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미친놈

‘쪼… 쪼옥? 지금 내가 들은 게 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타오르는 듯한 이 남자는, 뭐라 할 새도 없이 그녀를 호수의 풀숲 위에 눕히고는 그대로 깊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도대체 이 미친 늑대… 아, 아니 이 미친놈은 뭐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이 닿기 전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장한 남자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 입은 늑대였기에 입술을 파고드는 달짝지근한 체취가 정말 현실인지 판단을 흐릿하게 했다. 강렬한 위압감이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얇은 슈미즈 한 장만 걸친 그녀의 몸에 와 닿는 남자의 맨살은 뜨거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늑대? 아니, 인간?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마법은 없을 텐데…!’

그녀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것인지, 입맞춤은 점점 더 진해졌다.

덕분에 에리나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다.

‘다 죽어가는 늑대 한 마리 살려줬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첫키스를…!’

‘촉’하는 진득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에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하아, 어어, 늑대야! 이봐요? 읍…!”

간신히 숨을 뱉을 때를 빼놓고 이 남자는 도통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호흡이 가빠왔다.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던 녀석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의 새빨간 놈은 다리와 팔로 에리나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도 막고 있었다.

‘이 마력은 도대체….’

이 와중에 남자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에 황홀함을 느끼는 것을 깨달은 에리나는 더욱 당황하여 몸을 굳혀버렸다.

“하아….”

남자가 내뱉는 뜨거운 바람이 입술 위로 느껴졌다. 크고 넓은 그의 몸 전체가 그릉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신…!”

드디어 에리나의 목소리가 닿은 것인지 이전까지 입술만을 탐하던 미친놈은 서서히 에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너머로 불꽃에 잠긴 듯한 적안이 오롯이 그녀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에리나는 데일 것 같은 시선을 애써 피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려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남자의 입술이 그녀가 고개를 돌린 덕분에 더욱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버린 에리나의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읏!”

태어나 처음 느끼는 이질적인 감각에 놀란 에리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양팔로 있는 힘껏 남자의 머리를 잡고 밀어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절할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쪼옥. 목 부근에 작열감이 터지며 순식간에 에리나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만해!”

에리나의 격렬한 발버둥에 남자의 입술이 간신히 떼어졌다.

“너는… 누구냐.”

‘지금 이게 입술부터 부딪혀온 사람이 할 말인가?’

에리나는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 백성들과 어울리며 쓰던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이 미친놈아!”

“…미친놈?”

에리나의 말을 서늘하게 따라 읊조리다 말고 슬며시 그린 듯한 웃음을 짓는 이 남자가, 에리나는 이제 정말 무서워졌다.

“당, 당장 떨어져!…요!”

이곳은 에리나의 기사들이 오지 못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남자의 흉흉한 기세에 저절로 말끝이 공손해졌다. 남자는 집요함이 담긴 붉은 눈으로 에리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다,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싫은데.”

“뭐 이런 미…! 헙.”

에리나는 또 한 번 미친놈 소리가 나오려던 입을 다물고 전신에서 지독한 섹시함을 내뿜는 남자를 무시하려 노력하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수호 영혼을 있는 힘껏 외쳐 불렀다.

“세리파!”

순식간에 공중에 나타난 하얀 말의 영혼인 세리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풀숲 위에 누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세리파! 기절시켜!”

인간에게 해로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세리파는, 에리나의 외침에 앞발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반사적으로 위쪽으로 눈을 돌리려던 남자는 세리파의 앞발에 머리를 정확히 가격당하고 힘없이 픽, 하고 쓰러졌다.

“후우….”

에리나는 그녀의 위에 쓰러진 남자를 낑낑대며 밀어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세리파는 남자를 기절시킨 반동 때문인지 힘없이 고개를 휘젓고 있었다.

“미안해 세리파…. 수호 영혼인 너에게 이런 일을 시켜서 부담되었지? 왜 내가 직접 마법을 쓸 생각을 못 했을까?”

세리파는 상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치유까지 하는 엄청난 능력이 있지만, 인간의 신체에 해가 되는 일을 하면 그 반동으로 한동안 잘 움직이지 못했다. 당황해서 세리파에게 험한 일을 시키고 말았다.

