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제발 그녀만 살려줘

아침에 호수 쪽으로 산책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결국은 물 건너갔다.

도심과는 달리 창밖에서 들리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그녀는 여전히 루카스의 품 안에 갇힌 채로 눈을 떴다. 그녀가 쓸 방을 따로 줬음에도 부득불 루카스가 같이 쓰겠다고 우긴 탓에 그의 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런던의 집과는 다소 상반된 인테리어는 올리비아의 취향이라고 전해 들었다. 연한 그레이와 베이지의 색상을 잘 매치시킨 그의 방은 런던과는 달리 테라스까지 딸려있어서 심플 하다기보다는 좀 더 따스한 느낌이 더 강해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방이다.

고풍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저택의 여주인이 바뀔 때마다 변화되어왔다고 한다. 최근 내부 공사를 다시 해 현대적인 감각과 자재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렇지만 본래의 틀과 분위기는 유지한 채, 너무 낡아 못 쓰게 된 부분만 교체해서인지 18세기와 21세기가 같이 공존하며 어우러진 느낌이 그녀의 감탄을 자아냈다. 올리비아의 세련된 감각과 우아한 감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밤새 도통 그녀를 놔주지 않는 그의 덕에 아직도 화산이 폭발해 펄펄 끓는 용암이 넘친 것처럼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던 밤의 여파로 온몸에 기분 좋은 뻐근한 근육통이 몰려온다.

그도 정염을 활활 태워 다 쏟아 냈는지 깊게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꿈쩍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그의 품에서 몰래 빠져나오려고 그의 팔을 살짝 들어 올려 몸을 빼낸 것까지는 좋았다. 내심 안 들키고 빠져나온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딱 걸렸다.

⌜어딜.⌟

턱 하니 그녀의 어깨를 잡는 그의 손에 리유는 정말 식겁했다.

⌜엄마야, 우씨. 루크! 놀랐잖아요.⌟

그녀의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고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진심 욕 나올 뻔. 다행히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아 그녀 스스로 잘했다며 가슴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후후…, 안되지. 이리 와요.⌟

⌜앗! 루크. 산책……, 흡.⌟

단숨에 그녀의 위로 올라온 그의 몸이 그녀가 빠져나갈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로 그녀의 마지막 말을 삼켜버렸다. 그렇게 그에게 붙잡혀 호수로의 산책은 고사하고 아침 식사 시간도 놓쳐 버리고는 미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나 뭐라나.

* * *

라이언과 올리비아는 마침 승마를 하러 나간 터라 저택에는 미아만이 있었는데 피곤해 보이는 리유를 보고는 혀를 차며 루카스에게 한 마디 던졌다.

⌜쯧쯧…, 루크. 적당히 좀 하지? 리유 얼굴 좀 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거 안 보여? 세상에… 얼굴이 다 못쓰게 됐네.⌟

루카스는 핀잔을 주는 누이의 말에 반박을 못 하며 헛기침만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너무 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리유의 얼굴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미아의 말에 리유의 뺨이 발그레해진다.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프렌치 토스트를 잘라 입에 넣었다.

⌜리유, 오늘 저녁 파티에 버티고 있으려면 이따 오후에 낮잠 좀 자둬요.⌟

⌜헤헤, 네. 그럴게요.⌟

리유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세심하게 챙겨주는 미아가 고마울 따름이다. 루카스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리유…, 미안합니다. 그대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루크…? 괜찮아요. 오후에 좀 쉬면 돼요. 나 튼튼해요. 봐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만을 응시하며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그에게 오른팔을 들어 올려 팔에 힘을 주며 그 팔의 근육을 보라고 힘주어 팔을 탁탁 쳤다.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루카스와 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 색과 눈의 색이 달라 아예 닮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을 놓고 보니 역시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꽤나 닮아 보이는 천상 남매였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리라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리유는 그렇게 바라던 호수로 산책을 갈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뻤다.

따스한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그와 손을 잡고 걷는 지금 그녀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가슴이 행복한 충만감으로 가득 찼다.

