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가 들어선겨?

“뭐어? 왜 또 팔순 잔치야?”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 할머니가 팔순 잔치를 했어?”

“그럼, 지난번에 팔순 잔치 한 건 누구였어?”

“그건 첫째 이모할머니 팔순이었지.”

“엄마, 나 아직 해외 출장 중이라고 해!”

“얼씨구, 그러니까 제발 결혼을 해, 좀.”

늘 기승전 결혼이다.

지선은 엊그제 서른을 넘은 거 같은데 어느새 중반을 향해 달리자 괜히 주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가족 모임에는 가기가 싫다. 은근히 스트레스가 생기면서 우울증 모드까지 진입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외할머니 팔순 잔치라고 꼭 와야 한다는 엄마 잔소리에 스트레스 레벨이 확 더 올라간 건 사실이었다.

엘에이 다운 타운 자바시장으로 웨딩드레스를 주문하기 위해 해외 출장을 갔다가 웨딩드레스 박람회에 가는 길에 접촉사고가 나면서부터 요즘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판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직 출장 여독에다 잠깐 출장이었지만 그것도 시차라고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어쩜 볼 게 하나도 없네, 없어.’

지선은 리모트 컨트롤로 채널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재방송을 자주 해대는지 지겹도록 나오는 프로다.

‘나 원 참. 요즘 혼자 사는 게 뭐 대수라고.’

오래된 영화 중에 의자에 앉아서 긴 다리를 꼬던 샤론 스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미쳤다고 외치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다. 엄마하고 마주 앉아있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일까. 채널을 돌리려다 리모트 컨트롤을 든 채 멈추고 보고 있었다.

“결혼을 해야지.”

“또 결혼 얘기야.”

아니나 다를까다. 엄마는 말끝마다 결혼 타령이었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딸은 방송이라 그런지 웃음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머지않아 지선에게도 닥칠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딩동!

지선은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퉁겨 일어났다. 저녁 배달이다.

‘와우, 왔네, 왔어.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고맙습니다.”

배달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마자 포장에 작게 붙여진 쪽지가 눈에 띄었다.

[싫어도 받아.]

포장지에 쓰여있는 문구다.

‘캬, 이런 포장 문화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푸짐하게 배달된 월남쌈을 보면서 자꾸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엄마다.

‘우리 오 여사님은 타이밍 하나는 기막히게 맞추지.’

지선은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할머니 팔순 잔치야, 내려와.”

입맛이 싹 가셨다. 오늘 저녁 벌어진 일이었다.

***

지선은 외가댁이 있는 영월을 좋아한다. 도시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 오 분만 벗어나면 동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석구석 매번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동강을 벗어나 올라가면 지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 아직 외가댁이 있었다. 잠시 후, 곧 벌어질 충격은 상상도 못 한 채 동강의 아름다움과 이어진 마을의 경관에 빠져들며 마을로 들어섰다. 이미 온 마을이 잔치로 떠들썩하였다.

“완전 씨족국가야.”

한마을 전체가 거의 지선의 친척이 살고 있었다. 옆 마을 사람들까지 지선의 외할머니 팔순 잔치에 모여들었다.

“안녕하셨어요?”

지선은 몇 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선아, 이리 와서 인사드려야지!”

엄마가 외할머니와 자매인 세 분의 이모할머니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불렀다. 엄마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다. 목소리 하나만큼은 온 동네가 떠내려가고도 남았다.

‘아주 온 동네에 내가 왔다고 광고를 해.’

“할머니이생신 축하드려요.”

지선은 초등학교 때 서울로 학교를 옮기면서 점점 멀어졌지만, 외할머니를 어려서 무척 좋아했다. 줄줄이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절대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고향의 맛이 있었다. 스트레스 따위는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넙죽넙죽 막걸리까지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래, 시집은 언제 갈 거야?”

“아이, 이모님. 요즘 애들은 그렇게 결혼 일찍 안 해요.”

엄마가 지선에게 눈치를 주더니 나섰다.

“지선이 네가 지금 몇이냐?”

‘드디어 올 것이 왔네!’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애를 낳아도 몇은 낳았을 텐데….”

“어멈아, 최 영감네 막내 손주가 올해 몇이라구 그랬지?”

“지난겨울에 장가갔잖아요.”

“둘째가 결혼 실패해서 혼자라고 하지 않았나?”

“아이구, 둘째가 몇 살인데. 이모, 아무리 그래도 지선이를 재취 자리로 보내겠어요?”

“왜, 재취는 싫다는 거여?”

“쯧쯧 지선이 나이를 생각해야지.”

‘헐! 어쩜 순서도 틀리지 않는구나.’

지선은 도저히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하려고 입을 뗐다.

“저, 곧 꺾어진 팔순입니다.”

“뭐가 꺾어졌다는 거여?”

“혼인했다는 소리 아녀?”

바로 그때 귀가 어두운 첫째 이모할머니가 언제나 멋대로 듣고 말했다.

‘미치겠다.’

지선은 막걸리 기운이 돌아 볼이 발그레해져서 이모할머니들을 쫙 훑어봤다. 한결같이 이모할아버지를 먼저 여위시고 혼자 되셔서 함께 살고 계신 분들이었다.

“저 혼인했습니다. 맞아요, 맞아.”

“애가 들어선겨?”

“어쩐지 잘 먹더라. 애가 들어서면 잘 먹지.”

“산달이 언제여?”

지선은 해물파전을 먹으려고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

<여보오~ 일어나아~>

알람이다.

지선은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엎어졌다.

<여보오~>

‘아우, 짜증 나.’

