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도경은 지금 아주 사나운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얼핏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 게, 어수선한 것이 절로 미간이 구겨질 지경이었다. 도경이 잠결에 꿈자리 한번 사납다고 생각하며 구시렁거리던 찰나.

“꺄아아아아아아!”

꿈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던 비명소리는 생생한 입체 서라운드로 도경의 귀를 찢어 놓았고,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도경이 가수면 상태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단 0.1초였다.

번쩍 눈을 뜬 도경의 눈으로 과하게 많은 양의 빛이 들어왔다. 이에 갑작스레 확대된 동공 때문에 몇 초간 눈 뜬 장님마냥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도경은, 그 몇 초가 지난 뒤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차라리 아까같이 아무것도 볼 수 없던 때가 더 나았겠다 생각했다.

진회색 페인트로 칠해진 낯선 천장, 맨살을 보드랍게 감싸고 있는 다크블루 계열의 낯선 침구류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숨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낯선 여자까지.

너무도 비정상적으로 낯선 상황에서 도경이 내린 판단은 ‘아직 꿈에서 덜 깼다.’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도경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말랑한 볼살을 집어 막 당기려던 차에.

“누구야, 당신!”

한껏 경계하는 듯한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자 그곳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헐벗고 있는 남자가 다크블루 색상의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남자의 팔뚝과 어깨는 제법 넓고 다부져 보였다. 얼핏 봐도 이 남자가 잘 깎인 조각상처럼 아름답게 쪼개진 근육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몸을 훑어보는 도경의 시선에 그는 더더욱 이불을 끌어 올려 자신의 몸을 꽁꽁 싸맸다.

도경의 존재를 물어 온 그의 눈빛엔 당황스러움과 함께 공포감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눈빛은 사슴처럼 물기를 머금어 초롱초롱한 남성의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못 돼 보이는 몸과 다르게 뽀얀 피부에 여자보다 새빨간 입술 그리고 겁에 질린 사슴의 눈을 한 남성의 착한 얼굴을 보며 도경은 잠시 홀린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다 이내 ‘이건 꿈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과 함께 손을 뻗어 남성의 한쪽 뺨을 감싸 쥐는 도경이었다. 도경의 손길에 흠칫한 남자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내뺐다. 귀한 미술품을 다루듯 남성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도경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매끄러운 피부가 꿈이라기엔 너무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놀고들 있네! 야 이 미친년놈들아!”

바로 이때 남자의 미모에 홀려 잠시 잊고 있었던 여자의 날카로운 음성이 다시 한번 도경의 귓전을 때렸다.

찢어지는 고음과 살벌한 욕지거리에, 곧 도경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곤 ‘꺄!’ 소리를 지른 뒤 이불을 한껏 끌어와 자신의 몸을 감쌌다. 덕분에 도경에게 모든 이불을 다 빼앗긴 남성의 몸이 드러났다.

드로즈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남성의 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해 보였다. 이 와중에 만약 미켈란젤로가 남성의 어깨와 아름답게 자리한 복근의 모양새를 보았다면 다비드 상을 다시 조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도경이었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나 몰래 딴 년 만나고 다닌 거냐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야, 오해라고! 나 진짜 처음 보는 사람이야!”

“미친 새끼. 넌 처음 본 여자랑 헐벗고 한 침대 누워있냐?”

“진짜야. 어제 하루 종일 작업하다 뻗었어! 그러고선 눈 떠보니 이 여자가 옆에 있는 거야! 시아야, 진짜야 믿어줘. 야, 지금 나도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아~ 작업 중이라더니 그 작업을 어디 클럽 가서 했나 봐?”

“와 나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니라고! 좀 믿어 달라고!”

“너라면 지금 이 꼴을 보고도 믿겠냐?”

