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깊이 들이쉰 호흡을 탁 내려놓으며 번뜩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무늬 하나 없는 하얀 벽지였다. 이나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긴장한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요 속 적막.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와 미세하게 풍기는 약품 냄새가 느껴졌다.

‘여긴….’

힘없이 늘어진 가는 팔목에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하복부에서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난잡한 관들. 손가락에 꽂힌 플라스틱 집게. 손등에 박힌 작은 칩까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새하얀 이불을 들어 올린 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자마자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여지없이 몸이 휘청거렸다. 이나는 침대 난간을 손으로 잡아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러자 팽팽히 당겨진 몸의 관들이 일순 우수수 뽑혀 나갔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환자감시장치가 요란하게 울렸다.

띠---

이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내 심장이 멈춘 건가?’

아, 이런. 아니다. 단지 몸에 부착돼 있던 기계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었다. 이어진 작은 몸짓에 밑이 빠지는 통증과 함께 관이 스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자 실뱀 같은 얄따란 관에서 노란 물결이 퍼졌다. 약품 섞인 지린내가 풍기며 미간이 좁혀졌다. 이나는 가만 그것을 지켜봤다.

‘아무렴. 걸을 순 있으려나…? 말은 왜 안 나오는 거지…? 참, 말해도 들을 사람이 없지….’

홀로 단념하고 있을 때 이나는 밖이 어수선해짐을 느꼈다.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어색하게 떨어지는 발걸음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다리가, 제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드르륵 열린 문으로 그가 들어왔다. 그리고 문틈 새로 난잡한 소리가 뭉개져 들어왔다.

“이나야…!”

‘오빠…?’

쨍그랑! 유약한 것이 어딘가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상앗빛 대리석 바닥에 붉은 액체가 뭉근히 퍼져나갔다.

***

늦은 밤, 이나는 유명 너튜버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여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풀장을 둘러봤다. 건물에서 풀장으로 이어지는 알알이 맺힌 조명과 풀장의 푸른빛이 켜지며 화려한 파티의 서막이 올랐다.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풀장 안에 사람들이 풍덩 빠졌다. 그들은 플라밍고 튜브를 타거나 물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즐겼다. 풀장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샴페인 잔을 들고 관능적 음악에 몸을 맡겼다.

‘제대로 촬영 각인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쓱, 훑어본 이나는 수영장이 잘 보이는 곳에 촬영기기를 세팅했다. 다들 노는 분위기에서 홀로 일을 한다는 게 민망할 법도 한데 나름 이 판에서 경력을 쌓은 이나는 철판을 깔았다.

카메라가 켜짐과 동시에 뇌쇄적인 눈빛을 장착한 이나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주제는 워터프루프 메이크업! 자, 시작이다. 활기차게!

“안녕하세요, 여러분! Vlog.새롬님의 홈파티에 온 이너뷰티tv 이나입니다. 와! 파티는 역시 나이트 파티죠! 수영장에서 헐렁한 비키니는 벗겨져도 저와 함께 한 메이크업만큼은 절대 벗겨지지 않습니다! 함께 가보실까요?”

유혹의 손가락을 놀린 이나는 메이크업 브러쉬를 한 바퀴 돌리며 카메라에 윙크를 날렸다. 그렇게 시작된 영상 촬영은 장장 2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능숙하게 촬영 장비와 메이크업 도구들을 정리한 이나가 그걸 챙겨 들었다. 긴 촬영과 무거운 장비에 어깨는 축 처졌지만, 완벽에 가까운 촬영 완성도에 이나의 마음은 흡족함으로 가득 찼다. 기분 좋게 짐을 들고 일어설 때였다.

“이나야.”

“…?”

저를 부르는 애처로운 음성에 이나가 뒤를 돌아봤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옷을 걸치지 않은 그의 몸이 먼저 보였다. 단단하고 보기 좋았다. 이나는 고개를 좀 더 들었고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져 보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주 잠시 스친 시선에 이 모든 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이곳에 이나가 아는 사람은 친구인 새롬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사람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아픈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걸까. 사람을 잘못 본 게 분명했다.

