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뱀파이어도 목숨은 지켜야 하고

여자 뱀파이어는 우리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소리를 마당에 잡초가 났으니 뽑아 없애야 한다는 듯 간단하게 말했다. 박로후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없다면요?”

“싸움 나는 거지. 기껏 신생 뱀파이어 둘 때문에. 인간의 피가 식지도 않았을 너희 둘 때문에 말이야.”

“우리도 싸우겠다면요?”

“너희 둘이?”

소미가 코웃음을 쳤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그 피부를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야?”

보연 씨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널 우선 없앨 거야. 그리고 그다음에 찾아오는 뱀파이어가 있다면 또 없앨 거고, 그다음에 찾아온다면 다시 없애면 돼.”

그 여자가 긴장되는 듯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근데 말이야. 무슨 확신으로 나를 쫓아온 거야?”

보연 씨가 먼저 흠칫 놀란 듯 회사가 있는 방향으로 뒤돌아보았다.

“난 말한 적 없는데. 오늘 너희를 찾아온 뱀파이어가 나 혼자뿐이라고 말이야.”

“뭐?”

찾아온 뱀파이어가 혼자가 아니라면 보연 씨의 사람들이 위험할 것이다. 뱀파이어가 없는 뱀파이어의 사람들. 내가 뱀파이어가 되게 도와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하 회장님까지.

“그러니 지금 날 상대할 정신이 있으면 돌아가서 살피라고. 하보연이 물고 빠는 그 인간 나부랭이들을 말이야.”

“널 죽여 버리겠어.”

“그럼 나도 죽이지. 너희 회사 모든 사람을. 오늘은 퇴근하고 없을 테지. 그럼 내일 죽일 거야. 저 회사에 바글바글 차 있을 모든 사람을.”

그녀는 사람들이 무슨 바퀴벌레라도 되는 듯 비아냥거렸다. 보연 씨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나는 전할 말은 전했고. 오늘은 이만 가볼게. 또 봐, 뱀파이어들.”

그녀가 다른 옥상으로 점프해서 뛰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보연 씨가 몸을 돌려 회사 쪽을 향해 뛰었다. 그의 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나도 혹여나 다른 뱀파이어가 회사 사람들을 공격할까 봐 걱정되어 그런 보연 씨를 뒤따랐다. 회사에 도착해서 보연 씨가 우리는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럼 하 회장님은요? 사람들은요?”

나의 말에 보연 씨가 진정이 안 된 거친 목소리로 지시했다.

“내가 괜찮은지 체크할 테니까. 너희는 집으로 들어가. 우리 집은 안전해. 그러니 너희 둘은 우선 집으로 들어가.”

“나도 같이 가요.”

그때 박로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보연 씨를 방해하지 마요. 지수 씨. 지금은 보연 씨의 말을 따르는 게 안전하니까.”

“하지만 걱정된단 말이야. 우리 때문에 사람들을 죽인다잖아. 우리 때문에.”

“그래서요. 당신도 죽을 건가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을 거면 집 안으로 들어가요.”

보연 씨를 바라봤지만 박로후의 말대로 하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집 안에 들어왔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죽었으면 어떡해?”

“죽지 않았길 바라야죠.”

“하 회장님이 죽었으면 어떡해?”

박로후가 계속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붙잡아서 소파에 앉혔다.

“그들도 함부로 보연 씨의 사람들을 죽이진 않을 거예요.”

“그들이 죽인다는 소리 못 들었어?”

“그들은 이번에 제안을 한 거예요.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은 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다시 우릴 찾아오겠죠.”

“다시 찾아오면?”

“그땐 우리도 결정을 내려야겠죠.”

내내 생각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우리 둘 중의 하나가 죽는 거?”

“아뇨.”

박로후의 대답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쉬운 문제라도 맞힌 듯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죽인다고?”

내가 벌떡 일어나자 그가 다시 나의 팔을 붙잡고 앉힌다.

