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때 그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대 뒷모습이 아닐지 몰라도.

아니, 그대 뒷모습이 아니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대로 멈춰 살아가고 있다. 그대 뒷모습을 붙잡고.

* * *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한 은완은 오늘도 벤치부터 찾아 앉았다. 약속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이 어지럼증 때문에 서둘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은완은 허리를 숙이고 무릎 뒤로 두 팔을 넣어 다리를 감싸 안았다. 드러나는 은완의 하얀 목덜미에서 얇은 목걸이 줄이 반짝였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어지럼증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은완은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았다. 공항 안을 오고 가는 바쁜 사람들 가운데 혼자 섬이 되어버렸다.

Rrrrrr

-어디야?

-공항.

-벌써? 그래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야? 아예 윤이랑 눌러앉는 건 아니지?

수연의 가벼운 농담에 은완은 기꺼이 웃으며 동조했다.

-왜 아니야. 윤이 정도면 훌륭하지. 무엇보다 키우는 재미가 있지.

-키우는 재미? 야…아서라. 그보다 윤이 아버님을 먼저.

-수연아. 교수님은,

농담으로 받으려고 했었는데 결국 정색하게 만든다.

-은완아. 서 교수님은, 하고 시작하면, 그다음 이어질 말 다 알아. 근데 너 그렇게 사는 거, 내가 다 지친다.

-그래 알아. 근데 수연아.

-알았어. 은완아. 그냥 잘 다녀와. 됐지?

서둘러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수연이 좋은 마음으로 전화를 했음은 알지만, 종잡을 수 없는 그녀와의 대화는 감당하기 힘들 때가 더러 있었다. 다시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며, 얼마나 시간이 남았으려나. 시계를 보려던 은완은 그대로 멈추었다.

뒷. 모. 습.

은완은 정말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린 듯 그대로 뒤따르던 발걸음이 그를 놓칠까 봐 점점 빨라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은완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가방이요.”

어느 틈에 떨어트렸던 가방을 받았다. 주변을 다시 둘러봤지만, 뒷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네… 또 사라져버렸네.

은완은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설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는데.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바람이었으나, 또 놓쳐버렸다.

출국 수속을 준비하는 사람들 속에 키가 큰 두 남자가 있었다.

하얀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 너머 쌍꺼풀이 깊게 진 남자는 이국적으로 보였다. 너풀거리는 긴 곱슬머리에 장난기 많아 보이는 남자가 연신 말을 건넸다.

차분하게 머리를 내린 남자의 얼굴은 그려놓은 듯 반듯한 눈썹과 콧매까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속쌍커풀이 살짝 지어지고 가로로 길고 큰 눈의 남자는 피곤해 보였다.

아까부터 캐리어를 발로 툭툭 차던 곱슬머리가 물었다.

“혁주야. 짐은 이게 다야?”

“응”

“머 이리 간단하냐?”

“한두 번 가냐?”

덤덤하게 말을 받아준 혁주가 등을 돌려 승무원에게 여권을 내밀며 티켓팅을 했다. 상진은 수트를 벗고 오랜만에 캐주얼하게 입은 혁주를 걱정스럽게 봤다.

미친 듯 일하며 퇴근을 모르는 워커홀릭 팀장으로 유명한 혁주는 해외 출장까지 자진해서 다녔다. 팀원들의 앓는 소리에 상진도 나서서 휴가를 가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중동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자, 혁주는 무려 한 달의 휴가를 받아냈다. 휴가를 가라고 등까지 떠밀던 입장이라 허락은 했지만, 상진은 자리를 길게 비우는 그가 내심 불안했다.

게다가 봉사를 함께 하던 친구들과 만나 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니, 이렇게 떠나 또 방황이 시작되지 않을지 염려되어 일부러 나온 배웅이었다.

“뭐하러 나오냐? 촌스럽게.”

“그르게. 내가 좀 촌스럽다. 인마. 뭐 이런 기회에 공항 구경도 하고, 이쁜 스튜어디스 누나들도 보고. 응? 머 그런 거지.”

“미친놈. 너 이러고 다니는 건 네 애인은 아냐?”

“애인은 무슨. 아니 왜 농담을 너는 다큐로 받아?”

“미친놈.”