연둣빛의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 오래된 거목들 사이의 오솔길은 그녀가 늘 상상하며 보던 책 속의 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합창하는 소리, 나무들 사이로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햇살과 갑자기 튀어나와 놀라게 한 귀여운 다람쥐, 지난겨울이 시작될 즈음 떨어진 채로 그대로 길에 쌓인 낙엽을 밟아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그녀가 재잘대는 데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열심히 들어주는 루카스가 곁에 있어 더더욱 만족스러운 산책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의 증조부가 증조모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 선물했다는 그 호수다. 와, 선물 플렉스 보소. 대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의 말로 작다고는 해도 깊이가 거의 3m는 족히 된다 하고, 그 호수 둘레를 걸으면 빠른 걸음으로 30분은 넘게 걸린다고 하니 절대 작은 호수는 아니었다. 날이 좋으면 가끔 배를 띄워 뱃놀이도 하고 수영도 할 수 있을 만큼 수질 상태도 좋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지금은 인공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겨난 호수로 보일 만큼 자연스러운 느낌이 묻어 나온다.

호수로 오는 산책길에도 그렇고, 호수 주변에도 엔틱한 가로등이 군데군데 서 있어서 저녁에는 더 멋스럽고 분위기 있는 산책길이 된다고 그가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그렇다는 건 오늘 저녁에도 이리로 바람을 쐬러 오자 꼬시는 중이렸다?

리유는 그런 그가 마냥 귀여워 접수했다고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해맑은 그녀의 미소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에 반사되어 더 빛이 난다. 그녀의 반짝반짝하는 미소에 그도 같이 입꼬리가 승천 중이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햇살이 한 곳에 응집해 발화된 것처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이렇게 눈부시기 있기, 없기? 리유는 ‘윽’ 소리를 내고 엄살을 부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당신 때문에 내 눈이 멀 것 같다며 이러면 ‘옐로우 카드’라고 귀에다 대고 속살댔다.

루카스는 그녀의 말랑말랑한 몸이 그의 몸에 닿고, 그녀가 내쉬는 숨결이 귓속으로 들어오자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전류가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갑작스런 그녀의 접촉으로 어딘가 단단해진 몸과는 별개로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기가 태어난 다음 몸 좀 추스르고 나서 나중에 꼭 수영을 가르쳐 달라 루카스와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으며 약속하고는 내내 참고 있던 하품을 하였다.

올리비아의 생일 파티인 저녁 행사를 치르려면 미아의 말대로 그녀를 잠시라도 재워야지 싶어 그는 그녀를 이끌고 서둘러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오늘을 위해 루카스가 급 준비해준 한쪽 어깨가 드러나서 고혹적인 어깨선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허벅지에서부터 길게 슬릿이 들어간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반묶음 포니테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리유는 과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밝은 브라운 계열의 아이 새도우를 하고 피치 빛이 도는 핑크색 루즈로 포인트를 주었다.

금색의 뱅글 팔찌에 작은 골드 링 귀걸이를 한 그녀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녀의 어스름한 저녁 하늘 같은 눈동자와도 무척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튀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차림이 오히려 그녀의 단아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연 베이지 톤의 슈트에 화이트 셔츠, 잔잔한 스트라이프가 가미된 블루 그린의 보타이에 같은 계열의 행거치프를 매치한 루카스와 크림색의 드레스를 입은 리유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환상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리유는 루카스의 성장한 모습을 보고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아, 어레스트. 산소 공급이 절실히 필요해. 그의 존재 자체가 그냥 미쳤다. 님 사전에는 포토샵이란 단어 따윈 존재하지도 않을 듯.

막 옷을 갖춰 입고 나온 그는 그녀를 보고 허벅지에서부터 길게 슬릿 되어 그녀의 곧고 예쁜 다리가 다 보이는 드레스 차림에 그만 파티고 뭐고 어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저만 볼 수 있게 꼭꼭 숨겨두고 싶었다.

단아한 크림색 드레스 차림이 그녀를 더욱 엘레강스해 보이면서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그녀의 다리가 매우 관능적으로 느껴져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순간,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음을 삼켰다.