마음 놓고 다시 돌아선 순간, 이나의 등 뒤로 다가온 그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놀란 이나는 들고 있던 짐을 떨어뜨렸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일까. 많은 사람 틈에서도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묘한 기시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언젠가 만났던 사람인데 제가 잊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 없는데….

비키니에 시스루 소재의 커버업 비치웨어만 걸친 이나와 쇼트 사각 수영복 하나 입은 그의 맨살이 맞붙었다. 그의 팔이 닿은 가슴 언저리가 델 듯이 뜨겁게 달았다. 당황한 이나가 멈춰 선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누, 누구세요!”

슬픔에 젖은 그의 눈매가 착 가라앉았다.

“…이나야.”

잠시 닿았다 떨어진 그에게서 바다향이 풍겼다. 너무나 낯익은 향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는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심장이 아프게 뛰어도 결론은 그랬다.

“혹시 너튜브에서 봤다고 이러시는 건 아니죠?”

이나가 예상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렇게 안일하게 넘기기에는 어딘가 껄끄러웠다.

‘남자가 메이크업 채널을 봤을까?’

입가에 아린 미소를 올린 그가 다시 다가와서 저를 껴안았다.

“사랑해. 미안해. 서이나. 나 너무 미워하지 마. 사랑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 사랑….”

그의 뜬금없는 사랑 타령에 혼란스러움만 가중됐다. 그럼에도 그를 다시 밀어낼 수는 없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 맞는데 그의 절절한 고백에 이나는 그를 밀어낼 힘을 잃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든 이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천천히 다가와 입술을 포갰다.

‘밀쳐야 하는데, 밀어내야 하는데.’

커다란 손으로 이나의 목을 감싼 그가 입을 맞춘 채로 부드럽게 감아 들어왔다. 가지런히 모은 이나의 손이 그의 가슴팍에 닿아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가 목을 감쌌던 손으로 등줄기를 훑어내려 이나의 허리를 감쌌다. 이어 살짝 밀쳐 벽에 기대게 했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와는 다른 차갑고 거친 벽이 등에 닿았다.

“흣…!”

눈을 또렷이 뜬 이나가 그의 얼굴을 봤다. 슬며시 들어 올린 그의 눈꺼풀 사이로 심해와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순간 이나는 발이 닿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제게 지금이라도 빠져나갈지,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갈지 선택을 종용했다. 나갈 필요 있을까. 가라앉는다면 더 깊이 들어가면 그만이다.

팔을 든 이나가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뭘까. 잠시 멈칫한 그도 작은 틈 하나 없이 저와 밀착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입가에 진득한 숨결이 맴돌았다. 떨어지기 아쉬운 듯 이마를 맞댄 둘은 서로 부족한 숨을 나눠 쉬었다.

“허….”

“하아….”

이나의 손가락에 깍지를 낀 그가 그녀를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박자를 잃은 이나의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중간 과정이 편집된 영상처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이나와 그는 침실에 들어와 왔다.

아슬아슬하게 어깨와 팔위에 걸쳐 있던 비치웨어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침대 위에 이나를 쓰러뜨렸다. 이어 남자는 제 위에 올랐고 그의 고통 어린 눈빛과 이나의 눈빛이 서로 맞닿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린 그가 이나를 보호하듯 감싼 작은 천 조각을 물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에 머리를 묻은 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돼?”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고개를 든 그와 이나 사이에 떨리는 눈빛이 오갔다. 망설임에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응.”

밤 11시면 자동으로 켜지게 설정해 놓은 라디오 어플에서 소리가 들렸다. ‘…벌써 2020년 1분기가 지나가네요. 올해 태어난 아이들이 20년생… 감우찬 씨는 새해 계획했던 일들은….’

