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퇴원을 한 혁주를 데리고 상진은 포장마차에 왔다.

“그냥 놓아. 놓으면 좀 어떠냐? 응?”

“미친놈. 지는.”

“나? 내가 뭐? 나 연애 잘하잖아.”

“연애는 무슨.”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혁주가 쓰게 웃었다. 수연을 잊지 못해서 스페인까지 날아가서 몰래 보고 오는 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상진은 연애를 한다고 우기지만, 세 번 이상 지속하지 않는 가벼운 만남으로 집안 어른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혁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둘 다 정상은 아니지.”

“유유상종 모르냐? 다 끼리끼리지.”

은완이 편안해 보였다는 민주의 말을 듣고 돌아왔다. 힘들었을 시간에 떠났으면서 편안해 보인다기에 돌아온 마음을 혁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를 잃어버리게 한 죄인의 아들로 은완 곁에 설 수는 없을 일인데,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은완 곁에 머물 자격이 없었다.

사랑하던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대신해서 은완 앞에 잘못을 빌 용기도 없었다. 그래. 결국 비겁하고 찌질하고 천하의 나쁜 놈. 그게 자신이었다.

“그냥. 술이나 마시자.”

“그래. 그냥 술이나 먹자.”

뜨거운 어묵이 두 사람의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빈속에 먹지 마. 따뜻하게 속 데워가며 먹어요. 응?”

따뜻한 한마디를 하며 어묵을 내려놓으시는 포장마차 할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혁주는 마른세수를 하며 잔을 비워냈다.

“할머니도 그러셨는데. 상진아. 그치?”

“응. 그러셨지.”

“속 데워가며 먹어요. 하면서 안줏거리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그치?”

“응. 그러셨지.”

꼭꼭 묻어두었다. 그때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마저 죄책감이 느껴졌었다. 그런 이야기를 정말 용기 내어 꺼낼 수 있는 이 밤. 혁주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우리 할머니 댁 놀러 갔을 때, 그 평상에서 늦게까지 술 먹고 놀 때 할머니가 김치찌개 끓여가지고 상에 놓아주시고. 그치?”

“응. 네 그릇에 고기는 더 넣어 주셨었어.”

“맞다. 그래서 네가 막 투덜거렸지.”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두 남자의 눈가는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갔다. 따뜻하고 다정했던 할머니 품은 잊혀지지 않았다. 은완이가 그 품을 잃게 만든 사람은 혁주 자신이었다.

“사람 차별하시냐고 나도 고기 좋아한다고 내가 툴툴거렸지.”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그랬지. 너랑 손주사위랑 똑같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혁주는 소주잔을 붙든 채 그냥 울어버렸다. 한밤중에 포장마차에서 다 큰 남자가 아이처럼 울었다. 한참이나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 * *

혁주는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은완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은완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외국으로 도망 다니는 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라도, 어느 때라도, 혁주는 은완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다.

수연이 떠나고 상진은 부친의 바람대로 회사로 들어갔다. 선대에서 건축 자재를 팔던 작은 회사를 상진의 조부가 건설업으로 키웠다. 7, 80년대 개발붐을 타고 하루가 다르게 커지며, 계열사들이 늘어갔다. 상진의 부친이 회장이 된 현재는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기업이 C&C였다.

부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상진은 후계 구도를 준비하며, 혁주를 불러 해외 무역 팀을 맡겼다. 혁주가 팀에 들어오고, 전년 대비 확실히 성과가 올랐다. 운이 좋았다고 팀들 덕분이라고 공치사를 돌리는 혁주를 팀원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본부장 라인 타고 들어온 능력 없는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를 3개월 만에 떼어 버렸다.

“팀장님. 본부장님 오셨습니다.”

“네.”

“우리 울보. 오늘 기분은 어떠냐?”

“본부장님. 입 닫으시죠.”

지난 주말의 울보 곁으로 상진이 들어와 중동 진출 건을 의논했다.

“본부장님.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변수가 많은 지역이라 다각도에서 검토가 필요해.”

“응. 그만큼 우리에겐 확실한 돌파구가 될 거야.”

“그래. 기획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작은아버님 쪽에서 더 넘보지는 못할 거야.”

“중동 쪽에 우리가 승부를 거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지. 근데. 혁주야. 한 가지, 우리가 건축이랑 자동차를 동시에 밀어붙이는데, 힘이 약간 부족하진 않을까?”