⌜오오…. 이런…, 리유. 당신 너무 매혹적인 거 아닙니까? 너무나도 아름다워 정신을 잃기 직전입니다.⌟

루카스는 리유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볼에 살짝 입 맞추었다.

⌜어머! 우리 벌써 일심동체? 인가 봐요. 나도 방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당신을 보니 숨이 턱. 산소가 부족했어요. 정신줄 놓을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네요. 헤헤.⌟

또다. 그녀의 미소에 그녀가 아니라 이번엔 그가 정신줄 놓을 뻔한 건.

⌜끄응…. 이대로 그대를 안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참아야겠죠? 후우…,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올 예정이니 지금 내려가서 손님을 맞이해야 할 겁니다.⌟

그는 아쉬운대로 리유를 꼭 안고 이마에 키스를 하고선 리유가 준비한 선물과 루카스가 준비한 선물을 그 집안의 고용인을 불러 거실에 가져다 놓으라 이르고, 리유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고 방을 나섰다.

⌜자, 가실까요? 레이디.⌟

⌜네, 물론이에요. 미스터.⌟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며 대답하는 그녀의 도도한 표정에 그만 풋 하는 웃음이 나는 건 비밀이다. 고개를 돌리고 겨우 웃음을 참고는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좋았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다.

거실에서는 이미 오신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다. 오늘은 올리비아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루카스가 결혼하게 될 리유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해서 그녀는 조금 긴장한 탓에 루카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루카스는 긴장하지 말라고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연한 하늘빛 블루와 짙푸른 코발트 블루가 그라데이션 된 하늘하늘한 하이넥 슬리브리스 드레스를 입고, 깔끔하게 틀어 올린 금발에 사파이어 블루의 머리꽂이만을 장식으로 한 오늘의 주인공인 올리비아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다분히 세련된 우아함이 극강의 비주얼을 보여주고 있었다.

라이언도 남색 슈트에 화이트 셔츠, 클래식 블루 계열의 보타이와 같은 행거치프를 매치해 역시나 올리비아와의 컬러 케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미아는 올 블랙의 탑 드레스로 머리는 한쪽으로 묶어 내리고 어지간해서는 소화하지 못하는 레드빛 루즈를 발라 도발적인 섹시함이 무언지 보여주는 쎈언니 느낌인데 이 시크함이 또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라이언의 공식적 작위는 코트니 후작이었고, 동생 부부인 베일리 백작 부부와 올리비아의 오빠인 보일 공작 부부, 루카스의 어릴 적 절친인 애런 하우드와 그의 부모님 랭포드 백작 부부, 그리고 스펜서가 부부와 딸을 차례대로 소개를 받으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내려가질 않는다.

누구 한 사람 리유에게 선입견을 갖고 대한다거나 동양인이라 하여 색안경을 끼고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어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집요한 눈길을 느낀 건 그 즈음이었다.

* * *

저녁 만찬은 케이크 커팅식을 시작으로 로얄살루트 21년을 베이스로 살구 시럽을 배합한 칵테일로 그녀의 54세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를 하였다. 로얄살루트 21년은 특유의 달큼한 배향과 가을꽃 향기의 풍부한 풍미가 아주 그만인 위스키였다.

먼저 나온 전채요리로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갓 구운 빵과 바닷가재 테린과 꽃게 비스큐 스프가 먼저 나왔다. 새우 껍질을 바짝 졸인 비스큐 소스는 비린 맛에 예민한 입덧으로 걱정을 했는데 웬걸 걱정은 기후에 지나지 않았다.

곧이어 나온 관자 파르파초는 유자가 섞인 허브 오일의 조합이 향긋한 조화를 이뤄 쫀득한 관자의 맛을 한층 더 신선하게 해주는 요리였다.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에 나온 연어 파피요트도 레몬의 상큼한 향이 배어나 자칫 날 수 있는 연어의 느끼한 맛을 잡아 주었다.

파티에 참석한 인원이 많다 보니 주로 두세 사람씩 대화를 나누는 게 보인다. 가끔 리유에게 루카스와 만나게 된 스토리를 물어보거나 워낙 루카스가 시니컬한 탓에 어려움은 없는지 애런이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루카스가 철벽을 치며 차단했지만.

