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좋아합니다. 한 팀장님을 제가

지선의 엄마는 무슨 일인지 전화를 계속 받지 않자 겸사겸사 영월시장에서 반찬을 좀 사 들고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지선이 어려서부터 즐겨 먹던 전이며 밑반찬들이었다. 몇십 년 전통을 이어오는 영월 재래시장은 훌륭한 제사음식을 만들어 전국으로 배달을 보내는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말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야무지지 못한 건지.’

물론 속마음은 지선이 있다는 ‘남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선의 아빠에게 연락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쩌다 졸혼이었다. 지선의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들과 노인끼리만 사는 게 늘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원인은 지선의 아버지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벌린 사업이 망하면서 집까지 팔아야 했다. 지선의 아버지가 머물 수 있는 스튜디오를 겨우 얻었다. 남편의 무능력은 평생을 걸쳐 식을 줄 모르며 드러나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도 함께 살기에는 벅찼다. 퇴직 전까지 영월로 전근신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별거가 시작되었다. 일단 지선의 엄마가 간을 먼저 봐야 했다. 자칫 사윗감을 만나 실수라도 해서 거의 하나뿐인 없는 딸의 혼삿길을 막을지 모르는 염려도 들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전화가 온 건 지선이 아니라 동창 경희였다.

“혜자야!”

“에구,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다.”

“그래, 요즘 톡이다 라인이다. 해외라도 연락들도 잘하고 사는데.”

“그게, 이상하게 물리적인 거리감이 있더라고.”

“알아. 나도 톡은 있어도 쉽지가 않네.”

“우리 딸이 이번에 한국에서 결혼하기로 해서 들어왔어.”

“아니, 외국에 있는 애들은 외국에서 알아서들 결혼해야지. 뭐하러 한국까지 와서 하냐!”

“어머, 지선이 아직 결혼 못 한 거야?”

경희는 깔깔 웃었다. 이해한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과년한 딸이 집에 있으면 은근히 부담되는 건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너, 네 딸 결혼한다고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그랬나?”

“날짜하고 장소나 보내줘. 꼭 가봐야지.”

“지선이는 말 오가는 신랑감은 없어?”

“나 지금 그 신랑감 만나러 서울 가는 중이야.”

지선의 엄마는 좀 너무했나,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그치, 지선이 정도면 요즘 말로 골드미스 아냐.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있지.”

“얘, 나 고속도로 타야 해, 꼭 연락해.”

지선의 엄마는 더 길게 얘기를 끌다가 곤란해질까 봐 서둘러 끊으려 했다.

“혜자야, 아직 식장을 못 잡았어. 지선이가 웨딩 플래너라고 그러지 않았어?”

지선의 엄마는 얼굴이 환해졌다.

***

스테이크 집을 찾다 보니 미술관 옆 식당가를 와야 했다. 동욱은 동물원에 또 오기로 약속하고 미술관을 가보기로 계획을 바꾸고 미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미나는 처음에 고집을 피우며 플라밍고를 못 봤다며 눈물까지 흘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어, 아빠.”

주나는 이미 동물원이 피곤했다.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갔다가 동욱은 계속 주나를 목에 얹고 다녀야 했을 게 뻔했다. 동욱은 미나를 옆에 앉혔고 지선의 옆에는 주나가 앉았다. 누가 감히 가족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완벽한 그림이다.

‘그냥 이대로 완벽하잖아.’

지선은 혹시나 동욱이 와이프하고 문제가 있어서 동욱과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까지 덤으로 오는 건가,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서 동욱을 쳐다봤다.

“왜요?”

“갑자기 엘에이에서 식당에 갔던 일이 생각나서요.”

지선은 둘러대며 공연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딘가 다른 분위기가 분명히 있지만, 한국의 최고급만 고집하는 뭔가는 분명히 있다.

“뭐 시킬까요?”

“미나, 주나는 뭐 먹을 거야?”

지선은 동욱의 질문에 대답도 안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동욱은 웃었다.

“간단해요, 스테이크 프렌치프라이, 맥 앤 치즈.”

“파스타요?”

주나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욱은 지선이 주나의 식성을 기억해주는 게 더없이 고마웠다. 아이들은 식당에서 나눠준 크레용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내가 도움이 된다면 그래, 좋겠어.’