상진과 혁주는 서로 싱겁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시큰둥하게 한마디 뱉었지만 여기까지 나온 상진의 염려를 잘 알고 있었다.

“혁주야. 아직 시간 남았다. 우리 차라도 한잔하자.”

“미친놈. 시꺼먼 사내끼리 무슨.”

“아, 혁주야. 나 요즘 애정 고파.”

혁주가 들러붙지 말라며 상진의 손을 쳐냈다. 집요하게 매달리던 상진의 전화기가 갑작스레 울렸다. 통화하는 상진을 보며 근처에 카페가 있는지 찾던 혁주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녀일까. 그래… 그때 그녀처럼, 그날의 그녀처럼…

저 사람은 혁주가 놓은 그녀와 참 닮았다.

그녀의 하얀 목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기는 손짓이 떠올랐다.

투명하며 맑았던 피부가 참 예뻤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입술은 화장한 것처럼 항상 붉은 빛이 감돌았다.

고집스레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앉아있는 습관까지 저 사람은 그녀를 참 닮았다.

혁주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인사를 어떻게 하면 될까. 오랜만이라며 악수를 해야 할까. 아니 그냥 품 안에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혁주가 다가설 수 있는 거리 안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꿈이 아닐까. 오랜 시간 품어온 내 그리움이 만들어 낸 가짜일까. 그럼 가서 만나도 되지 않을까. 놓았으나 놓지 못했던 나의 그녀라면 얼굴 정도는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일 때 상진이 불쑥 들어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응. 아니야.”

“저기 저쪽으로 가자.”

상진은 혁주를 잡아끌다시피 카페로 데려갔다. 혁주는 그녀와 닮은 그 뒷모습으로 향하던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다잡아 옮겼다.

“많이 마셔 둬라. 커피는 한국이 제일 맛있다.”

“실없는 놈. 생색은.”

카페에 자리를 잡으며 상진의 한마디에 또 한 번 웃었다. 그런 혁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상진이 물었다.

“아직도… 그러냐?”

“뭐가 아직이야?”

“다 알아들었으면서. 딴청은. 실은 아까 나 봤다.”

혁주가 손이 멈추고, 상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뭘 봐?”

“은완이.”

반사적으로 혁주가 몸을 일으켰다. 혼자 쳐다보며 그녀일까 생각했지만 오랜 그리움으로 착각이겠거니 설마 아니겠지 하며 망설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급히 그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혁주를, 상진이 잡았다.

“혁주야. 난 그 애를 보고, 너는 보지 못했으면 그 생각부터 들더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어가는 혁주의 표정을 살피며 상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혁주야, 이미 놓쳐버린 인연이야. 이제 정말 놓아. 다 내려놓아라. 응?”

“먼저 알았으면. 먼저 봤으면, 말을 해 줘야지. 먼발치에서라도 보게 해줬어야지.”

“혁주야. 막말로 은완이는? 그 아이도 그대로일까? 너처럼?”

“…”

“정말 은완이가 여전히 너 기다리면서 그렇게 살고 있을까? 너 확신할 수 있어?”

확신할 수 있냐는 상진의 질문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제 맘이 그대로라고 은완이 마음이 그대로일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다 잊고 다 접고 새 출발을 하기를 누구보다 빌던 혁주였다.

“혁주야. 그래. 아프리카에 가서 다 놓고 와라. 내가 정말 부탁한다.”

어색한 침묵 속에 상진과 헤어지고, 출국 게이트로 들어섰다.

그때,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내가 놓쳐버린 그녀가. 오래전에 내가 놓아버렸던 여자, 은완이었다.

「좀 잘 먹고 다니지…」

「밥 잘 먹고 있거든요.」

도드라진 턱선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면 또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을 게 분명하면서도, 지지 않고 우길 그녀였다.

그러고 보니 염색도 했구나. 유난히 까맣던 머리카락이 보기 좋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 유난히 까맣던 은완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좋아했었다.

「네가 고집이 세니까 머리카락도 남들보다 더 까맣지.」

「아. 진짜….」

라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핀잔을 주면, 뭐라 반박도 못 하고 입술만 내밀던 얼굴이 귀여워 웃음을 참느라 애먹었던 어느 날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해외여행 간다는 친구들 얘기를 하며, 자기는 아직 여권도 없다고 투덜대는 은완이었다.

