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흰색은 한 점 죄악 없는 순수한 예복의 색이었다. 또한 죽음이 만연한 도살장에서 흘러나온 뼈의 색이었다. 아름다운 고대 신들을 묘사한 대리석 신상의 색. 재와 안개, 별빛의 색. 설원을 배회하는 맹수의 색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흰색은 영원한 그의 왕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곳은 짐승의 등뼈처럼 새하얀 침엽수림이 칠흑 같은 밤하늘을 향해 무수한 팔을 뻗치는 곳, 털이 흰 늑대들의 낙원, 고대 신화의 불길한 비현실과 환상이 아직도 허용되는 세계였다.

‘그래, 그런 곳으로 함께 도망치는 거야.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곳, 우리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땅으로 떠나자. 거기서 네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수만 있다면. 네 창백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그렇게 언제까지나 너를 끌어안고 있을 수만 있다면….’

나탈리아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처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는 나른한 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가스등이 발하는 몽롱한 황금빛 광채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제국 장교들이 입는 긴 코트 차림이었다. 아득한 흰색, 날카로운 금색. 검은 장갑에 싸인 두 손은 자연스럽게 맞잡았다.

그는 철창 너머로 나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빙하 같은 눈에 순수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완벽한 순백색 머리카락은 인간이라기보다 차라리 전설 속의 신화적인 존재들을 연상시켰다. 이 어둡고 비참한 감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탈리아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남자의 손길에 녹슨 쇠창살이 서리로 뒤덮였다. 그 모습에 나탈리아는 이 추위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날 남자의 한마디에 나탈리아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형수라면서.”

그를 뒤따라온 병사들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늘 강철처럼 냉담해 보이던 그들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불안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인간이라는 거지. 그러면 내가 마음대로 다룬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내 별궁으로 데려오도록 해.”

처형장 대신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미지의 별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어두운 뜬소문과 피비린내 나는 악몽이 뒤엉킨 곳, 누구도 그 실체를 모르는 궁전으로.

“당장 사형을 피했다고 좋아할 거 없어. 그의 손에 넘겨지는 건 어쩌면 죽는 것보다 못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또 무슨 악질적인 장난을 치려고 널 데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단두대에서 죽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나 같으면 차라리 자살해 버렸을 거야. 그는 영혼이 없는 자, 황실의 악마니까….”

나탈리아를 끌고 가던 병사들 중 한 명이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한 채였다.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의 이야기는 나탈리아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제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소문이었다. 황궁의 가장 어두운 구석, 비밀스러운 별궁에 살고 있다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소문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꿈같이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질 나쁜 악몽을 닮았다. 그건 온갖 핏빛 환상과 광기를 동시에 가진 어느 전설 속의 존재에 관한 괴담이었다.

천천히 흩날리는 눈발 너머에서 별궁의 흰 외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게 별궁은 매우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황궁의 어떤 건물과도 가깝지 않고 고독하게 홀로 떨어져 있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이 우울한 정원에서 외딴 섬처럼 돋보였다. 섬세한 파사드가 눈 속에서 황홀한 환상처럼 빛났다.

별궁 현관에 들어서자 방금 전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는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그를 오래 마주하는 것조차도 싫다는 듯이 재빠른 동작으로 남자에게 경례하고는 서둘러 돌아가 버렸다. 등 뒤에서 무거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이곳에는 나탈리아와 남자 둘만 남았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 감옥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나도 갇혀 지내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잘 알거든. 따라와.”

남자가 물었다.

“네 이름은 병사들에게 들었어. 이름이… 나탈리아?”

그는 대답을 원하는 듯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나탈리아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 네 처형은 없던 일로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황실에서 나에게 네 목숨에 대한 권한을 넘겨줬거든. 너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겠다는 조건으로 말이야.”

‘죽을 때까지라니.’

