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베르크 제국으로

이후 델루스 공국과 에리나와의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델루스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있었을 뿐더러, 공증인이 정령왕과 베르크 제국의 황제이니 훗날에 대한 대비도 완벽했다.

“공주님, 그리고 불칸 코라이거 백작은 공국 민들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처벌하기로 했습니다.”

계약에 대한 마지막 조항 점검을 끝내며 대공이 말했다.

“불칸은 다이아 광산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더 이상 마력을 쓸 수 없게 된 불칸은 이후로 더는 패악을 부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안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만 보면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다. 불칸이 보내진 곳은 자신이 노예처럼 부리던 자들이 고생하고 죽어가던 바로 그 광산이었다. 그 안에서도 가장 깊고 위험한 곳에서 그가 지은 죄를 갚으며 그렇게 살다 갈 것을 많은 공국 민들이 원했다.

공작의 말에 에리나는 공작이 공국 민들을 생각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결정입니다.”

평민에게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귀족의 지위를 우선으로 고려했다면 연금이나 추방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귀족의 체면보다 확실한 벌을, 그것도 공국 민의 의견을 들어주는 방향을 선택했다.

에리나는 밝게 웃으며 공작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델루스의 발전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동맹국으로서.”

“저희 델루스는 언제나 에리나 님께 힘이 되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대공과 에리나가 손을 맞잡자 델루스의 귀족, 평민 너 나 할 것 없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종족간의 연합… 거기에 힘의 나눔이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든은 생소하지만 벅차오르는 광경에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처음 에리나가 루스 공국의 노예를 도울 것이라고 했던 일에 부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권을 먼저 생각한다. 특히 자신과 같은 귀족들은 더욱 그랬다. 철저한 약자의 위치가 되어본 후에야 이든은 깨달음을 얻었다. 귀족 사회에서도, 나라 간에도 마력이 없으면 도태 당했고 누구나 약자가 그리고 노예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이 믿었던 작은 세상에 갇혀 외면했던 비정한 현실이, 더 이상 다른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아시리아 대륙에는 이미 귀족과 평민 할 것 없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계약을 마무리한 에리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델루스를 떠날 수 있었다.

“오리에드 님,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다시 봐요.”

“이 정도 일은 별것 아니다.”

오리에드는 팔짱을 끼며 잘난 체 하면서도 기분 좋게 달아오른 볼은 숨기지 못했다. 에리나는 그의 작은 손과도 악수를 나눈 후 카이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문밖으로 향했다.

“공주님, 조심히 가십시오!”

“언젠가 다시 길드에서 뵙겠습니다!”

이든의 씩씩한 외침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은 그렇게 베르크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에리나 일행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트로웰 자작이 공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하, 에리나 님께 드릴 선물은 마차에 잘 실어두었습니다.”

“잘했네, 자작. 공주님께서 한사코 사양하셨지만 그냥 보내드리기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게 에리나 모르게 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마차는 이내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델루스에서 베르크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루스 공국을 방문하기 전, 카이저가 엘레스트라를 이끌고 왔던 길이라 그런지 올 때 이용했던 길보다는 길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우거진 나무와 고르지 못한 길은 마차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엉덩이 통증을 유발했다.

“공주님, 괜찮으신가요?”

테이아가 계속 아파하는 에리나를 걱정하며 물어왔다.

“난 괜찮아요, 테이아. 그보다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 의미 깊은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저희 종족조차 잊고 있던 고향을 떠올리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리나가 델루스의 백작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테이아는 카이저의 명으로 델루스의 어딘가 있다고 전해지던 어둠의 종족의 옛 터전에 대한 조사 임무를 수행했다.

“뭔가 발견한 게 있나요?”

에리나는 엉덩이가 아파서 문지르던 것도 잊고 테이아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쉽지만…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테이아는 슬픈 음성으로 답했다.

“그랬군요….”

에리나는 그저 테이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7개의 종족 중에서도 어둠의 종족은 유일하게 특정한 거처가 없어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 고대에 그들은 빛의 신의 권속이었고, 베르크의 초대 황제 이후 현재까지 불의 종족에게 몸을 의탁했다.

어떠한 경위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했다. 그 수도 적을뿐더러 어둠의 종족은 오랜 시간 동안 대륙의 역사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행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카데미의 마탑에서 발견한 고서에는 어둠의 종족의 거처에 대해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 기록되어있었다.

<숲의 바람이 닿는 빛나는 광산과 드래곤이 있는 땅>

그것을 토대로 에리나는 버려진 자들의 마을에서 테이아와 에릭의 아버지이자, 전 베르크 제국의 그림자 수장이었던 케인 로하네스와 상의한 적이 있었다. 에리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 종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케인은 슬픈 눈빛으로 그렇게 운을 뗐었다.

“드래곤이 있는 땅이 저희의 고향이라고요. 하지만 드래곤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이지 않습니까….”

단 한 번도 자신의 나라를 갖지 못했던 종족의 아픔이 느껴졌던 묵직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실제로 드래곤은 존재했고 고서가 가리키는 숲의 바람이 지금의 금지된 숲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고향이 델루스 공국 근처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니….’

그러나 포기하기엔 너무 빨랐다.

“이번에 테이아 혼자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둠의 마법을 감지하는 능력은 테이아가 제일인 건 알고 있지만 다음에는 꼭 함께해요, 우리.”

“네, 공주님…!”

테이아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리고 테이아, 베르크에 테이아를 기다리는 손님이 도착했다고 하네요.”