“쉽게 생각하세요. 그들이 우릴 죽인다고 선포했어요. 그러니 우리도 그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에요?”

아. 정말 이 박로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규칙이라잖아.”

“말 그대로 그들의 규칙이잖아요.”

“그들의 규칙….”

“맞아요. 그들의 규칙.”

그의 말에 잠깐 빠져들 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리도 뱀파이어인걸.”

나는 확신이 없었다. 보연 씨의 사람들을 지켜낼 자신도 다른 뱀파이어들을 없앨 자신도. 그리고… 내가 죽을 자신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빠르게 돌린 다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혹시나 우리를 처리하러 온 뱀파이어는 아닐까? 보연 씨가 없는 틈에 우리를 없애러 온 건 아닐까?’

뱀파이어가 된 다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게 날 두렵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보연 씨가 내렸다.

“다 괜찮은 거예요?”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거죠? 우리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하는 거라면 그만둬요.”

“너까지 날 피곤하게 하지 마.”

그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강하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어 그에게로 쓰러지듯 안기게 되었다.

“쉬자. 잠시만.”

“정말 괜찮다고 말해줘요.”

나를 안은 건 그였지만 불안한 건 내 쪽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의 말에 그가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나에게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다짐처럼 되뇌고 있었다. 그의 말이 효과가 있는 건지 그의 품에서 나는 체취가 효과가 있는 건지 나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박로후가 자신도 있다는 듯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할 게 있을 텐데요.”

“너희가 해야 할 건.”

고개를 들어 보연 씨를 바라보았다.

“살아남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거.”

박로후의 물음이었지만 보연 씨는 나에게 다짐을 받아내듯 내 눈을 직시하고 말했다.

“할 수 있지?”

“모르겠어요.”

그가 나를 껴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안 돼. 그런 말은. 할 수 있다고 말해.”

그의 눈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해볼게요.”

“누가 다치든 죽어 나가든 넌 상관없이 네 목숨을 지키는 거야, 알았어?”

그의 눈빛이 불안한 듯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다급한 듯 커졌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그럴 자신이 없다고 그에게 말하면 내가 의지해야 할 단 하나의 존재인 그조차 쓰러져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박로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꼭 다치는 건 나고 죽어 나가는 것도 나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너도 아무튼 내가 만들었으니 되도록 책임질 거야.”

“되도록이면요? 꼭 지키셔야죠. 내가 살려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날 두 번 죽이진 마세요.”

보연 씨의 입에서 가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만든 뱀파이어 녀석들은 감사할 줄은 모르고.”

“어쩌다가 그렇게 생긴 것들을 만드셨어요? 그러니까 잘 보고 만들었어야죠.”

보연 씨가 박로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박로후가 씨익 웃어 보이고는 나를 끌어안고 있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웃고 있던 인상을 찡그렸다. 나에게서 보연 씨의 손이 점점 멀어지다가 갑자기 내가 아플 정도로 탁하고 나의 등을 때렸다.

“아, 보연 씨. 아파요.”

보연 씨의 품에서 빠져나와 보연 씨의 손에 맞은 등을 만지려 뒤로 손을 뻗어 비볐다. 나의 말에 보연 씨가 나를 다시 끌어안고 박로후에게 말했다.

“뭐 하는 거지?”

“연습하고 있는데 겨우 몇 센티미터라니 저한테 실망입니다.”

실망인 것치고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허락 없이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박로후.”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박로후가 보연 씨를 조정하려고 한 모양이다.

“능력 시험하는 거야? 나도 실험해야 할 텐데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 너는 그래도 능력이 곧잘 나오나 봐?”

나도 능력을 키워야 했다. 내가 뒤지고 있는 듯해 기분도 나쁠뿐더러 상황 자체도 위급했다.

“집중하는 거죠.”

“어떤 식으로?”

“내 능력이 당연한 거라고 믿고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번에는 날 안고 있던 보연 씨의 팔이 떨어져서 소파에 차분히 놓였다. 보연 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락받고 하라니까.”