그 말에서 묻어나는 불길함에 나탈리아는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니 사실 자유가 된 건 아니야, 어쩌면 감옥이 별궁으로 바뀐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나쁜 일만은 아닐 거야, 저 비참한 지하실보다는 여기서 지내는 게 훨씬 편안할 테니까.”

남자는 멈춰 서서 나탈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내 소문에 대해서는 아마 들어 봤겠지? 별궁에 살고 있다는 코샤이에 대한 소문 말이야.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만, 그게 바로 나야. 이반이라고 불러, 그게 황실에서 내게 붙여준 인간 이름이거든. 여기서 혼자 지내고 있어. 앞으로 너도 나와 같이 살게 될 거야. 잘 부탁해.”

이반은 몸에 밴 듯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나탈리아의 손을 잡아 올리더니 장밋빛으로 얼어붙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서늘한 입술이 와 닿자 나탈리아는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동작은 꼭 연회에서 만난 귀족 영애를 대하는 듯이 정중했다. 하지만 여기는 연회장이 아니었고, 나탈리아는 지금은 귀족 영애도 아니었고, 이제 자신의 목숨조차 눈앞의 낯선 이의 손에 달려 있는, 어쩌면 잔혹한 놀이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형수 신세였다.

그들은 국가마다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우르수스 제국에서는 코샤이라고 칭해졌다. 아무도 그들의 기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넓은 대지의 화신이며 아득한 시간을 존재해 온 강력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힘은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인간 마법사의 것보다 강력했다. 인류는 코샤이와 다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고대인들은 그들을 신화 속 신들의 전령으로 여겼다. 시인들은 그들의 신비함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역사 속의 무수한 위정자들은 그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코샤이의 힘을 영원히 차지하려는 시도는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은 사람의 손에 영원히 사로잡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강대한 마력 덕분에 일반적인 구속의 마법으로는 붙잡히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라면 그랬다.

그렇기에 설원의 코샤이를 복속시켰다는 황실의 말을 처음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럴 만한 것이, 사실 코샤이들은 이미 자연이라는 자신들만의 세계의 지배자였으니까. 힘을 얻기 위해 그 누구의 인정도 추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의 왕국을 가진 진정으로 고귀한 혈통인 셈이었다. 그런 존재가 굳이 인간 제국에, 그것도 안에서부터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황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앞잡이로 부역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이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설원은 우르수스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곳을 개척하는 일은 항상 제국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야망에도 불구하고 설원은 긴 시간 동안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문명의 진입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완벽하게 차갑고 척박한 땅이었다. 냉혹한 강풍과 빛나는 만년설이 지배하는 차디찬 대지는 어떤 인간도 품을 수 없을 듯했다.

그런 설원에도 이변이 일어났다. 영원할 것만 같던 얼어붙은 땅이 하룻밤 사이에 기적처럼 온화한 대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건 역사상의 어떤 뛰어난 인간 마법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실에서는 이 모든 기적이 설원에 살던 코샤이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강력한 마력을 이용해 무의미하고 황폐한 설원을 인간을 위한 땅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고귀한 인품과 뛰어난 능력에 코샤이조차 감화되어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황실의 주장이었다. 물론 나탈리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설원의 코샤이가 황실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드넓은 혹한의 대지가 하루아침에 녹아내리는 일 따위는 일어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황족도 아닌 미지의 인물인 이반이 궁전에서 지내고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설원이 녹아내린 사건 이후로 언젠가부터 코샤이를 둘러싼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고문과 처형 뒤에 있는 존재라고 했다. 애초에 인간의 피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황실의 포학에 가담하고 충성을 바치는 것이라고도 했다. 비록 실제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건 많은 귀족들이 따분한 사교 모임에서 즐겨 하는 음침한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아마 병사들이 나탈리아에게 불길하게 속삭이던 이야기도 바로 이것일 터였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코샤이 같은 존재가 황실에 충성한다는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할 이유가 필요해서였을지도 몰랐다. 혹은 근거 없는 단순한 소문이 아닌 것일지도.