#1

생에 다신 없을 것 같은 뜨거운 밤이 지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최근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게 문제였을까? 눈 떠보니 이게 웬일? 소설 속 잘생긴 내 남자 후보 1번 매튜 애드거가 눈앞에 있는 게 아닌가. 실화냐?

한창 웹소설에 입문하여 읽다가 똑같은 클리셰에 지겨워질 때쯤 조회 수 폭망한 소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왕공후백 입맛대로 골라 먹어.’ 골라 먹으라니 뭘 골라 먹으라는 건지 몰랐다. 이게 제목이냐, 작가야?

나는 독자들에게 외면받은 작가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래서 나라도 봐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작가가 연중을 때리고 도망갔다. 불쌍해서 조회 수 1이라도 클릭해주고 별점 10점 박아줬으면 고마운 줄 알고 똥 같은 결말이라도 내줘야 할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배신 때리면 안 되는 거잖아? 괘씸하던 차였는데 그딴 소설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다만 마음 놓을 수 있는 건 내가 만날 그들이 인물 하난 좋다는 거였다. 평범하고 흔한 묘사였지만, 그 묘사대로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멋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뛰어들고 싶은 호수 같은 눈동자, 종일 맞대고 싶은 입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피부. 뭐 이 정도랄까? 그러니 잘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유일하게 이 소설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게 이거 하나였다.

하하. 굳이 좋은 걸 하나만 더 꼽아보자면 얼빵한 데다가 무매력인 나를 남주와 서브남 모두가 사랑하게 된다는 거였다. 근데 뭐, 좋은 점만 있을 순 없지. 이 소설은 망할 수밖에 없는 아주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다.

주인공이 초반에 남자다. 하. 그럼 나도 남자라는 거잖아. 내 항마력이 이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읽는 거랑 직접 경험하는 건 다르잖아?

“매튜… 애드거.”

“왜?”

그가 날 내려다본다. 묘사가 자동으로 귓가에 들렸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햇빛에 반사된 연못 색의 눈동자. 높고 곧은 콧대는 말할 것도 없지. 살짝 찡그릴 때 예쁨 미 터지는 얼굴에 뽀뽀하고 싶은 입술까지. 심쿵했다. 갑자기 숨이 탁 트이면서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왜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얘는 생긴 건 잘생겼는데 너무 다정하기만 해서 밍밍한 맛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니, 그냥.”

얼굴 붉히지 말자. 그럼 이상해지잖아. 이런 놈이 날 사랑하게 된다니. 미리 행복해도 되나? 뒷짐 진 난 매튜의 잘난 얼굴을 올려다봤다.

“우리 어디 가는 중이었지?”

“어디긴 어디야. 훈련장 가는 중이지.”

읽긴 읽었는데 대충 읽어서 그런지 어떤 내용인지 좀체 기억이 안 났다. 작가도 대충 쓴 소설을 내가 열심히 읽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슥슥 스크롤을 올리면서 대화 정도만 읽고 넘겼다. 그러니 쓰는 작가도 그랬겠지만, 나도 남는 건 없었다.

매튜가 씩 웃으면서 내 어깨 위에 팔을 얹었다.

“가자. 훈련장에서 몸 좀 비비자.”

이런 식이다. 소설 ‘-골라 먹어’에서 매튜와 나의 사랑은 어이없게 시작한다. 사랑이라고 하긴 그렇고. 매튜의 표현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때만큼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거 있잖아. 둘이서 땀 흘리면서 두근대다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거 말이다.

깨끗한 매트 깔린 바닥 위에 제복을 입은 그와 내가 섰다. 제복 코트를 벗은 그가 셔츠까지 풀어서 개어놓았다. 이에 질 수 없는 나도 셔츠를 벗었다. 그의 터질 듯 굴곡진 상체와 대비되는 매끈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가 내 몸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훈련 좀 더 해야겠어. 너무 비실비실하잖아.”

