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뱀파이어가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목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괜찮은 건가?”

목소리를 따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

그의 모습은 결점 없이 매끈한 하얀 피부. 동양적인 색채가 깊이 묻어나는 긴 눈매에 우수에 젖은 듯한 깊이감이 더해진 섹시한 눈. 높고 곱게 뻗은 콧날.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붉게 자리 잡은 입술. 여자처럼 긴 머리카락. 물기를 머금은 장발은 검디검은 푸르른 검은색이었다. 그의 얼굴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왜 이렇게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그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과 동시에 그의 눈과 코, 입술과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제가 죽은 건가요?”

그가 앞으로 쏟아진 긴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어떤 것 같아?”

“제가 죽어서 천사를 만나고 있든가. 아니면….”

“아니면?”

“저승사자가 저를 데려가려고 온 거겠죠?”

“동서양을 넘나드는군. 천사나 저승사자라. 이유는 뭐지?”

난 손으로 여전히 그의 얼굴 곳곳을 만지고 있었다.

“당신은 인간 같지 않아요. 너무 아름다워요.”

내 손이 그의 얼굴 곳곳을 헤매다가 붉은 입술에 닿았다.

‘붉어. 마치 피처럼. 피?’

피라는 낱말에 깨어났을 때보다 더 강한 갈증에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피. 갈증이… 피가 마시고 싶어. 피….”

갈증이 이성을 잠식할 것 같았다. 남자가 부드럽게 나의 턱을 들어 올리고 나의 입을 벌렸다. 혀 위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나를 집어삼킬 듯한 갈증 또한 잠잠해졌다. 이토록 참을 수 없는 갈증이라니, 이 남자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뭐죠? 이 갈증은?”

“흡혈 욕구.”

“그래요?”

흡혈 욕구 때문에 그랬구나? 흡혈 욕구…. 흡혈 욕구?

“흡혈 욕구요? 제가 왜 그런 걸 느껴야 하죠?”

“넌 뱀파이어가 되었거든.”

아름다운 얼굴로 안 어울리는 농담을 한다니 참 웃기는 남자도 다 보겠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저승사자도 아니고 내가 뱀파이어가 되었다? 그럼 당신도 뱀파이어인가요?”

내 비아냥에 남자의 입꼬리 한쪽이 말려 올라갔다. 모든 걸 내려 보는 듯한 비웃음 같았다. 남자가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체취가 숨을 통해 훅 들어왔다. 향수의 인위적인 향과는 다른 묘한 비릿함을 품고 있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그 체취에 술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눈이 몽롱한 걸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군. 이래선 대화가 안 되겠어.”

남자가 내 입속에 약을 한 알 더 넣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저한테 약 먹였죠? 정신이 이상해.”

“그래 방금 먹였잖아.”

“이거 봐. 순순히 인정하시겠다.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여긴 어디야. 당장 나가겠어요.”

“내 집이야.”

“당신 집? 그리고 여긴 욕실이고요?”

“보시다시피.”

‘욕실…’

욕실에서 여자를 잔인하게 살인하는 살인마가 나오는 공포영화가 떠올랐다.

‘나를 해치려고 잡아 놓은 건가?’

주변을 살펴봤다. 고급스러운 욕실이었지만 부분 부분이 망가져 있었다.

‘뱀파이어라고 했을 때부터 미친놈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날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만만해 보여선 안 돼. 최지수.’

그리고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아요.”

얕잡아 보던 그 눈빛에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범죄자가 피해자를 보는 그런 눈빛.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꺅.”

이제 정말 죽는구나 싶었는데 머리 위로 수건 하나가 떨어졌다.

“당연하지.”

남자는 수건으로 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범죄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너는 뱀파이어야. 그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아.”

다시 그의 유혹적인 냄새가 나의 숨에 섞여 들어왔다. 이번엔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고 안정을 되찾았다.

“어때? 믿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냄새를 들이킬수록 믿음이 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다시 흔들었다.

‘제정신을 차려야 해.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눈을 똑바로 들고 그를 살폈다.

“내가 어떻게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죠?”

그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증거가 필요하다면야.”

남자가 부서진 욕실의 타일 파편을 집어 들더니 자기 팔을 그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악! 이 정신병자 사이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입조심. 입조심하자 최지수. 이 남자 범죄자를 넘어서 사이코야. 난 이제 어떻게 해.’

“이봐, 눈을 뜨고 증거를 보라고. 내가 뱀파이어라는 증거.”

숨을 죽이고 눈을 떠 그의 팔을 바라보는데 남자의 팔이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뭐… 뭐야?”

그의 팔을 뚫어지라 쳐다봤지만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팔이… 타일로… 아물었….”

이 현상에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네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줄까?”

남자가 타일을 들고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이번엔 자신을 그었던 타일로 내 팔을 그을 태세였다.

“그 타일로 날 찌르겠다는 건가요?”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난 타일 끝에 채 마르지 않은 그의 피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목이 갈증이 아닌 두려움으로 바짝 타들어 갔다.

‘안 돼. 이 사이코 새끼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자 앞에 난 무방비 사태였다. 우선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어요. 믿는다고요.”

“그래? 그래도 한 번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확인하겠다는 게 무슨 말이겠는가? 날 찌르겠다는 말이겠지. 나는 있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남자가 씨익, 하고 웃더니 다가와 부드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밀착된 그의 몸에서 다시 기분 좋은 체취가 풍겼다. 냄새 때문인지 시원한 남자의 체온 때문인지 공포감이 슬며시 수그러들었다.