어쨌거나, 아무도 만나본 적 없는 그 소문 속의 존재가 지금 나탈리아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외형에 관한 이런저런 추측도 많았다. 어떤 이는 황실의 코샤이가 괴물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했다. 꽤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코샤이를 복속시켰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면서도 정작 그 모습은 대중 앞에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되어주었으니까. 하지만 나탈리아는 이제 적어도 그 추측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탈리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반은 괴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이반은 얼핏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외형이었다. 하지만 뭇 사람들과는 한 차원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마법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그 덕에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나무처럼 큰 키에 창백한 피부는 눈부신 은발과 잘 어울렸다. 가까이 다가올 때는 마치 유령처럼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렇게 체격이 큰 것치고는 놀라운 일이었다. 나탈리아에게 말을 걸 때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아한 억양은 황족들의 것을 그대로 닮았다. 그는 나탈리아와 함께 걷는 동안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완벽하게 유지할 줄 알았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 가까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그 움직임은 본성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제국 귀족들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의범절도 몸에 익은 듯이 자연스럽게 지킬 줄 알았다. 그 우아한 행동거지로부터 그가 황실의 예절 교육에 완벽히 길들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반이 황족은커녕 인간조차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 고상한 모습에서는 이반을 따라다니는 온갖 불길한 소문들을 전혀 연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공포심을 자극했다.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는 나탈리아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서는 특별히 어떠한 악의도 느낄 수 없었다. 이반은 나탈리아가 방금 감옥에서 끌려나온 희생양이 아니라, 마치 집에 찾아온 손님인 듯 대했다.

“여기가 네 방이야. 하지만 열려 있는 방은 어디든지 써도 좋아. 어차피 우리 둘뿐이니까.”

이반이 그렇게 말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어둠에 덮여 꿈결처럼 희미한 침실이 나타났다. 나탈리아는 이곳에 오는 동안 들었던 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반은 악마라고 불렸다. 그 말을 하던 병사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했다. 제국 최고의 정예병들조차 그를 괴물처럼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반을 그렇게나 겁내면서도, 황실은 그를 계속 호화로운 별궁에서 지내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 단지 지내도록 내버려 두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뜻 내줄 정도로 그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심지어 나탈리아의 목숨까지도 마치 선물처럼 그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니까.

‘병사들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악마라고, 그에게 끌려가느니 죽는 게 더 나은 일일 거라고 말이야. 정말 그 모든 소문들이 사실인가? 인간의 피에 굶주려 있다느니 하는 것들이….’

별궁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었고 이반은 겉보기에는 친절하게 굴었지만 두려움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태도와 악명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불안감은 더욱 커져 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떨고 있지? 추워? 아니면….”

이반이 몸을 살짝 숙여 나탈리아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무서워?”

나탈리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나를 데려온 이유가 뭐야? 사람들이 말하기를 넌….”

‘넌 인간을 재미 삼아 고문하는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던데. 나도 그 끔찍한 장난에 희생시킬 생각으로 끌고 온 거야?’

뒷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나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무서워할 거 없어, 널 해칠 의도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왜?”

그다음 이어진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외로우니까.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 사실 괴로울 정도로 고독한 일이야. 이런 생활에는 이제 질려 버렸어. 간단히 말하면, 나는 이 궁전에서 나와 함께 지내 줄 사람이 필요해. 그 역할로 너를 데려온 거야.”

그렇게 이반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탈리아도 점차 별궁의 풍경에 익숙해져 갔다. 이곳은 굳게 잠긴 방이 많은 수수께끼의 공간이었다. 은빛과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궁전은 제국의 구름 끼고 눈 내리는 몽롱한 겨울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곳을 지배하는 무거운 침묵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무덤 같은 정적 속에서 나탈리아는 자주 잠을 설쳤다. 궁전에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가끔씩 검은 옷을 입은 하인들이 이반을 보러 왔다. 그들도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가 시켰어. 큰 소리로 말하는 걸 싫어하거든.’