「오빠. 우리 셰어하우스 애들. 모두 다 여행 간대요.」

온종일 시무룩해서 우선 여권부터 만들기로 하고 사진관에 데려갔었다.

「아저씨. 아니 사장님. 저 진짜 잘 나와야 해요. 잘 좀 부탁드려요.」

은완은 이쁘게 나와야 한다며 사진관 아저씨를 한참 졸랐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 보고 또 보았었다.

「야. 이은완. 너 큰일 났다. 이 사진으로 여권 만들면 입국 못 하겠는데.」

「응? 왜요? 뭐 잘못되었어요?」

「실물과 너무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오. 빠!」

보정이 심했다며 사진을 보며 누구냐고 입국 거절당하겠다고 한참을 놀렸었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열 받은 얼굴이 재밌어서 장난을 포기하지 못했었다.

은완을 보자마자 봉인되었던 자물쇠가 열리듯 옛날의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은완아. 내가 너를, 은완아. 그걸 네가 알고 있을까. 응? 우리 은완이.

혁주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버린 걸 알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혼자 웃고 우는 미친놈으로 보이겠지. 혁주는 서둘러 선글라스를 꺼내 자기 얼굴을 숨겼다.

혁주는 은완이 걸어간 방향을 봤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아직 출발도 하기 전인데 벌써 지쳤나. 혁주는 걱정하며 뒤를 따라 걸었다.

그때, 은완이 멈춰 선 게이트는 혁주와 같았다.

‘같은 비행기.’

같은 런던행 비행기를 타려나 보다. 은완의 눈에 띄지 않고 장시간 비행이 가능할지부터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봐도 될지, 피해야 하는데, 혁주는 눈앞에 은완을 두고 돌아설 수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최대한 조용하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긴 세월 그리워했으니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이지 않을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에 숨어 은완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혁주는 오랜만에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 * *

윤은 런던으로 가기 전 마지막 점검으로 병원에 들렀다 오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진영이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아까부터 자꾸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잠깐 힘들었던 탓인지, 울었던 탓인지 눈은 그사이 충혈되었다. 윤이 녀석이 보면 또 놀리겠구나 싶어 화장품을 찾아 잘 바르지도 않던 립스틱을 일부러 꺼내 바른다. 붉은 기운이 도니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은완은 화장품 가방을 넣으며 삐져나온 여권을 꺼내 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쓸어 넘기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야. 진짜 안 닮았어. 전혀 다른 사람이야. 너 입국심사에 걸린다니까.」

실물이랑 닮지 않아서 입국 거절당하고 붙잡혀갈지도 모른다고 놀리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울컥해지는 마음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을 때였다.

“저 왔어요.”

기분이 좋지 않은지 걸음 소리가 무겁게 들리는, 윤이 먼저 인사를 했다.

“어서 와. 윤아.”

“이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윤이 아빠 진영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은완은 이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윤에게 말을 건넨다.

“윤아 밥은 먹었어?”

“네.”

“약은 챙겼어?”

“네.”

“비행기 안에서 입을 옷도 넣어왔지?”

은완은 윤을 보자마자 컨디션을 묻고 짐을 확인했다.

“책도 챙겨오라고 했는데 어딨어? 안 가져왔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살까? 목 베개도 넣어왔지?”

“하나씩 물어보세요.”

“어?”

뾰로통한 윤의 목소리에 은완은 머쓱해지고, 그 모습을 보는 진영은 빙그레 웃고 만다.

“까칠하기는… 그래 알았어. 다 잘 챙겨왔다는 뜻이지?”

“네.”

“대답 참 짧다.”

“네.”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은완을 보며 진영이 말을 건넸다.

“이 녀석이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요.”

“네.”

“오는 내내 저 모양이었어요.”

“네.”

“이 선생님도 대답이 짧으시네요.”

어색하게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을 두고 물러선 윤은, 작은 공을 갖고 놀며 조금씩 멀어져갔다.

“이번에도 이렇게 신세 지네요.”

“아니에요. 윤이 일이잖아요.”

“제가 함께 가야 되는데…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요. 서둘러 마무리하고 5일,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뒤따라갈게요.”

진영도 원래는 런던행을 처음부터 동행하려 했지만, 일정이 꼬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