그래, 너에 비해서는 그렇겠지.

그와 대치한 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됐고. 덤벼!”

나란 사람은 발목 나가기 전까지는 각종 무술을 섭렵했던 무술인이란 말이다! 해보자! 가즈아! 나는 내게 달려오는 그에게 달려들어 허리춤을 붙잡고는 몇 번을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메치기 시도였다. 어디까지나 시도였다.

소설 속 주인공 똥 버프를 받아서 그런가? 내 부실한 몸짓으로는 그의 털끝 하나도 움직이게 하기 어려웠다. 이런.

“엠므. 뭐해?”

재미있는 것을 바라보는 듯 흥미롭게 날 쳐다보던 그가 낑낑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무참히 매트 위로 내던졌다.

이게 내가 하려던 거였다고.

“으악!”

매트가 깔려 있었음에도 피부가 쓸리는 바람에 등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내가 누운 채로 꿈틀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난 나는 그의 급소를 치는 척했다. 그러자 당황한 그가 손과 다리를 모으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때를 놓칠 수 없는 나는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바짝 붙어서 발을 걸었다…? 어라…?

“하. 이런 식으로 하기 있다고?”

내 의도를 간파한 그가 곧바로 자세를 고쳐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는 양다리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내 어깨와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서 가뿐히 들어 올린 뒤 매몰차게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내 위에 올라탄 그가 온몸으로 날 눌렀다. 질끈 눈을 감은 나는 그에게 애원하며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숨! 숨 막힌다고!”

“그러니까 이런 치사한 짓을 왜 해?”

“미안! 미안하다고 하잖아! 놔 줘!”

맨몸, 맨살. 이래서 안 된다. 그와 맞닿은 땀에 젖은 살결 때문에 불쾌하면서도 심장이 쿵쿵 울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다. 엎드려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와 그를 올려다보는 내 시선이 마주쳤다. 이런 전개는 안 될 말이다. 내 마음의 1호는 따로 있단 말이야!

“항복! 치사한 짓 안 할게!”

몸을 짓누르는 압박이 느슨해진 틈을 타 일어나려는데 매튜가 꿈쩍하지를 않았다. 게다가 이놈이 내 팔을 위로 들어 올려 고정하는 게 아닌가. 묘하게 힘이 들어간 게 강압적이었다. 의아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소설 속 그는 공작인 제 작위답게 잘 다려진 제복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애써 숨겨왔던 엠므를 향한 제 마음을 눈치채고 나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없었다. 무매력에 병약하기까지 한 엠므가 다칠까, 오매불망 그것만을 신경 썼다. 그는 무엇이든 엠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람이었다. 싫다고 하면 안 하고 좋다고 하면 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태도가 엠므의 밍밍한 성격과 합이 잘 맞았기에 이런 성향이 드러나지 않았던 걸까? 내 성격이 바뀐 게 그의 태도에도 어떤 변화를 일으킨 건지도 몰랐다. 내 위에 올라탄 그가 나를 결박하고 입을 맞추려 했다. 왜 하필 이런 상황에 떨어진 거냐고!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다고!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살짝 맛만 볼 테니까.”

‘대사가 왜 이래? 너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뭐 잘못 먹은 거야?’

버둥대는 나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 안 돼!”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결박한 그가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려서 입을 맞췄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내 얼굴은 찌부러진 빨간 붕어가 되어있었다. 그런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체크 메이트.”

“뭐?”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가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는 듯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봤다. 느른하게 눈을 내리뜬 그가 내게 말했다.

“왜 모르는 척해?”

“뭘 모르는 척한다는 거야?”

“우리 사이 말이야.”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나는 딱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양손을 올린 나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얼마나 주면 돼?”

“뭘?”

“시간 말이야.”

‘얘가 원래 이렇게 저돌적이었나?’

의문을 잔뜩 담아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 날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가 위험해 보였다. 그의 시선을 피한 나는 용기 있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