지선은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다 동욱을 바라보았다. 동욱은 말은 하지 않아도 지선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어머, 온종일 핸드폰을 차에 두고 다녔나 봐요.”

“갖고 올까요?”

동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은 없고 회사에서 혹시 연락할 일이 있나, 오늘 예식이 좀 많아서요.”

“급하면 저한테 연락이 오지 않을까요?”

“실장님이 오늘 저 대신 출근해주기로 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지선은 한편으로 연락이 온다고 한들 갈 상황도 아니라 차라리 안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나오니 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머, 비가 오네요.”

“그냥 집으로 가야겠나 봐요.”

“네? 아이들한테 약속했잖아요, 동물원 안 가고 미술관 간다고 찰떡같이.”

지선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동욱을 나무라듯 쳐다보며 말했다.

“상황이라는 게 생겼으면 약속도 변경될 수 있지 않아요?”

“음, 그건 아닌데.”

지선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미술관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관람하기에 아직 어렸다. 결국, 아이스크림으로 합의를 보며 미술관 앞에서 아이들은 뛰어놀다가 집으로 오기 위해 차에 올랐다. 다행히 빗발이 잦아들었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지선은 아이들 무릎에 타월을 덮어주며 바라보다 바로 앉았다.

“아이들이 착해요, 저 나이 데리고 다니기 힘든 나일 텐데요.”

동욱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선은 동욱을 쳐다봤다.

“제가 하면 안 되는 말이었어요?”

“아닙니다. 그냥 미나가 나이보다 어려서부터 너무 착해서 우리는 그게 늘 걱정이었어요.”

지선은 울컥했다.

“한 팀장님, 괜찮다면 아이들 먼저 할머니 집에 내려주고 가도 될까요?”

‘어머, 나하고 둘이 있고 싶은 건가?’

지선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부남이고 뭐고 함께 있고 싶은 내가 미쳤나 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큼, 당연히 됩니다.”

*

“누구세요?”

지선의 엄마는 벨을 누르자 나온 남자를 보고 놀라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머릿속에 지선이 있다는 남자가 설마 이 남자인 걸까. 눈앞이 캄캄했다.

“그쪽은 누구신데요?”

“네? 여기 우리 딸네 집인데 제가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아, 그 딸 이사했어요. 지난번에도 어떤 남자가 오더니.”

“죄송합니다.”

지선의 엄마는 순간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아 차에 타서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는데 아차, 싶었다.

-엄마, 나 아파트 옮겼어. 또 갑자기 와서 먼저 살던 아파트 벨 누르지 마.

지선의 엄마는 부랴부랴 문자를 확인해서 지선이 보내준 새집 주소를 찾아냈다.

“얘는 왜 전화는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아, 오늘 웨딩이 많아서 바쁜가 보네.”

그제야 괜히 일하느라 바쁜 딸 탓을 했던 게 미안했다.

***

동욱은 아이들을 방에 눕혀주고 차로 돌아왔다. 지선은 차에 두고 갔던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방전이었다.

“지금 충전해요. 한 팀장님. 핸드폰 죽었을 텐데요.”

“아뇨, 나중에요. 일단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회사로 가면서 할게요.”

“피곤하지 않겠어요?”

“아뇨, 저도 아이들하고 좋은 시간 보내서 고맙습니다.”

“한 팀장님, 제가 설명할 상황이 생기면 그때 말할게요.”

동욱은 지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백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저 그 상황이 뭔지 안 들어도 괜찮아요.”

동욱은 익숙하게 지선의 아파트 동 앞에 주차했다. 지선은 차에서 내렸다. 동욱은 운전석에서 내려 지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라면 먹고 갈래요? 말해야 하나?’

지선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소리.’

라면 먹고 가라고 하면, 라면을 먹으라는 줄 알아들을 테고 당연히 괜찮다고 할 게 뻔했다.

“뭡니까?”

“아닙니다.”

지선의 엄마는 지선이 보내준 새 아파트 주소를 입력해서 겨우 찾아와 차를 주차하고 내리려는데 지선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동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욱은 지선을 내려주고 운전석으로 가려다 지선을 돌아보았다.