‘조심해야 하는데….’

들숨으로 그의 체취가 폐에 가득 찼고 의심의 씨앗은 점점 이성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신생 뱀파이어 씨. 옷 좀 갈아입자고.”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은 더욱 완벽했다. 매끄러운 피부. 긴 속눈썹.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이성의 끈을 붙잡으려 애썼다. 남자에게 안겨 욕실에서 나오니 넓은 거실이 나왔고 많은 방문이 보였다. 많은 문 중 한 방문을 그가 열었다. 방안은 욕실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였고 방 크기는 내 방보다 5배는 커 보였다. 남자가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음…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군. 우선 샤워하고 몸 좀 말리고 있어. 옷장 속에 있는 내 옷 대충 걸쳐 입도록 해.”

정말 내가 뱀파이어가 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남자가 타일로 자신의 팔을 그었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계속 묻고 싶었다. 나 자신이 믿어질 때까지 묻고 싶었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왜 뱀파이어 된 걸까?

“저기. 그럼 제가 어쩌다가 뱀파이어가 된 건가요?”

“내가 만들었어.”

“네? 멀쩡하던 나를 왜 뱀파이어 만들어요?”

“멀쩡하지 않았으니까.”

“멀쩡했다고요!”

그가 날 내려다보았다. 그 피 묻는 타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랬던 것 같은데.”

난 눈알을 굴리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바보 최지수. 무서워서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다니. 근데 내가 뱀파이어가 된 거면? 낮에는 못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럼 내 회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답게 직장 걱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뱀파이어가 되었어도 먹고살기는 해야 하니까 말이다.

“저. 제가 뱀파이어가 된 거라면. 죄송한데 회사는 다닐 수 있나요?”

‘이 정도 질문은 괜찮겠지?’

눈알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 다니고 싶어?”

‘이 취업난에 하국제약이라는 스펙을 버릴 수 없지.’

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

정말 쿨한 그의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말요? 다닐 수 있어요? 뱀파이어라 하면 해가 떠 있을 땐 못 돌아다니는 거… 아닌가요? 햇빛에 닿으면 불타 없어진다든가… 영화에선 그러던데.”

남자가 피식 웃었다. 한쪽 입술 끝이 묘하게 더 올라가는 미소였는데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분 나빠 보였을 미소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그건 영화에서뿐이니까. 우리도 낮에 다닐 수 있어.”

“정말요? 다행이다. 내가 어떻게 하국제약을 들어갔는데. 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네 상태로는 회사에 다닐 수 없겠지만. 적응만 잘하면 차차 괜찮아지겠지. 그럼 그땐 네가 다니고 싶으면 다녀. 나로서는 왜 다녀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 네.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그가 다시 피식하고 웃었다.

“씻고 나와.”

“네.”

그가 밖으로 나갔고 난 씻으러 욕실로 향하려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회장. 여성 옷 좀 가져다줘.”

이렇게 좋은 집인데도 바깥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방음 안 되는 거 봐라. 이 집도 빛 좋은 개살구구나.”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낼 수 없는 속도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 집은 완벽해. 뱀파이어는 멀리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 나에게 꽤 신경 쓰고 있나 보군 그래. 집중하는 물체의 소리는 더 크게 들을 수 있거든.”

“깜짝이야. 노크 좀 하고 들어오세요. 사….”

너무 놀라 마음에 있던 사이코 뱀파이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나를 포함해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무시하는 건 난 못 참아.”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네. 알겠습니다. 사이코 뱀파이어 씨. 자부심이 대단하시군요.’

나는 마음의 소리를 삼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빠르게 사과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찡그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들리지 않아. 희한하군.”

“네?”

“됐고. 빨리 씻고 나와.”

씻으라면서 그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가셔야 제가 씻든 뭐든 하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닫고 나간다.

“휴.”

이제 좀 욕실에 가서 씻어볼까 생각했다.

“어라?”

벌써 옷을 벗고 욕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대단한데?”

빠른 행동에 대한 경외감과 빨리 씻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이었다.

“아앗, 뭐야.”

수도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손에는 수도꼭지가 들려 있었다.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뱀파이어 남자가 빠르게 욕실까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이거.”

살며시 수도꼭지를 내밀었다.

“다행이군.”

수도에서 물이 철철 뿜어져 나오는데 도대체 무엇이 다행인 건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정말 다행이었다. 이 고급스러운 집에 비싸 보이는 수도꼭지를 부숴버렸으니까 말이다.

“정확히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움직여. 그러면 이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 우선 다른 방 욕실에서 씻어. 난 거실에 있지.”

“네.”

그가 안내하는 방에 욕실로 들어갔다.

“한 가지 생각만 하라고 했지. 난 지금 씻고 싶어.”

다행히 수도꼭지를 부수지 않고 물을 틀었다.

“좋았어.”

기분 좋게 샴푸를 짜고 머리를 감았다.

“근데 나 나체였잖아.”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남자 알고도 말 안 해줬어.”

저 남자에게 변태라는 수식어를 더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태 사이코 뱀파이어라고 말이다. 이미 다 씻고 난 후였지만 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생각을 정리했다. 몸의 빠른 반응에 신기한 마음이 물러가고 나니 내가 뱀파이어가 된 거라는 생각이 나를 착잡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