여자는 잔뜩 화가 난 채 소 새끼 말 새끼를 찾아가며 남자에게 욕을 퍼부었고, 남자는 쩔쩔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경은 슬쩍 이불을 들쳐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차라리 아예 헐벗고 있었으면 술김에 남자와 하룻밤 실수를 했다고 짐작이라도 할 텐데, 도경은 애매하게 얇은 슬립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이건 뭘 입은 것도 아니고 안 입은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간밤에 남자와 있었던 일을 유추해내는 건 불가능이었다.

“야! 진짜, 내가 너한테 그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아니라잖아!”

“네가 뭔데 화를 내!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네가 화를 내!”

“너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하는 거 아니냐?”

“팥으로 메주를 어떻게 쒀, 병신아.”

“뭐? 너 지금 말 다 했어?”

“어, 다했어! 나 이제 너랑 할 말 없어! 우리 헤어져!”

“너 정말 후회 안 하지?”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머리를 쥐어짜 봐도 떠오르는 거라곤 그저 잔뜩 술에 취한 채 주 편집장에게 마귀할멈이라는 악담과 함께 오바이트를 시원하게 쏟아낸 장면뿐이었다.

도경이 마지막 기억을 붙든 채 씨름하고 있는 사이 기어이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오고 만 두 남녀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너 같은 더러운 놈이랑은 끝이야! 너 저번에 내가 사준 시계 내놔!”

“야! 그깟 시계 어차피 차지도 않았어! 너도 내가 사준 에르메스 백 뱉어라!”

“야 그깟 것 굳이 네가 안 사줘도 쇼 몇 번만 서면 박스로 얻어오거든?”

급기야 남녀는 서로 자신이 선물한 물건을 내놓으라며 치사함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도경은 당장이라도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 연인이 싸우는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이었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낯부끄러운 몸뚱이를 이불로 꽁꽁 싸매곤 유치한 이별 싸움을 관전하는 꼴이 되어버린 도경이었다.

“내가 사준 그 운동화! 그거 내놔!”

“가져가! 다 가져가! 너도 내가 준 책 내놔!”

“미친, 뭣도 아닌 거 줘 놓고선 더럽게 생색내네! 가져가!”

“뭐라고? 뭣도 아닌 거? 미쳤냐?”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에 잠시 움찔한 여자는.

“왜! 뭐?”

라며 응수했고 이내 남자는.

“그럼 뭐라도 되는 거 내놔. 내가 너 가슴 수술 시켜준 돈 그거 다시 뱉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치졸하고 낯부끄러운 말을 뱉어냈다. 남자의 말에 3초간의 짧은 정적 후 곧 여자는.

“죽어!!!”

또다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방 안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어 남자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치한 이별 싸움은 곧 육탄전으로 번졌다. 여자가 던지는 물건은 족족 남자의 얼굴과 몸을 가격했다. 꽤 훌륭한 타율에 도경은 순간 여자가 운동선수는 아닐까? 의심해봤다.

한참 동안 날아오는 물건과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남자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어지던 그때, 여자가 손에 집히는 대로 던진 텀블러가 정확히 남자의 안면 중앙부를 강타했다. 텀블러는 딱 보기에도 용량이 크고 두꺼운 것이 아주 튼튼해 보였다. 텀블러가 남자의 얼굴에서 스르륵 떨어지자 그의 코에선 한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 나왔다.

남자의 얼굴에서 피를 보았음에도 여자는 몇 개의 물건을 더 집어 던진 뒤 마지막으로 남자의 뺨을 세차게 때리고는.

“다신 보지 말자. 너 길가다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라는 말을 남기곤 그곳을 떠났다.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친 뒤 남자는 여자가 나간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한 손으로 코피를 슥 닦아냈다. 그러다 곧 잊고 있었던 이 사건의 원흉이자 최대 미스테리인 도경을 떠올렸다. 뒤를 돈 남자는 도경에게 다가왔고, 도경은 자신의 몸을 여민 이불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붙잡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여도경인데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대뜸 통성명을 해대는 도경을 골치 아프다는 듯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는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Hi, Stranger.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

#1.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

“이햐,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캬~”

도경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파출소란 곳을 오게 되었다. 그것도 가해자 신분으로.

