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뭐라고?”

민혁이 인상을 팍 쓰며 강현을 붙잡았다.

등굣길 본관 앞에서 만난 민혁과 강현, 수찬은 오랜만에 나란히 걷던 참이었다.

“아싸! 야 십만 원 내놔!”

강현이 덤덤하게 뱉은 발언에 신이 난 수찬은 만세를 외치며 민혁에게 들러붙었다.

강현과 민혁은 수찬의 부산스러움 따위 신경 둘 새가 없어보였다.

더 이상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았던 강현은 그들을 두고 자리를 뜨려했다.

그런 강현을 민혁이 다시 붙잡아 세웠다. 조금은 화가 묻은 손길이었다.

강현은 저를 강렬하게 쳐다보는 민혁의 눈을 피해 먼 허공을 보았다.

“누구랑 사겨?”

“…….”

“미쳤어?”

평소답지 않게 욕까지 하는 민혁의 흥분에 강현은 그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 뭐 잘못됐냐.”

“차예지 어떤 앤지 몰라서 이래? 다 아는 거 아니었어? 걔가 자윤이한테 무슨 짓을!”

“내가,”

말을 끊은 강현의 얼굴엔 감정이 없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돼?”

“뭐…?”

“…내 일이야. 누굴 사귀든 내 마음이고.”

“…….”

말문이 막힌 민혁은 더 이상의 대답 없이 강현을 보기만 했다.

강현도 마찬가지로 민혁의 시선을 받아쳤다. 견고한 말투에 비해 눈빛은 다소 흔들리고 있었다. 강현은 표정을 숨기고자 어금니를 꽉 물어 힘주었다.

“자윤이랑 무슨 일 있었지.”

“…….”

민혁의 정곡에 강현이 먼저 눈을 피했다.

잠깐이었지만 강현의 원치 않은 감정이 민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일인데. 뭐 때문에 이래.”

“대학 와서 연애 한번 해보겠다는데, 뭐 이상해?”

“네가 연애해보자고 아무나 사귈 애야?”

강현과 민혁의 언성이 자꾸 올라가기 시작했다.

깐족거리며 10만원을 외치던 수찬도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입을 다문지는 오래고 대치중인 둘을 번갈아봤다.

“아무나 사귀면 안 돼?”

“…….”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애하자고 없는 감정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되냐.”

민혁을 마주한 강현의 눈은 상당히 메말라 있었다. 생기를 내려놓은 눈빛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높았던 언성을 가라앉힌 민혁이 낮게 깔린 톤으로 물었다.

때문에 강현의 평평하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려 줄 인내가 없는 거겠지.”

“…….”

“내 친구가 이 정도로 바닥인 줄 몰랐네.”

“…….”

“등신 같은 새끼….”

욕이라곤 해본 적 없는 민혁이 친구들 앞에서 여러 번 생소한 모습을 비췄다.

민혁의 말에 크게 흔들린 강현은 표정을 정리하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이 전부 드러났다.

민혁은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수찬은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둘의 사이를 번갈아보았다.

“뭐야… 이 좋은 날에 웬 싸움?”

강현은 얼이 빠진 상태로 민혁이 사라진 빈 공간에만 눈을 두었다.

“에이씨. 야, 강민혁…!”

반응 없는 강현을 흘깃거리던 수찬은 눈치 보다가 민혁에게로 빠르게 뛰어갔다.

“강민혁….”

설마 내가 유자윤한테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는 건가…

미동 없던 강현이 고개를 돌려 저만치 멀어진 민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

힘없이 걷던 걸음을 멈춘 자윤은 놀라서 벙찐 얼굴로 통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 네 덕분이야. 솔직히 너랑 친구한 거 후회할 뻔 했거든. 그런데 이런 결과를 위한 큰 그림이었다니. 너 정말 천재 아니니?

예지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있었다.

“무슨….”

-내가 나중에 술 살게. 고마워, 사랑해 우리 자윤이.

뚝.

전화가 끊겼다. 그럼에도 자윤은 귀에서 휴대폰을 떼지 못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강현이랑 예지가….

둘이….

“사귄다고…?”

그렇게 절절 매던 둘의 관계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둘의 관계가,

뜻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갑자기 이뤄졌다.

‘…내가 차예지랑 사겨야만 그만할 거냐.’

설마 어젯밤 그 말들이 오늘을 예고한 것일까.

자윤은 어제 강현과 그렇게 헤어지고 연락조차 되지 않아 전전긍긍 했었다.

그래서 오늘만을 기다렸다. 학교에 가면 있을 강현을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마주하고 싶었다. 학교를 가는 점점 걸음을 빨리 했다. 평소 잘하지 못하는 달리기까지 하며 조급함을 안고 무작정 뛰었다.

“왜 송강현한테 시비야. 서로 좋아하니까 사귀겠지.”

수찬은 화가나 보이는 민혁의 곁을 졸졸 따라 붙으며 쫑알대었다.

“혹시 십만 원 때문에 그러냐. 주기 싫음 싫다고 해.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네가 사랑을 잘 모르나본데,”

잘만 걷던 민혁이 느닷없이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수찬도 말을 끊고 멈추었다.

민혁은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급하게 오만 원 한 장을 꺼내선 수찬에게 건넸다.

“반은 네가 맞고 반은 내가 맞아.”

“뭐?”

뭔 소린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돈을 받은 수찬은 어디론가 뛰어가 버리는 민혁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자윤아!”

저 멀리 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자윤을 부르며 민혁은 좀 더 속도를 내었다. 자윤은 뒤따르고 있는 민혁이 보기에도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자윤의 달리기가 원체 느려 따라잡는 데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금세 자윤의 팔을 붙잡은 민혁은 자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데 그런 민혁을 제대로 확인조차 못하는 자윤은 저를 반기는 상대의 기분마저 가라앉힐 정도로 심각해보였다.

