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가까워지는 거리

“드디어 도착이군요!”

아카데미의 거대한 정문을 앞에 두고 다니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사모 회원들과 카이저 일행 모두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긴장되는 걸….”

에리나는 아카데미 경연대회 과정 중 겪었던 모든 일들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에리나 자신이 변한 모습에 아카데미 동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에리나, 너는 그저 있는 그대로만 하면 된다.”

에리나의 불안을 눈치 챈 것인지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카이저가 따스한 한마디를 건넸다.

“아닌가, 로브로 좀 가릴까? 그대는 너무 아름다워 눈에 띈다. 내 품 안에 안겨 가면 더 좋고.”

카이저는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거니 하는 눈빛으로 에리나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에리나가 공작과의 살기등등한 시간을 보낸 이후로, 카이저는 이제 아예 드러내놓고 에리나를 걱정하며 그녀만을 바라봤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는 광경에 바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폐하… 에리나 님이 아주 뚫어질 것 같습니다. 그만 좀 하시지….’

콘라드는 자신의 생각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지금 카이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갓 사랑에 눈을 뜬, 한 여자를 사랑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 같았다.

에리나에게 때 되면 식사며 옷이며 직접 챙겨주는 것하며, 크림이만 보면 으르렁대는 것이 꼭 주인의 애정을 받으려 질투하는 애완동물처럼 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베르크 제국의 냉혹한 황제는 어디 간 것인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것이 있다면 다른 이의 눈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참 한결같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보다 못한 모네타가 지나가듯 불만을 토로했지만 소용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히이잉. 그때,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하델리히가 카이저와 에리나 사이를 가로막으며 등장했다. 더 이상 로브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 드러난 수려한 연둣빛의 곧은 눈이 카이저를 매섭게 응시했다.

“공주님께서 곤란해 하시니 이쯤 하시지요. 보기 불쾌하군요.”

“죽고 싶은 것인가.”

카이저의 주변이 순식간에 살기로 들어찼다. 하델리히 또한 지지 않고 에리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호하는 태도를 취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대륙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기 싸움에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에리나는 그들의 모습에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저, 걱정 고마워. 나는 정말 괜찮아. 하델리히 님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감히 거역할 생각조차 들지 못하게 하는 에리나의 아름다운 미소에 두 사람이 잠시 또 멍해졌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카이저였다.

“에리나….”

“알겠습니다, 에리나 님.”

하델리히는 카이저의 말을 가로채며 밝은 낯으로 마주 웃어주었다. 그런 하델리히를 보며 카이저는 또 순식간에 살기등등해져 버려 주변을 움찔하게 했다.

에리나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레토와 그녀의 품에 안긴 크림이는 카이저를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네, 어서 들어가요 하델리히 님.”

에리나는 모른 척 서둘러 앞서 말을 몰았다.

‘정말이지, 카이저 예전에는 어떻게 참았던 거야… 요즘 들어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에리나는 카이저의 날것의 숨결이 닿아 달아 올라버린 얼굴을 살며시 문지르며 생각했다. 사실 아카데미로 오는 길 내내, 다른 이들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안 보이는 사각 지대에 들어오면 카이저는 그녀에게 쉼 없이 뽀뽀를 날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이저의 매혹적인 시선과 애정 공세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에리나의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런 맹목적인 애정과 신뢰라니… 되돌려 주고 싶은데 너무 떨려… 어떡하지.’

에리나는 자신의 외면에 순식간에 풀이 죽어 멀리 떨어지는 카이저를 보며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든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이리스와 에코 자매가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우리 공주님, 역시 인기가 너무 많으신 것 같아 언니!”

에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니, 아무래도 우리 공주님… 폐하께 마음이 있는 것 같지?”

에코의 말에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이 싫다고 하신 적은 없긴 하지….”

아이리스는 그렇게 말한 후 에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하델리히를 바라보았다.

“나는 하델리히 님도 공주님이 마음 곁을 주신 분이라고 생각해. 다정하시고 무엇보다 같은 숲의 종족의 후작 가이기도 하고….”

“맞아, 언니! 하델리히 님과 함께 계실 때면 좋아하시는 연구도 그렇고 편해 보이셔.”

“흐음….”

아이리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걸 보며 에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언니. 공주님께서도 잠시 동안 만이라도 마음껏 쉬셨으면 좋겠다.”

에코의 말에 아이리스가 마주보며 웃음 지었다.

“맞아, 최근에 생과 사를 오가느라 감정을 느끼실 여력도 없으셨을 거야. 우리가 계기를 만들어 드리자.”

“어떻게?”

에코의 말에 아이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벨리타 님이 다 계획해둔 것이 있으시다고 하셨어. 아카데미의 큰 행사라고 하셨는데….”

아이리스의 말에 에코의 동그란 눈이 반짝거렸다.

“물론! 우리 공주님이 한참 아깝긴 하지만 쓸데없는 잔챙이들이 함부로 들러붙지 못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매의 비밀스러운 수다 뒤로 아카데미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아카데미의 거대한 정문이 열리고, 일행은 성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와아아아아!”

난데없이 이들의 머리 위로 다채로운 꽃잎이 날림과 함께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 이게 다… 뭘까요?”

모네타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카데미의 온 학생들과 심지어 수장들까지 나와 이들의 복귀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리나 님! 아카데미의! 대륙의 영웅!”

“꺄악, 사랑해요. 다니엘 님!”

“모네타 님! 존경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일행은 멍해지고 말았다. 이 광경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카이저 한 명뿐이었다.

**

이들이 아카데미에 당도하기 며칠 전, 카이저는 베르크의 수상 페레그린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보내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공작의 재판을 준비할 것.’