“전시 상황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찡긋하고 웃어 보였다.

“능력이 있다고 믿고 집중해라.”

보연 씨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내 능력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그냥 믿고 싶은 대로 보아버린 것이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지워내려 애썼다.

“믿는 거야. 믿어 난.”

집중을 했다. 우선 급한 건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었다. 당장의 미래였다.

“제일 가까운 위험요소만 알 수 있다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위험할 일이 있다면 알려줘.’

그때 영화관 영상기의 빛처럼 점점 나의 머릿속에 영상들이 빛처럼 비추어졌다. 영상 속에 난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서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마치 미래의 내가 미래를 보는 지금의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처럼. 시간은 일주일 뒤의 한 숲속이었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가까운 숲 안으로 들어왔어.

그 말 또한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 순간 우리 앞에 아까 보았던 뱀파이어와 새로운 남자 뱀파이어가 나타났다. 어제 보았던 소미라는 뱀파이어가 말했다.

-그래. 누굴 죽일지 결정했어?

‘맞다.’

그들은 박로후와 나 둘 중의 한 명을 죽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내쉬고는 눈을 떴다. 숨이 진정되지 않았다.

“괜찮아? 무리한 거 아니야?”

보연 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에게 안겨서 체취를 들이마셨다. 보연 씨가 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그에게서 떨어져서 말했다.

“일주일 후에 그들이 또 올 거예요. 여기에서 가까운 숲으로 그들이 곧 부를 거예요.”

박로후가 물었다.

“그들이 우릴 공격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보지 못했어.”

보연 씨가 부드럽게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잘했어.”

“근데 봤어요. 그 여자 뱀파이어가 다른 남자 뱀파이어를 한 명 더 데리고 와요.”

박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연 씨한테 덤비기에 자기 혼자서는 진다는 걸 안 건지. 그러니까 한 명을 더 데리고 온 거야. 보연 씨, 뱀파이어 둘 상대 가능해요?”

보연 씨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서 달라. 우린 오래된 뱀파이어일수록 힘이 강해. 그리고 힘을 컨트롤하는 스킬도 그 세월 동안 익힐 수 있지. 하지만 나만큼 오래된 뱀파이어라면 예전에 내가 살필 만큼 살폈어. 남자의 모습이 어때? 머리카락의 길이는?”

‘머리가 기냐고?’

이 순간에 그건 왜 물어보나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대답했다.

“머리는 짧아요. 음… 마치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잘랐더라고요. 그리고 키는 컸어요. 180은 넘은 것 같고….”

나의 말을 자르고 보연 씨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행이야.”

“왜죠?”

“우리를 속이려고 일부러 자르고 온 거일 수도 있지만, 저들은 우선 너의 능력을 모르니까 널 속일 이유는 없어. 나처럼 오래된 뱀파이어라면 머리가 길었을 거야. 우리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이 머리를 자르는 건 자식 된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아… 그래서 보연 씨의 머리가 긴 거였어요?”

박로후가 보연 씨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보연 씨가 박로후의 손을 쳐냈다.

“무슨 짓이야?”

“뱀파이어가 된 직후의 모습을 유지하는 거죠? 머리카락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래.”

“하지만 그가 매번 머리카락을 자른다면요?”

“나처럼 사람들 속에 살아가는 뱀파이어는 드물어. 나를 공격 타깃으로 잡았다면 나와 반하는 성향일 확률이 높아. 적어도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뱀파이어들일 거야. 누굴까? 그리고 나에게 다가온 적이 있었다?”

보연 씨가 손가락으로 소파 가죽을 톡톡 두드렸다. 박로후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제 생각을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보연 씨에게 관심이 상당한 집단이네요. 그쪽은 우리를 최근에 연달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보연 씨 같은 정보망이 있는 뱀파이어도 그들이 누군지 세세히 다 알지는 못하죠. 그들은 숨어 지내지만, 보연 씨를 특히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렇지.”

내 머릿속에는 그 영상들과 그들의 말이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