드디어 나온 주요리인 레드와인과 레드페퍼로 마리네이드하고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적당히 구워져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서 녹았다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처음에 나온 로얄 살루트 칵테일이 딱 입맛에 맞았는데 입에 대고 맛만 보았을 뿐, 그대로 루카스의 입으로 직행하였다. 그다음에 나온 샴페인이나 레드와인 역시 맛도 보지 못한 채 그에게 빼앗긴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온 샴페인 셔벗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루카스에게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가며 사수를 하였다.

식사 내내 루카스가 안절부절하며 리유를 신경 쓰고 챙기는 모습을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그의 작은 숙부 내외는 타인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조카의 낯선 모습을 흥미를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자꾸만 그녀의 샴페인 잔이나 레드와인 잔을 제 쪽으로 갖다 놓는 예의에 어긋난 루카스의 행동이 너무 티 나게 눈에 띄어 집안의 가주인 라이언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시선은 자꾸만 그들에게로 향했다.

나오는 술잔마다 루카스에게 빼앗겨 언뜻 보기에도 매우 아쉽다는 눈초리로 바라만 보다가 샴페인 셔벗이 나오자 그것만은 빼앗지 말라고 루카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며 결국엔 그걸 한 입 맛본 그녀의 표정은 꼭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그러다 게 눈 감추듯 어느새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린 셔벗 잔은 뭐가 담겨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다.

도무지 루카스의 숙부 베일리 백작은 형님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건너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더 흥미롭고 재미났으므로. 그만 그런 줄 알았더니 부창부수라고 그의 아내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같은 대목에서 둘은 풉 하며 웃음이 나왔다.

라이언은 장난기 많고 관습에서 자유로운 동생이야 그렇다 쳐도 평소 말이 없고 표정이 거의 없는 동생의 처가 웃었다는 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관습이나 예의를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그녀가 그것도 식사 중에 갑자기? 그래서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곧 결혼할 아들의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셔벗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샴페인 셔벗을 집중 공략하는 리유와 그 모습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보고 있는 루카스가 보였다.

대충 감이 잡혔다. 보아하니 홑몸이 아닌 새아기가 샴페인이 섞인 셔벗을 먹는 걸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저 정도의 알코올은 미미해서 괜찮은데 아들이 유난을 떠는 모양이었다. 그에 라이언도 웃음이 나와 갑자기 터진 동생 내외의 웃음에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루카스의 모습이 아버지인 그에게도 무척이나 낯설었으니.

리유는 샴페인 셔벗이라도 루카스에게서 사수했다는 만족감에 젖어 맞은 편에서 그들을 보고 웃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눈 깜짝할 새 없어진 셔벗 잔을 아쉬운 눈으로 보고 있다.

루카스는 그런 리유의 모습이 못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녀의 무릎 위로 몰래 손을 슬쩍 얹었다. 그녀의 다리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런 루카스의 나쁜 손 같으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건너편 애런의 부친과 천연덕스럽게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황한 리유는 그의 손을 떼 내려 하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그가 살짝 얄밉다. 몇 번 그러다 포기하고만 그녀는 처음 손님들에게 인사할 때부터 느낀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다가 그의 가문과는 오래된 친분으로 부친들 끼리 친구인 스펜서 가의 딸이라는 영애와 시선이 부딪쳤다.

케이틀린이라고 했던가. 붉은 기가 강한 갈색 머리와 눈이 치켜 올라간 고양이상의 푸른 눈을 가진 케이틀린은 꽤 미인 축에 속했다. 그런데 왜 오늘 그녀와 처음 대면하는 데도 푸른 불꽃이 일 정도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적의를 드러내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무턱대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왠지 모를 섬��함에 리유는 이 익숙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곧 알아챘다.

학창 시절 여자애들에게 늘 인기가 많던 은호로 인해 많이 겪어 보았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질투와 악의로 가득한 눈빛.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은호와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하게 당했던 순간들을. 그나마 희수가 있어 같이 슬리퍼 짝도 날려주고 가방으로 어퍼컷을 날려주기도 해서 버텨낸 시간들이었고, 그러면서 희수와의 우정은 더 깊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