“왜 그래.”

“민혁아….”

자윤의 목소리가 가엾게 흔들렸다.

“응. 무슨 일 있어?”

“혹시 강현이 봤어…? 나 강현이한테 할 말 있는데… 어제 강현이랑,”

그때 민혁이 아직까지 잡고 있던 자윤의 팔을 조금 당겼다. 자윤의 발이 찔끔 당겨갔다.

자윤이 올려다보자 뒤쪽으로 눈을 두고 있는 민혁이 눈에 들었다. 자윤도 민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윤이랑 민혁이네.”

그곳에는 나란히 걸어오는 강현과 예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찬과 현숙이 투덕거리며 따르는 중이었다.

자윤은 예지와 강현을 한 번씩 보다가 강현에게만 눈을 고정시켰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강현만 보고 있었음에도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강,”

자윤은 강현을 부르며 먼저 다가가려고 했으나 알게 모르게 저지하는 민혁 탓에 다시 민혁을 올려다봤다.

민혁이 자윤의 손목을 꼭 붙잡고 있었다.

“…….”

“…….”

강현과 민혁이 주고받는 시선 사이엔 불편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민혁은 강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고 강현은 자윤을 붙잡고 있는 민혁의 손길이 거슬렸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엘리베이터 도착했다!”

꽃같이 예쁘게 웃던 예지가 자윤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자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먼저 향했다.

자윤은 질질 이끌리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강현과 민혁이 보였다. 자윤의 눈엔 오직 강현 만이 담겼다. 제게 한 번도 시선을 던져주지 않는 강현을 끈질기게 쳐다봤다.

“자윤아.”

오랜만에 앞자리로 앉은 자윤의 곁엔 민혁이 함께 있었다. 제 주변에 앉으라는 예지의 권유를 머뭇거리고만 있었더니 지켜보던 민혁이 앞자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뒤로 휴대폰을 꼭 쥐고 미동 없이 앉아있는 자윤을 본 민혁은 그녀의 기분을 직감했다.

“우리 학번 첫 씨씨 아니야?”

“오!!!!!”

강의실은 그새 소문을 퍼트린 수찬 때문에 예지와 강현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그들 무리를 등지고 앉은 자윤은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동안 예지를 도와 애쓴 자윤의 입장에선 축하를 해줘야 마땅한 일이었다. 애초부터 강현과 친하게 지낸 이유가 이것이었기 때문이니까.

그런데 왜…

“자윤아.”

“…….”

전혀 기쁘지가 않지….

자윤은 민혁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강현에게 보낸 메신저에 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꼭 쥐고 있는 손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민혁은 자윤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그에 자윤이 옆으로 돌아봤다.

“강현이랑 싸웠어?”

“…….”

강현이….

이름을 듣자마자 감정이 울컥 올라올 정도로 자윤은 이 상황에서 갑갑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윤의 눈망울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민혁은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끄럽지. 나갔다올까?”

“…….”

“바람 쐬러 가자.”

민혁이 자윤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딸려 일어난 자윤은 민혁에게 이끌려 터덜터덜 강의실을 벗어났다. 동기들이 밀집되어 있는 뒷문은 이용하기 불편하여 앞문으로 나갔다.

“…….”

자윤이 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줄곧 자윤을 보고 있던 강현은 민혁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는 자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자윤이 시야 밖으로 벗어나려 하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강현아?”

“…어.”

옆에 앉은 예지가 자신을 잡고 흔들기 전까진 예지의 말소리도 듣지 못했다.

“뭘 그렇게 봐.”

예지가 강현의 시선이 던져졌던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막 사라지는 자윤의 뒷모습을 찰나로 목격했다.

자윤이…?

예지는 다시 강현을 보았다.

강현은 이제 책상으로 눈을 내린 상태였다.

살짝 언짢았지만 예지는 그 마음을 뒤로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현아.”

“어.”

“강의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갈래? 어차피 체육대회 연습 하니까 먹고 같이 가자.”

예지가 강현의 팔에 손을 끼워 넣으려고 했다. 일종의 애교였다.

그러나 예지의 손끝이 닿자마자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고 일이 있어서 안 될 거 같은데.”

“어…?”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강현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걸음이 다급해보였다.

예지는 강현의 동선을 따라 뒷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꽂히는 촉에 기분이 상해갔다.

유자윤한테 가는 건 아니겠지….

입술을 꽉 물며 고민하다가 뒤따라 일어났다. 몰래 쫓아가 볼 생각이었다.

“말해줄 수 있어?”

민혁이 자윤에게 조심히 물었다. 둘은 테라스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강현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 자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기들이 없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강현이가 무슨 말 했어?”

“강현이… 강현이가… 이제 나랑 친구 안할 건가봐, 흑흐…….”

“자윤아.”

민혁이 손을 뻗어 자윤의 턱 쪽으로 고인 물기를 닦았다.

울먹이던 자윤이 민혁의 눈을 마주했다.

“걔가 뭐라고 했든 진심 아니야.”

“…….”

“강현이 너 되게 많이 좋아해.”

말 끝나기 무섭게 자윤의 눈가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윤이 못 믿고 있는 눈치였다.

민혁은 그런 자윤을 보며 더 이상 강현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걱정 마. 너 울린 송강현, 너도 울려버리면 그만이야.”

민혁이 견고한 얼굴로 말했다.

자윤은 그런 민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강현이랑 잘 지내고 싶어?”

“응….”

우는 틈에도 진심을 보이고 싶었는지 대답해내는 자윤을 민혁은 기특하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