남자는 곧바로 자신의 집에 무단 침입한 도경을 신고했고, 둘은 파출소에 나란히 앉아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껏 험상궂은 경찰이 취조를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파출소의 분위기는 꽤 푸근했다. 동네 이장님같이 인심 좋아 보이는 소장과 이제 막 대학생 티를 벗은 순경 그리고 도경의 오빠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순경까지 삼삼오오 모여 도경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이때, 덩치가 커다란 순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 확인해봤어?”

소장은 마치 동네 이장이 ‘어이, 김씨. 밭일은 다 끝냈는가?’라고 묻는 톤으로 질문을 했고, 이에 그 순경은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쳤다.

“이야! 맞아요. 맞아! 저 아가씨랑 저 남자랑 비밀번호가 똑같더라고요. 가서 두 집 비밀번호 다 눌러보고 문 열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

이렇게 파출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이유는 바로 도경과 이 남자의 사연 때문이었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진 건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도경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던, 주 편집장을 부여잡고 오바이트를 했던 마지막 기억을 붙든 채 집요하게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비틀거리며 제 집에 들어가 번데기가 탈피하듯 홀홀 옷을 벗어 놓은 뒤 침대에 들어가 잠든 기억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자신의 집이 아닌 이 남자 집에서 깨어난 건지 궁금해 죽겠는 건 남자뿐만 아니라 도경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술에 취하긴 했어도 저희 집에 얌전히 잘 들어갔거든요?”

“아니, 그런데 왜 아가씨가 이 분 집에서 깨어났냐고요.”

“그러니까요!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말! 너무 알고 싶어서 미쳐버리겠다고요!”

한참 동안 도경의 진술을 듣던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기댔던 허리를 세워 소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남자는 이마에 잔뜩 핏발을 세운 채 소장에게 말했다.

“저기요. 조사 똑바로 해주세요. 이 여자 꽃뱀이라고요!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지금 자기 기억 안 난다고 하는 거 봐요! 이러다 나중에 나한테 막 뒤집어씌울 거라고요.”

남자의 언행에 순간 기분이 팍 상해버린 도경은 한껏 남자를 노려보았다.

“진짜 듣자듣자 하니까. 저기요, 꽃뱀이라니요? 내가 꽃뱀 짓을 하려고 들었으면 그쪽같이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들러붙진 않았겠죠.”

“이거 봐! 봤죠? 봤죠? 아까는 순진한 얼굴로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러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아까 한 말은 취소할게요. 지금 다시 보니까 꽃뱀이 아니라 그냥 뱀이네 뱀!”

“뭐예요? 이봐요!”

아침 댓바람부터 진상을 상대하게 된 순경들은 잔뜩 피곤에 절은 얼굴로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싸우지 마시고요.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진짜 기억나는 거 없어요?”

“오해는 무슨 오해! 사기꾼에 강도라고요! 내가 오늘 저 여자 때문에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 알아요?”

“거 자꾸 소란 피우시면 의자에 묶어 놓을 겁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여자분 말부터 천천히 들어보자고요.”

소장의 으름장에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어후!’하는 추임새와 함께 한숨을 토해냈다.

“자 어제 회식했다고 하셨죠? 회식하고서부터 집에 어떻게 온 건지 순서대로 찬찬히 잘 기억을 되짚어봅시다.”

순경의 말에 도경은 회식을 했던 순간부터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주 편집장의 생일로, 모든 팀원들이 회식을 한 날이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주 편집장이었다. 주 편집장에게 모두 돌아가며 한 번씩 까여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까이는 것은 도경이었다. 오죽하면 팀 내에서 도경의 별명이 ‘주영화 샌드백’이었을까.