페레그린은 카이저가 보내온 것들을 흥미진진하게 검토해보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럴 수가! 역시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남다르신 분이셔!”

그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으며 집무실에 한가득 자료를 펼쳐놓고 이리저리 구상을 시작했다.

“미래의 황후 폐하를 대륙에 소개할 때가 왔군요, 폐하.”

음흉하게 웃으며 구상을 끝낸 페레그린이 부관을 호출했다.

“베르크 제국의 전 신문사 기자들을 불러라. 지금 당장.”

“예?”

부관이 당황하여 수상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전 신문사라니… 무슨 큰일이라도….’

제국의 기자들을 불러 모은 것은 1년여 전, 카이저가 베크르 제국의 황위를 돌려받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페레그린은 냉철한 수상의 모습으로 부관에게 다시 명령했다.

“폐하의 명이시다.”

“예, 예!”

정신을 차린 부관은 재빨리 명령을 수행하러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부관이 나간 후, 페레그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

에리나 일행은 거창한 환영행렬을 뚫고, 수장들 앞에 다다라서야 자신들이 이렇게 환영받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에리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에르! 아, 이제 아니죠. 에리나 윈드 아델라이드 공주님. 아카데미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신분도 계급도 모두가 평등한 아카데미 내에서 수장의 이런 행동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수장님!”

에리나는 서둘러 말에서 내려 그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복귀가 늦었습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에리나의 당혹스러운 얼굴에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경연대회의 활약은 수장님들과 함께 영상 구를 통해 잘 보았습니다. 기사로도 소식을 읽었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고생에 대한 축하를 해드리고 싶어 수장님,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의견을 모았습니다.”

“기, 기사라니요?”

크리스토퍼의 말에 다른 수장들에게 인사를 받고 있던 일행까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앞으로가 바쁘겠군요.”

크리스토퍼가 에리나의 뒤편에 있는 호송 마차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봉쇄마법이 걸린 세 개의 마차 안에는 아리아 영애과 공작, 그리고 비크람을 포함한 공작의 수하들이 타고 있었다.

공작의 호송마차 곁에는 세실 브렌체스토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공작이 잡혀 온 직후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공작의 마차 곁을 지킬 뿐이었다.

“모이라이 궁에서 아카데미 경연대회의 활약을 축하하는 연회가 준비되어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마차와 세실을 보던 눈길을 거두고 일행을 향해 말했다.

“너무 과분합니다, 수장님.”

에리나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경연대회 중간에 노예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아카데미의 대부분이 중도 포기했습니다, 에리나 님 일행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요.”

크리스토퍼의 말에 군사부와 신학 부의 수장이 말을 보탰다.

“이번 경연대회가 무의미해져 유명무실해질 뻔했지!”

“무엇보다 대륙을 뒤흔들 역사적인 사건이니까요….”

에리나는 금안을 가진 신학 부의 수장과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신학 부의 수장은 에리나의 모습을 살펴보며 다소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모두에게도 공주님에 대한 진실… 이라고 해야 하나요.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자리도 필요하니까요.”

이때, 군사부 수장 해럴드가 신학 부 수장의 앞으로 나서며 호쾌하며 말했다.

“이럴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 먼저 쉬십시오! 이번 경연대회의 우승자나 다름없으니 우승 기념 만찬이라고 봐도 좋겠군요!!! 하하하“

**

서둘러 아카데미 내부로 들어온 일행은, 곧바로 에사모 회의실에 모여 크리스토퍼가 언급한 기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곳곳에 기사들이 널려있는 데다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 수많은 학생들의 찬사와 더불어 신문들을 건네받았기에 찾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브렌체스토 공작의 추악한 민낯! 그간 외면해왔던 노예제도의 실체!’

‘기적을 행한 아델라이드의 공주! 노예들의 희망!’

‘물의 종족과 베르크 제국 민 간의 분쟁, 아델라이드 공주의 등장으로 소강상태에 들어서다.’

에리나 일행의 활약덕분에 귀족이나 평민까지도 부당한 방법으로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노예제도 폐지의 필요성이 전면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에리나 님! 저희 아버님이 제게 서신을 주셨습니다. 제피로스 왕국 또한 연일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으로 들썩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니엘이 자신의 아버지인 갈리마르 백작이 보낸 서신을 들고 격양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의 희생양으로, 종족을 가리지 않고 노예의 치욕을 경험한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단숨에 기사들을 모두 분석해낸 모네타가 뒤이어 목소리를 냈다.

“신성제국은… 참 발 빠르군요.”

에리나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신성제국에 대한 기사를 보며 말했다.

“의외입니다. 아니,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요.”

테이아 또한 에리나의 말에 동의했다. 신성제국 라우르는 대지의 여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그동안 묵과해 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아시리아 대륙의 나라 중 가장 먼저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아론 황태자가 힘을 쓴 것일까요?”

다니엘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아론은 루스 공국의 카지노 붕괴 이후 간단한 전언만을 남겨두고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글쎄, 그건 두고 보아야 알겠지.”

에리나는 아론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

“유능해.”

카이저가 에리나의 소식들로 가득한 전 대륙의 신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에 관한 기사가 연일 대서특필 되고 있었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베르크 제국의 모든 신문사에서 그녀에 대한 소식을 먼저 보도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컸다.

‘베르크 제국이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

만족스럽게 신문들을 읽던 카이저의 미간이 신문의 어느 한 곳을 보고 크게 빗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신문사지? 감히 에리나의 얼굴을 올리다니.”

에리나의 사진이 유명한 주요 신문사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루스 공국에서 머물렀던 호텔에서 출발할 때 찍혔던 사진인 듯싶었다. 카이저는 자신조차 보기 아까운 에리나의 사진이 이렇듯 신문으로 기재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