“디스플레이 작업은 어느 정도 걸려요?”

“3~4시간 정도면 충분한데, 제가 새벽형이 아니라 주로 밤에 작업해요.”

“그럼, 좀 쉬었다가 회사에 가봐야겠네요.”

‘뭐야,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저기, 대표님.”

지선은 저녁은 어차피 먹어야 하니까 같이 먹자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지선아!”

지선의 엄마가 다가왔다.

“엄마아!”

지선은 놀라서 얼른 동욱을 쳐다봤다.

“엄마, 신랑감 곧 데리고 내려갈게.”

“너 정말 남자 있어?”

“있어.”

지선은 엄마와 통화했던 내용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렴 우리 딸이 눈이 삐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지.’

지선의 엄마는 아파트를 잘못 가서 놀란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리고 있었지만, 동욱을 확인하자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장착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지선의 엄마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동욱을 그 신랑감으로 생각한 게 뻔했다. 눈앞이 아찔한 순간이다. 까딱하다 지선의 가짜 결혼마저 탄로 날 위기다.

“너는!”

지선의 엄마는 다가오자마자 지선의 등짝을 갈겼다. 동욱은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라고 들었었는데.

“엄마, 이분은.”

“민동욱입니다.”

동욱은 놀란 나머지 정중하게 인사부터 하기로 한 모양이다.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해, 엄마.”

지선은 엄마 팔을 끌어당겼다.

“대표님, 내일 회사에서 봬요.”

“아, 그러죠. 오늘 고마웠습니다.”

동욱은 한 팀장님, 이라고 덧붙이려다 어쩐지 분위기가 안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혼잣말로 내뱉었다.

“아이, 제대로 인사라도 시키지 왜 보내?”

“무슨 인사?”

지선은 놀라서 동욱이 떠났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대표였어?”

지선의 엄마는 행복한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거였어, 엄마가.’

지선은 이미 내뱉은 거짓말이 거침없이 커지고 있었고 놀랍게도 간까지 붓고 있는 상황에 눈을 딱 감았다.

“아직 직원들도 몰라. 대표님하고 사이는.”

“원래 소문은 주위 사람들 다 아는데 당사자들만 모르는 거야, 그래서 남편이 바람이 나면 마누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안다는 거 아냐.”

“아빠가 바람도 피웠어?”

“에구, 바람이나 필 주변머리나 되면.”

“엄마, 나 저녁 먹고 좀 쉬었다가 쇼윈도 디스플레이 작업하러 가야 해.”

“들어가자, 영월시장에서 너 좋아하는 전하고 밑반찬 좀 사 왔어.”

지선은 동욱이 잠시 있다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지선의 엄마는 동욱이 떠나는 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니, 왜 그냥 가는 보내는 거야.”

“대표님, 요즘 집안일로 머리가 좀 복잡해.”

지선은 엄마가 싸 들고 온 짐보따리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빌딩 안으로 움직였다.

“어머, 어머, 어머! 엄마도 그 기사 봤어. 대표 엄마가 유명한 전설의 여배우 윤나영이라며. 그래서, 인물이 저렇게 훤한 거구나.”

지선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세게 눌렀다.

지선의 엄마는 계속 주섬주섬 싸 들고 온 반찬을 식탁에 늘어놓으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지선은 샤워를 하고 대충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지선의 엄마는 지선과 마주 앉았다.

“살다가 우리 딸이 멀쩡한 신랑감을 데려올 날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네.”

“엄마 딸이 어디 모자라는 줄 알았어?”

지선은 전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다 엄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멀쩡한 사윗감을 데려오는 게 요즘 그렇게 힘든 일일까?

“아니, 모자란다기보다 요즘 멀쩡한 신랑감이 어디 쉬워야지. 있다 싶으면 숨겨놓은 애가 있다든지, 너 영은이 알지?”

안다. 초등학교 동창이다. 어린 시절을 들로 강으로 함께 뛰어다녔었다. 서울로 전학을 오고 나서 점점 문화의 차이랄까, 영은은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로 전학을 왔지만, 친구라고 대놓고 다니기가 민망할 정도로 엉뚱한 행동을 하여 점점 멀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