복도에는 짚단처럼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우아한 무늬가 수놓아진 그 융단 위에서는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빛나는 홀의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은 무도회장을 연상시켰지만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실내 악단도, 다정하게 노닥거리는 연인들의 말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창문은 커튼으로 덮여 있어서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부드럽고 맥없는 실내등의 불빛이 그 대신이었다. 넓은 궁전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벽과 기둥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복도와 방을 물들였다. 그래서 별궁은 언제나 그늘의 영역과 환상처럼 나른한 빛의 영역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석조 기둥의 거미줄 같은 무늬가 아름다운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차를 자주 마셨다. 그곳에서는 설탕과 은제 식기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반은 나탈리아의 과거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는 나탈리아가 무슨 일로 체포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너 같은 사람이 사형수로 들어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겉보기에는 전혀 중죄인처럼 보이지 않는데. 무슨 죄를 지은 거지?”

외국으로의 유학은 귀족 사회의 관행이었다. 나탈리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된 일이었다. 선대 황제는 우르수스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주변 국가와 다르게 낙후되어 가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제국도 번영하는 주변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귀족 자제들에게 외국으로의 유학을 독려했다. 그런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나탈리아도 그 흐름에 아무 고민 없이 끼어들었다.

도착한 그곳은 온갖 새로운 문화가 제멋대로 꽃피고 낯선 학문들이 뒤섞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변경에 들어서기 시작한 공장지대에서는 밤낮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탈리아가 평생을 살아온 우르수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대학, 혼란스러우면서도 눈부신 거리, 외국어로 떠들어대는 소리, 미숙하지만 열정만큼은 넘치는 학생들의 떠들썩한 논쟁, 정제되지 않은 거칠고 생소한 활력. 그런 것들이 나탈리아를 매료시켰다. 그리고 나탈리아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날, 낡은 교회의 종이 어둡게 울려 퍼지는 거리를 다시 보게 된 날, 눈이 녹아 진창이 된 돌바닥과 농노들이 거니는 영지를 내려다보게 된 날, 그런 빛나는 생명력은 나탈리아가 평생 살아갈 이 오래된 제국과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외국물을 먹고 불온한 사상에 물든 이들을 두려워했다. 우르수스의 국어보다도 외국어에 더 유창한 귀족들을 혐오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다. 외세의 타락한 문물이 성스러운 우르수스를 더럽히기 전으로. 갖가지 ‘불온한’ 사상은 금지되었다. 독서 모임과 살롱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푼, 열정에 불타는 젊은 지식인들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황궁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하얀 옷을 입은 병사들이 총을 메고 늘어서 있었다. 나탈리아의 동료는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면 황실이라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겁니다.’

과연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몇몇은 죽었고 어떤 이들은 유배당했다고 한다. 나탈리아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반역자에 사형수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이 찾아왔다.

“아,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나는 그냥… 정말로 할 말이….”

이반은 창백해진 얼굴로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탈리아의 차가워진 손을 끌어당겨 맞잡고는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전혀 몰랐어.”

이반이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렇게 큰일이었는데.”

“난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잘 몰라. 허락이 없으면 이곳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니까.”

“왜?”

“아, 역시 그것까지는 바깥에 알려지지 않았겠지? 나에게 유폐의 마법이 걸려 있거든.”

이반은 코트 소매를 부드럽게 걷어 올렸다. 새하얀 손목에 선명한 마법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금기의 주술이었다. 유폐의 마법에 걸려든 자는 그 누구든 주문을 건 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갇힌 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주문에 붙잡힌 자의 의사를 거스르고 강제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거는 방법을 알 수 없도록 금지된 마법이었다. 그 마법에 대해 기록한 책들도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렇게나 잔인할 정도로 유용한 주문이 진정으로 사라졌을 리 없다는 것을. 분명히 권력자들의 암투에 쓰이기 위해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 실체를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