에리나는 나체 상태인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 끝자락만을 바라보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키스를 왜 한 거람? 사람이야 늑대야? 그냥…. 변태인가?”

“후우…. 왜 이리 더운 거지?”

에리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 부채질을 했다.

“세리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뭘까?”

세리파는 그저 남자를 기절시킨 자신의 앞발을 보며 힘이 든 듯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 남자를 이제 어떻게 한다. 경비대에 던져줄 수도 없고… 외부인을 보면 어머니가 한바탕 폭풍을 일으키실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에리나는 여전히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님프를 소환했다.

“님프!”

휘파람 소리와 함께 초록의 머리를 가진 귀여운 숲의 정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에리나는 아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채 님프에게 부탁했다.

“님프! 이 사람을 금지된 숲 바깥의 안전한 곳으로 놓아 주고 와줘. 그리고… 옷 좀 구해다 입혀줘, 부탁해.”

님프는 알아들은 듯 작게 날갯짓을 하더니 곧 마법으로 남자의 몸을 띄우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나저나 내 첫 키스! 하아… 곱게 보내주지 말 걸 그랬나.”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던 에리나는 이내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아니야… 그 정도로 영혼에 상처가 있었던 사람인데. 앞으로 얼마 못 살 거야. 잊자, 잊어!”

에리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남자의 타오르는 강렬한 시선과 붉은 입술을 잊으려 애쓰며 신의 호수를 벗어나 왕궁으로 향했다.

**

한 시간 전.

늦은 밤, 에리나는 평소처럼 왕궁에 기사들을 두고 신의 호수에 홀로 나왔다.

“하아… 살 것 같아! 정말 언제와도 기분 좋은 곳이야.”

신의 호수는 왕궁의 서쪽 성문 밖에 있는 금지된 숲속에 있는 곳이다. 왕성의 결계 밖에 있는 곳이긴 하지만, 금지된 숲은 그녀의 종족이 만들어낸 마물들이 지키고 있어 지난 20여 년간 다른 인간 종족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특히나 에리나에게는 수호 영혼인 세리파가 있어 어머니인 여왕도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이곳 신의 호수는 숲의 마력이 너무 강하여 보통의 인간은 접근하자마자 정신을 잃었고, 숲의 종족이라 할지라도 왕족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보름에 한 번 신의 호수를 찾았다. 공주의 업무에서 벗어나 에리나만의 시간을 갖는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분명 청명한 기운만이 있어야 하는 곳에 무언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음… 평소의 기운과는 좀 다른걸. 더워진 것도 같고… 어머니가 다녀가셨나?”

그러나 그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곳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에리나는 드레스를 벗고 가벼운 슈미즈로 갈아입었다.

‘스르륵….’

얇고 새하얀 슈미즈를 입은 에리나의 모습이 곧이어 호숫가에 나타났다. 그녀의 하얀 몸이 호수의 물빛에 반사된 달빛에 더욱 빛나 보였다.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인데 뭐 어떠랴. 지난 20년간 이곳은 그녀를 위한 하나뿐인 쉼터였다. 에리나는 들뜬 마음으로 신의 호수 한가운데로 헤엄쳐 나갔다.

“세리파~!”

그녀의 부름에 수호 영혼 세리파가 호수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세리파도 같이 놀자. 그동안 답답했지?”

세리파는 불, 물, 대지, 바람, 빛, 어둠, 숲의 일곱 종족의 삶의 터전인 아시리아 대륙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대지의 여신의 사자이자 에리나의 수호 영혼이다.

그 중 에리나의 종족인 숲의 종족은 마법 중 숲 계열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는 종족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마력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세리파와 같은 영혼과 소통하는 능력은 현재 대륙에서 에리나만이 가진 이능이었다.

눈동자와 몸 전체가 새하얀 세리파는 에리나가 태어날 때 신탁과 함께 나타났다.

“어머니는 나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 하셨지….”

하지만 신탁의 등장과 뒤이은 에리나의 탄생으로 인해 그녀의 모국인 아델라이드가 입은 피해는 무척이나 컸다. 그녀에게 세리파와 함께 내려온 내린 신의 계시란 이런 것이었다.