에리나는 테이아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 마차에 오르기 전 카이저에게 들었던 것을 화제로 꺼냈다. 케인은 루스 공국에서 브렌체스토 공작의 잔당 카스트조직 소탕을 마무리하고 제국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네….”

사실 테이아는 아주 어릴 때 헤어져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심경이 복잡한 상태였다. 이전까지는 그저 임무 때문에 자신들과 어머니를 버려둔 모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고, 종족을 한계까지 내몰게 한 사람이란 원망만 가득했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소식을 전해왔을 때, 안타까움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에리나는 테이아의 불안함을 눈치 채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주었다.

“제가 케인 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고 있어요.”

버려진 자들의 마을에 있을 때 케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에리나를 찾아와 테이아에 대해 물었었다. 당시 아들인 에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테이아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었지만, 아들과 딸의 사진이 담긴 목걸이를 하염없이 쓰다듬는 그의 모습에서 에리나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

“가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요.”

“…….”

“테이아와 에릭 경의 갓난아기 때 사진을 질리도록 보았답니다.”

테이아는 감정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도 그랬고, 작은 것부터 큰일까지 뭐하나 감정을 제대로 내비친 적이 없었다. 동생이 공작에게 생명을 담보로 끔찍한 일들을 해야 했을 때도 자신은 눈물조차 용서받지 못할 무능한 존재였기에 감정을 억눌렀다. 그랬던 그녀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에리나는 그렇게 소리 없는 울음을 옆에서 지키며 머나먼 길을 돌아온 이 가족이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랐다.

**

‘불의 신, 아그니스라….’

그동안 땅의 종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카이저였지만, 오리에드와의 만남 이후로 그는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리에드는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불의 신 아그니스라고 불렀다.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그는 자신의 눈이 틀릴 리 없다는 말만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영혼에 새겨진 저주.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속박이었다. 에리나는 불의 신과 숲의 여신, 그리고 대지의 여신 사이에 있던 일 때문에 신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고 했다. 카이저는 며칠 전 에리나가 오리에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오리에드 님, 계속 작은 몸으로 계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오리에드의 몸이 일반적인 정령왕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자 에리나가 그의 몸을 걱정하며 물었었다.

“응 괜찮아. 사실 이유라면 확실해. 대지의 여신이 사라진 후에 나도 깊은 잠에 들었거든. 원래 신이 소멸하면 대지에 그 마력이 남아 후대에 전해지지. 그런데 대지의 여신이 남긴 마력이 없어. 그래서 땅의 종족들도 저 모양일 수밖에.”

짧은 대화였지만 정령왕의 말에서 다양한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카이저는 대지의 여신을 생각할 때마다 불쾌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아직 대지의 여신이 이 땅에 있을지도 모르겠군.’

카이저에게 있어 대지의 여신은 에리나에게 신탁이라는 시련을 안겨준 적일 뿐이었다. 그는 반려의 각인에서 전해지는 슬픔의 파동을 느끼곤 자신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무엇이 되었건, 에리나를 지키고 사랑할 뿐이다.’

그렇게 카이저는 한결같이 에리나가 타고 있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

어느덧 일행의 눈앞에 베르크의 거대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리나, 베르크다.”

카이저의 음성에 에리나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봄으로 접어든지 좀되었지만 공기에서는 아직까지 찬 기운이 느껴졌다. 콘라드가 미리 긴팔 옷을 챙겨둔 덕분에 대륙의 북부에 위치한 이곳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에리나. 춥지는 않은가?”

카이저의 부름에 거대한 성문을 구경하던 에리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음에도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미모를 자랑중인 카이저로 인해 에리나는 새삼 속으로 감탄했다.

“우리 늑대 님… 정말 잘생겼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에리나야말로 아름다워.”

갑자기 귀에 꽂히는 카이저의 달달한 목소리가 에리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응? 아, 이런!”

쾅. 에리나는 당황함에 마차 문을 쾅 닫고 커튼을 쳐버렸다.

“에리나?”

영문을 모르는 카이저는 갑자기 숨어버린 에리나를 보고자 끈질기게 불러댔다.

“에리나? 보고 싶으니 창문을 열어줘.”

“하… 나 정말 왜 이러지.”

에리나는 카이저의 말을 애써 못들은 척했다. 지금은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일행 사이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것 같았다. 그런 에리나에게 테이아가 다가와 조용히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공주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에리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테이아를 보자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 분은 서로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걸요.”

“…….”

자신이 했던 응원의 말을 그대로 돌려받으며, 에리나는 결국 타오르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

똑똑

“공주님! 이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벨리타의 목소리가 마차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에리나는 어쩔 수 없이 커튼을 살짝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건….”

거대한 베르크의 성문 위로 아델라이드의 국기 수십 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공주님, 저희를 환영하는 식이 준비 돼있는 것 같습니다.”

에리나는 진심으로 밀려오는 감동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군.”

카이저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물들일 때쯤, 성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앞에서부터 왕궁의 이르는 길에 베르크의 온 국민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대단해….”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본 것은 에리나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아델라이드, 아카데미, 루스 공국, 델루스 공국 같은 규모가 작은 곳만 봐왔던 에리나에게 베르크의 첫인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기심을 빛내는 에리나의 반응에 마음이 놓였는지 카이저는 에리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에리나, 마차에서 내려 나와 함께 말을 타는 것이 어떠한가?”

흥분으로 가득한 제국 민들의 모습에 망설였던 에리나는, 자신보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카이저를 보자 순간 그의 바람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응 그럴게, 카이저.”

카이저는 크게 반기며 당장에 명령을 내렸다.

“행렬을 멈춰라!”

그의 위엄 있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거리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카이저는 말에서 내려 에리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마차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