지선은 벌떡 일어나 알람을 눌렀다. 지선이 가장 빨리 일어나기 위해 고른 알람이다. 그리고, 일어나서 정확하게 십 분 뒤, 차 운전석에 앉았을 때 어젯밤 외할머니 팔순 잔치에서 일어난 일이 퍼뜩 생각났다.

‘이제부터 난 유부녀여.’

어쩐지 묘하게 유부녀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지선은 신호등이 걸리자 늘 하던 대로 마스카라를 칠하려고 꺼내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엘에이 출장 중, 신호등에 걸려서 마스카라를 바르다가 생긴 접촉사고가 떠올라서다. 백 프로 상대편 잘못이었다. 신호 위반을 하면서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지선이 마스카라만 칠하지 않고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는 건 아쉬운 사실이었다.

‘이거 완전 트라우마 생기겠네. 마스카라는 당분간 포기.’

회사 바로 앞 사거리다. 하는 수 없이 당분간은 생 얼굴로 출근하게 생겼다. 신호가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신호에 지선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에서 빨리 출발하라고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알아, 일 분 일 초가 바쁜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지선은 출발할 수가 없었다. 비상등을 켰다.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

“윽, 어떡해!”

그대로 운전대에 고개를 박았다.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

‘여기가 어디야?’

지선은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주위를 돌아보다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회사 앞 사거리 신호 정지까지는 기억이 났다.

“저기요!”

다급하게 간호사를 불렀다. 무슨 큰 사고가 났는지 응급실 입구부터 들어오는 응급환자들로 난리였다. 피투성이 환자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사 현장 사고로 실려 온 환자들이었다.

“아니라니까! 이 환자 머리가 아니라니까!”

의사들은 비명을 지르는 응급환자에 붙어서 절절매고 있었다. 수간호사쯤 보이는 여자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옷은 피투성이였다. 지선은 일어나려고 보니 링거가 팔에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모두 응급환자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지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선은 링거 바늘을 조심스럽게 떼고 일어나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

“저, 제가 웬만하면 회사에 가 봐야 하거든요.”

“네? 아, 이름이 뭐예요?”

간호사는 지선을 쓰윽 쳐다보더니 바로 이름을 확인했다. 응급실에 있기에는 너무 멀쩡해 보였나 보다.

“한지선이에요.”

“잠깐만요.”

간호사는 침대를 확인하려고 기웃하더니 묘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이미 치료비는 보호자분이 결제하셨고, 바로 퇴원하시면 됩니다.”

“누가요? 보호자 누가 내 치료비를 내요?”

지선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지만, 순간 출근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인지 당장 확인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응급실을 빠져나와 택시 정류장으로 뛰어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어, 연희야!”

“너 어디야?”

“나?”

응급실이라고 말을 하려는데 연희가 말을 이었다.

“야, 한지선! 오늘 새로 부임한 대표님 첫 출근인데 늦으면 어떡해?”

“와아, 그렇지. 완전 까먹고 있었네. 금방 갈게.”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비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냐, 일단 나중에 생각해….’

우선은 출근이 더 급했다.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하이힐로 막자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였다.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엘리베이터 안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선은 인사를 하고 민망해서 바로 돌아섰다. 뛰어오느라 헉헉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묘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싸한 느낌이 들더니 남자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 팀장님, 좀 괜찮습니까?”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처음 보는 실루엣의 남자가 나를 알다니, 헉, 괜찮냐고 묻기까지 하네.’

지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 눈에도 대표님일 거 같은 실루엣의 동욱이 지선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지선은 인사부터 했다. 얼굴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엘리베이터 안이 너무 좁았다. 다시 등을 돌리고 섰다.

“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동욱은 지선이 먼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선은 내려서 복도를 걸어가면서 뒤에 동욱이 따라오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나보고 왜 괜찮냐고 물어본 걸까?’

지선은 아무래도 정확하게 물어보려고 몸을 돌렸다. 동욱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헛것을 본 거야?’

지선은 응급실에 갔던 일부터 모든 게 뒤숭숭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연희가 다행이라는 듯 반겼다.

“시간 맞춰서 들어왔네. 대표님도 방금 도착했대.”

연희는 지선이 털썩 자리에 앉자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살폈다.

“너 괜찮니?”

“안 괜찮아, 요즘 내가 귀신에 홀린 거 같아.”

그때였다. 사무실 입구가 어수선하더니 개떡 같았던 전임 민상욱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새로 부임한 대표가 들어섰다.

“자, 민동욱 대표님입니다.”

비서실장이 동욱과 함께 나타나며 설명했다. 지선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동욱이 대표일 거라는 예상을 어느 정도 하기는 했었다.

‘모른 척해야지. 나 참, 아는 척할 일은 뭐가 있었나.’

지선은 혼자 북치고, 장구 치다가 슬쩍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동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동욱은 깍듯하게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웨딩팀 직원들은 동욱의 훤칠한 외모에 잠시 놀라는 눈치였다. 동욱은 직원들과 짧고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비서실장과 함께 방을 나갔다.

“뭐야, 아무리 낙하산이라고 해도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연희는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 실장이 지선에게 다가왔다.

“한 팀장, 대표님이 잠깐 부르시는데?”

지선은 놀라서 효은을 쳐다봤다.

“왜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출근한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그새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닐 테고 가 봐야 알겠네.”

효은은 대표가 출근 첫날부터 실장인 자신을 부르지 않고 팀장을 부르는 일이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야, 아무려면 어때, 얼른 가봐. 잘생긴 얼굴 가까이서 보고 와서 말해 줘.”

연희는 옆에서 부러워하며 재촉했다. 지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욱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공연히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야?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표실 앞에 다다랐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김 실장님.”

지선은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동욱의 방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지선은 동욱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동욱은 등을 돌리고 돌아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느리게 돌려서 지선을 잠깐 바라보다 다가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