리스크를 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충분히 검토하고 또 검토해야 할 일들은 많지만 상진의 겉도는 이야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혁주야. 송림이랑 같이 가면 어때? 공동투자인 거지.”

순간 혁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본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미 송림과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존대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섭잖아.”

“꼭 송림이어야 해?”

안전한 길을 가기 위해 공동투자로 진행하려면, 든든한 파트너가 필요했고 송림만 한 곳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송림에는 김가람이 있었다.

“아니다. 조 팀장. 이따가 저녁이나 먹자….”

“됐어. 안 먹어.”

“우리 팀장님. 몸보신 시켜줄게. 무조건 같이 저녁 해. 알았지?”

상진을 지켜보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얼마나 많은지 매일매일은 살얼음판 같았다. 상진의 입장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들의 실수를 기다리며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상진이 먼저 송림을 언급했다면 그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상진의 말들이 맴돌던 하루가 끝나고 두 사람은 정갈한 한정식이 나오는 식탁에 마주 앉아있었다.

“며칠째였어?”

“뭐가?”

“오늘 아침에 했던 말. 며칠이나 눈치 보고 있었던 거야?”

“귀신이네.”

상진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작은집 그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동진이 형이 형수랑 결혼하면서 아버지 눈 밖으로 났지만, 병원은 형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작은집 식구들이 그 자리마저 빼앗으려고 눈독 들이고 있어.”

“생각보다 욕심 많은 양반들이셨네.”

“우리 아버지 알잖아. 아니다 싶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것. 그러니 더 눈이 뒤집혀 달려들고 있어.”

“그래.”

월요일이었지만 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혁주야. 그래서 난 네가 더 필요해.”

“미친놈.”

“내가 성과를 내야 해. 믿을만한 놈이 되어야 해. 아버지 그늘이 아니라, 힘이 필요해.”

“…….”

“내가 그런 힘이 있어야, 우리 수연이 곁으로 가지.”

“미친놈.”

취기가 적당히 오르자 혁주는 술자리를 갈무리하고 상진을 데리고 나왔다. 기사를 기다리며 식당에 마련된 정자에 앉았다. 상진은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번번이 제대로 불이 붙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타박을 하면서 혁주는 상진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상진이 담배를 권했지만, 혁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만수무강해라.”

피식 웃으며 혁주는 상진과 나란히 앉아 밤바람을 맞았다. 그때였다.

“그래. 그쪽이랑 계속 접촉해봐. 곧 넘어올 수밖에 없어. 불안정한 투자에 올인할 만큼 어리석은 남자들은 아니거든. 아마 머리 터지고 있겠지.”

낯익은 음성에 상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오 전무님이 나서서 상대해 줘. 내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돼. 같잖은 자존심에 같이 하지 않으려 들 거야. 우리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잖아. 내 남자 내가 챙기는 거지.”

요란스럽게 웃으며 가람의 모습에 씁쓸해졌다. 가람의 남자가 여전히 혁주일까, 상진은 혁주를 돌아보았다. 혁주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고 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지난번 일은 어떻게 됐어? 돈 받아먹고 조용히 살고 있는 건 맞지? 그때 김 기사가 갖고 있던 건 확실히 정리된 거지?”

혁주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김 기사라는 사람은 분명히 아는 사람 같았다.

“또 찾아오지는 않았어? 한 번 받았으면 됐지. 언제까지 XX.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아봐. 겁도 없이 조혁주 주변에서 얼쩡거렸잖아.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내가 보상은 좀 해줘야지.”

듣던 혁주와 상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첫사랑 가람을 보기에도 아까워했던 스무 살 혁주였다. 어린 시절부터 품은 짝사랑을 받아 준 가람에게 혁주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건 가람이었다. 남자의 품에 안겨 호텔에서 마주했을 때 그녀는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눈을 피하지도 않고 웃었다.

얼마나 우습게 보았던 걸까. 가람의 오만한 얼굴에 치가 떨렸다.

은완을 입에 담을 이유가 없었다. 혁주가 가람의 것이었던 적이 있었나. 하긴 아주 짧은 시간 그러기도 했지만, 그 관계를 끊은 건 가람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가람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가람의 회사 송림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혁주에게도 생겼다.

