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2019년 여름. 대한민국 서울시 강남구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빌딩의 12층. 오후 1시. 그곳에 위치한 요가 학원에서는 점심시간을 아껴 잠시나마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이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과는 다르게 끝나는 시간엔 신나는 댄스곡이 복도에 울렸다. 층 전체에 우렁차게 퍼지는 음악이 귀에 거슬린 지희는 눈앞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인상을 깊게 찌푸렸다.

그녀는 요가 학원 옆에 위치한 그 학원보다는 세 배 이상은 더 큰 규모의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눈치를 보는지,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오른쪽 끝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에도 그녀는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하나, 둘 씩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평온하게 일을 시작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는 키보드에 손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휴….”

‘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 모르게 너무 크게 쉬어 버린 나머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박 대리는 일도 못 하면서 한숨만 크게 푹푹 쉬어 대잖아. 자기만 힘든 줄 아나.’

그녀는 얼마 전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차장님이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그 이후로 절대 사무실에서는 한숨을 크게 쉬지 말자고 다짐한 그녀였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하려 했다.

뚜두둑-.

그때 그녀의 뒤로 난 큰 창에 물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오늘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언제 비가와도 이상할 게 없는 한국의 여름 날씨지만 요즘 일기예보가 틀린 적은 별로 없었다. 분명 곧장 일을 시작하려 한 그녀였는데, 떨어지는 빗소리에 이미 회전의자를 몸 반대편까지 돌려 앉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하늘에서 건물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갔다.

‘나도 떨어지고 싶다.’

“지희 씨.”

“…….”

떨어지는 빗방울을 전부 다 세기라도 하려는 건지, 지희는 뚫어지게 비가 오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아무도 없는 공간에 온 것 같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진공상태 같은 곳에 들어온 느낌이 들어버렸다. 그녀는 얼마나 시간이 지난 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행동 자체에 푹 빠져있었다.

“지희 씨…!”

“네, 차장님.”

그녀의 이름이 귀에 꽂히자 반사적으로 바로 반응을 한 그녀는 박 대리에게 차장이라는 호칭을 쓰고 말았다.

“지희 씨, 정신 차려요. 저 차장님 아니에요.”

“네, 죄송합니다.”

지희는 의자를 돌려 앞을 바라보고 앉았다.

“여기 서류들에 날짜 기입하고, 서명해서 결재 올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희는 박 대리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지나 잘할 것이지….’

학벌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쳐주지도 않는 대학교를 나와 오래 회사를 다녔다는 이유 만으로 대리를 단 사람이었다. 지희는 늘 그녀에게 면박을 주는 박 대리가 못마땅했다. 지희뿐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가 그 직급에 올라간 것은 연차 때문이지, 모두가 일을 못 한다고 욕을 하고 있었다. 지희는 남들이 다 하는 박 대리의 뒷담화에 끼지 않았지만, 속으로 왜 그녀가 만인에게 미움을 받는지 잘 느끼고 있었다.

박 대리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희는 다시 서류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다른 생각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럴 때마다 그녀의 집중력이 문제인지, 아니면 사사건건 주변의 것들에 신경을 쓰는 예민함이 문제인지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이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떨어지고 싶다… 떨어지고 싶다.’

그녀는 계속 빗소리가 거슬렸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저 빗소리에 맞춰 계속 떨어지고 싶다고만 되뇌었다.

***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부모님은 웃는 얼굴로 지희를 맞이했다.

“오늘도 수고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버지의 말투도 비꼬듯이 들렸다. 이미 조직 생활, 회사, 일 모든 것이 싫을 대로 싫어 진 그녀의 속마음은 베베 꼬일 대로 꼬여버린 것이었다.

‘나름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왔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오는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요즘 회사 생활은 잘하고 있니?”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보탰다.

“이렇게 살 바에는 뛰어 내리는 게 낫겠어요.”

무의식중에 그녀의 진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부모님 앞에서. 스스로도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인 채 눈은 위로 치켜뜨며 그녀의 부모를 올려봤다. 어머니는 입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고 아버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희야….”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희의 표정은 굳어졌다. 이마 아래로는 빠르게 그늘이 졌다. 아차 싶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그녀는 부모님께 사과를 얼버무리고는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Part1. 인연이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있다.

차장은 가만히 앉아 바닥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던 지희를 불렀다.

“지희 씨. 잠깐 회의실에서 봐요.”

그녀의 말투에는 가시가 배어 있었다. 회의실에서 단둘이 만난다는 건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 사실 지희에겐 그 전달사항이 뭐든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희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차장은 팔짱을 끼고 책상에 올려둔 서류를 향해 턱을 내밀었다.

“지희 씨. 여기 이 서류들 봐 봐요.”

“네.”

지희는 하라는 대로 서류를 집어 눈으로 빠르게 글자를 훑었다.

“어때요?”

“뭐가요?”

“음… 지희 씨.”

“서류에 날짜랑, 아래 사건 번호 봐 봐요.”

차장이 오류를 콕 짚어 내자 지희 눈에는 잘못 짝지어진 날짜, 사건 번호가 눈에 띄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차장은 혀를 한번 차더니 다시 한 번 지희의 이름을 불렀다.

“지희 씨. 회사에서 권고가 내려왔어요. 요즘 실수도 잦고 근무 태만이라고 해야 하나… 자주 성실히 업무에 임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고, 이사님, 그리고 대표 변호사님께서 내리신 결정이에요. 앞으로 두 번 더 권고를 받으면 권고사직….”

차장의 말을 듣고 있는 지희는 괴로움이 온몸에 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사직서 쓰겠습니다.”

“아니… 지희 씨-. 오늘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더 잘하라고….”

차장은 눈썹을 아래로 찌푸린 채로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멋쩍은지 입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갑자기 아기를 달래는 것 같이 변했다.

“언제까지 출근하면 되죠?”

지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일그러지는 차장의 얼굴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