‘금빛별이 숲에 내리고 대륙이 붉게 물드는 날. 모든 것의 시작으로 돌아가리라.’

이 신탁을 대지의 여신을 받드는 신성제국에서는 불길하게 받아들였다. 곧 에리나의 존재가 대륙을 피로 물들게 하고 전 국가를 멸망하게 한다는 것.

이 신탁의 해석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시리아 대륙은 들끓었다. 많은 국가들이 이 신탁을 두고 에리나를 데려가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이는 곧 숲의 종족의 국가인 아델라이드 침공으로 이어졌다. 탐욕에 물든 나라들의 협공 앞에, 결국 마법 강대국이었던 아델라이드는 고립되어 오래 버티지 못했다.

멸망의 위기 앞에, 당시 아델라이드의 국왕이었던 에리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써서 숲의 종족을 금지된 숲의 깊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강력한 결계를 쳤다. 이 때문에 숲의 종족은 아시리아 대륙의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찬란했던 숲의 종족의 나라 아델라이드 왕국은 20여 년 전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아….”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델라이드 왕국이 몸을 숨긴 금지된 숲의 마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력이 줄어드는 것은 숲의 종족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숲의 종족은 영원의 반려를 찾기 전까지는 숲에서 나오는 마력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숲의 마력이 줄어드는 지금, 그녀의 나라는 멸망의 위기 앞에 놓여있었다.

“이제 나라를 위해 움직일 때가 되었어. 대륙의 왕족과 수많은 인재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이자 고대의 마법이 남아있는 아델라이드의 옛 왕궁. 그곳으로 가서 우리 왕국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을 거야. 세리파, 나와 꼭 함께해 줄 거지?”

에리나는 호수 한가운데서 세리파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세리파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그때, 에리나는 문득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압박에, 에리나는 숨을 들이켜고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리나의 눈길이 닿은 끝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

카이저는 에메랄드 보석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슴께에서 찰랑거리며 그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여신이란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금빛의 눈동자는 호수 위의 하얀 말과 함께 맑은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금빛의 눈동자… 신성력을 가진 자인가? 게다가 저 말은 마력으로 소환할 수 있는 류가 아니군.’

대륙에서 금빛의 눈동자는 신성력을 지닌 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먼 옛날, 신의 노여움을 사기 전 베르크 제국의 황가가 가지고 있던 눈동자 색이기도 했다. 눈앞의 여인은 신성제국 라우르의 빛의 종족이 가진 특성보다도 이제는 자취를 감춘 숲의 종족의 색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만일 숲의 종족이라면… 탐욕스러운 나라들이 또 한 번 야욕을 드러내겠군.’

우연히 흘러들어온 금지된 숲이 숨겨져 있던 숲의 왕국 아델라이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현재 대륙의 패권은 베르크가 쥐고 있으나 남쪽의 신성제국 라우르와 서쪽 바람 종족의 제피로스 왕국이 언제나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세력이 약한 물의 종족의 루스 공국과 땅의 종족의 델루스 공국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델라이드의 힘은 대륙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줄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카이저는 자신의 정체가 숲의 종족에게 들통 날 시 미칠 파급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지금 자신은 상처를 입은 붉은 늑대의 모습일 뿐이란 것이었다.

‘마력을 봉인하는 마법석이라, 골치 아프군.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버렸어.’

마력이 고갈되면 나타나는 이 모습은, 그의 뿌리인 불의 종족이 신의 분노를 산 증거 중 하나였다.

전 마법 대륙을 제패한 베르크 제국의 초대 황제는 냉혹한 성정으로 대륙 위의 모든 생명을 거침없이 도륙해나갔다. 강대한 불의 마력으로 모든 것을 불태웠고 수십의 나라가 스러져 갔다.

대지의 여신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불의 종족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저주를 내렸다. 여신의 저주를 받았을 때, 그들의 영혼은 견디지 못하고 찢겨져 나갔다. 그리고 여신은 불의 종족이 마력이 고갈되었을 때, 짐승의 모습으로 바뀌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