* * *

“삼촌.”

“윤아.”

멀리서 해준을 알아본 윤이 공항이 다 울리도록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와 안겼다. 그 뒤로 진영과 은완이 나란히 걸어왔다. 해준 곁에 서 있던 민서가 은완을 반겼다.

“너도 나 부르면서 달려와 안겨야 하는 거 아니야? 지지배.”

“그래. 민서야.”

은완도 기분 좋게 민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민서는 1년여 만에 만난 은완과 진영의 공기를 재빠르게 탐색했다.

해준과 대화를 나누면서 간간이 은완을 바라보는 진영이 보였다. 윤의 손을 잡고 앞서 걸으면서도 뒤돌아보았다. 더 단단해져 보이는 그의 마음에 민서는 안도하며 은완을 보았다.

윤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손을 잡아주면서 은완은 민서와 눈을 맞추었다. 해준과 농담도 하고 진영의 물음에 답도 하며 웃었지만 비어있는 눈빛은 여전했다. 민서는 다시 한숨이 나왔다.

“은완아. 미국은 어땠어? 좋았지?”

“응. 재밌었어. 윤이랑 놀기도 좋았고, 여행도 다니고 잘 지냈어.”

“그래. 뭐 재밌는 일은 없었어?”

은완을 붙잡고 수다가 막 시작되는 민서를 해준이 말렸다.

“민서야. 세 사람 피곤할 거야. 오늘은 우리 인사만 하고 헤어지자. 응?”

“진짜 그래야 해? 응? 은완?”

“민서야. 나 오늘 집으로 갈 건데. 우리 쉐어하우스.”

“그치? 아싸. 오늘 밀린 수다 좀 떨어보자.”

두 여인의 합체 소식에 얼굴이 굳어지는 건 진영과 해준이었다. 민서와 빨리 결혼을 하고 싶은 해준과, 은완과 제대로 연애를 시작해보려던 진영이 합심하였다.

우선 쉐어하우스였던 민서의 집에 은완이 짐을 풀지 않게 하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는데 시작도 전에 흔들렸다.

당황스러운 진영과 내색하지 못하는 해준이었다.

“아빠.”

“응?”

“나. 배고파요.”

그러고 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윤이를 데리고 네 사람은 근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내 이런 것만 먹었을 텐데. 한식으로 먹을 걸 그랬다.”

민서가 냅킨을 들어 윤이 앞으로 내밀자, 은완이 받아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닦아주었다.

“아니야. 숙모. 나 스파게티 좋아요.”

“응? 숙모?”

윤이의 호칭에 민서가 당황하며 해준을 보자, 못 본 척 눈을 피했다.

“아까 걸어오면서 삼촌이 그랬어요. 이제 민서 이모 하지 말고 숙모 하라고.”

“응?”

민서의 따끔한 시선을 피하는 해준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헛기침을 하는 해준을 보며 진영과 은완도 함께 웃음이 나왔다.

“박해준. 누구 맘대로 숙모야? 응?”

“민서야. 그게 아니고.”

“아주 얼렁뚱땅. 그냥 넘어가려고?”

“응? 차민서. 그럼 제대로 하면 되는 거야?”

“뭘?”

상황이 역전되었는지 이번에는 민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받아주는 거냐고 자꾸 되묻는 해준 때문에 민서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다.

“이 선생님. 직관 재미가 좋은데요.”

“그러게요.”

“아빠. 누가누가 얼굴 빨개지나. 게임 같은 거야?”

윤이의 말에 진영과 은완은 더 크게 웃고, 잔을 부딪치며 직관의 재미를 누렸다.

“참. 은완아. 수연이 들어온대.”

“진짜? 언제 온대?”

수연의 귀국 소식에 갑자기 들뜬 두 여인이 흥분해서 술잔을 기울이자 해준과 진영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점점 계획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두 남자들에게 윤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삼촌이 시키는 대로 내가 숙모라고 했어. 잘했지?”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해준이 술잔을 들어 넘기려다가 그다음 말에 술을 뿜었다.

“그런데 삼촌, 선생님한테는 엄마라고 못 부르겠어. 그건 시키지 마.”

해준과 잔을 부딪치고 마시려던 진영도, 웃으며 물 잔을 들던 은완도, 사레에 걸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