝도 없이 고등학교 때 희망 진로를 요리사로 잡은 것부터 시작으로 결국 호텔조리학과를 선택하는 것까지. 확고한 꿈이 있다는 것은 좋지만 그 확고한 꿈이 현아가 보기에는 너무 쉽게 결정한 가벼운 꿈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