주 편집장의 히스테리를 노처녀 히스테리라 깎아내리며 욕이라도 실컷 할 수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하련만. 주 편집장의 외모는 40대 여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게다가 30대 여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여유와 완숙미까지 더해진 주 편집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아한 현대여성의 표본, 딱 그 자체였다. 때문에 결혼만 안 했다 뿐이지 항상 그녀의 연애는 상대를 바꿔가며 바삐 진행 중이었고, 그 누구도 그녀에게 ‘노처녀’라는 단어를 들이댈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객관적으로 뜯어봐도 주 편집장이 도경을 혼내는 이유는 항상 타당했다. 물론 똑같은 실수를 해도 다른 팀원들은 조용한 경고 정도로 끝났지만, 도경은 1시간 동안 벌을 서다시피 해야 한다는 건 달랐지만. 이런 형평성에서 불만은 조금 있었지만 어찌 됐든 주 편집장은 되도 않는 이유로 도경을 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실이 오히려 도경의 자존감에 더한 스크래치를 내곤했다.

어제도 도경은 출간 프로모션 아이디어가 구리다는 이유로 주 편집장에게 대차게 까였다. 그 때문에 회식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폭탄주를 연거푸 마시고 말았다.

잔뜩 취한 채 꿈뻑꿈뻑이던 도경의 눈에 마침 즐겁게 웃어대는 주 편집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그녀를 보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 도경은 주 편집장에게로 돌진했다.

“편집장님! 편집장님은 처음부터 잘 했슴니꽈~?”

“뭔 소리야? 얘, 취했으면 얼른 집에나 들어가.”

“편집장님 쥔쫘 그러시는 거 아뉩니돠! 저도! 저도 열쉼히 한다 이말입니돠!”

“내가 언제 너한테 열심히 하라고 하든? 잘하라고 했지.”

“에잇! 이 늙지도 않는 마귀할멈아!!”

이 말을 끝으로 도경은 주 편집장의 신발에 시원하게 오바이트를 쏟아냈고, 급하게 팀 사람들은 도경을 끌어내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그 뒤에 집을 갔는데…… 이게 너무 취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못 누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고…… 가다가 발이 너무 아파서 구두를 벗은 거 같은데…… 어머! 그런데 나 구두 어디 있지? 헐! 구두 잃어버렸다! 아씨 그거 비싼 건데!”

“진짜 진상이구나.”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경이 별안간 사라진 구두를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어대자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감상평을 내던졌고, 반 토막 난 짧은 말은 도경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진상이구나? 말이 짧다?”

“아까 조서 쓸 때 보니까 나랑 동갑이드만. 이미 서로 못 볼 꼴부터 튼 사이에 말 짧게 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나?”

“이게 진짜, 남은 한쪽 콧구멍에서 마저 코피 터뜨려 줄까?”

틈만 나면 싸워재끼는 통에 이젠 머리가 지끈지끈한 소장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 뒤 두 사람을 말렸다.

“거 자꾸 이렇게 싸우시면 조사고 나발이고 두 분 다 유치장에 넣을 겁니다!”

소장의 으름장에 다시금 조용해진 두 사람이었다. 이에 옅은 한숨을 내쉰 소장은 다시 한번 도경을 바라보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여튼 저는 그렇게 맨발로 13층까지 걸어올라 갔어요.”

“아니 3층도 아니고 13층을 걸어갔다고요? 제정신으로도 오르기 힘든 층수를 어떻게 올랐대…….”

“네발로 기어서 간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러고선 집 앞에 서서 정확하게 저희 집 비밀번호 0724 딱! 누르고 들어갔는데.”

“잠깐만, 뭐라고?”

“비번 누르고 우리 집 들어갔다고. 왜, 또 뭐가 의심스러운데?”

“비밀번호가 뭐라고? 다시 말해봐.”

“왜, 우리 집 문 따고 들어와서 복수하게? 꿈 깨. 비번 바꿀 거니까.”

“장난하지 말고. 비번 다시 말해봐.”

“0724다, 왜!”

이것이 바로 몇 시간 전 드러난 사건의 전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두 사람의 비밀번호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똑같은 숫자였다. 더욱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 아래윗집으로 사는 이웃사촌 관계였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남자는 1201호 도경은 1301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