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동상이몽

이놈의 지겨운 명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루 전부터 집안은 복작거렸다. 제사를 명분으로 찾아오는 인척들을 맞는 일이 너무도 귀찮았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정호는 별수 없이 벌을 서듯 손님맞이를 했다. 해월이 종친들에게 인심을 얻으려고 추석 봉송(封送)을 거하게 보내는 바람에 명절이면 집안이 장터를 방불케 했다. 차례를 지내자마자 정호는 집을 박차고 나왔다. 손님 배웅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술 한 병을 들고 찾은 곳이 작고하신 선친의 묘소도 아닌 북촌의 유화가 살던 집이었다. 집주인이 있었을 때도 겨우 일 년에 세 번 오면 많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빈집이 되고부터는 한 번도 발걸음을 안 하던 곳인데 며칠 사이 벌써 두 번이나 찾아오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으니 쏟아지는 햇빛이 눈을 찔렀다.

“아버님! 어머님! 산소는 면목이 없어서 못 갑니다. 저를 보시면 벌떡 일어나서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으시겠지요. 저도 그렇게 얻어맞고 정신이 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주도 없이 벌써 술병이 반이나 비워졌다. 오늘 따라 햇살이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구름은 뭐하나. 빛을 좀 가려줄 것이지. 꼴도 보기 싫으니 얼른 넘어가거라.”

하지만 해는 중천에 그대로 걸려서 노려보듯이 정호를 비추고 있었다.

“너까지 나를 무시하냐?”

공연히 허공에 삿대질을 했다. 남들이 보면 별 미친놈을 다 본다고 할 것이다. 어느새 낮술이 올라 반쯤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덕삼이 다녀간 후 서둘러서 사람을 시켜서 집 정리를 했다. 마당의 풀도 뽑고 어린아이들 이갈이를 하듯이 빠져나간 담장의 벽돌 몇 장도 다시 끼워 넣었다. 유화와 송연이 정성스럽게 가꿨던 꽃밭은 잡초마저 없어 휑했다. 다행스럽게도 담장을 감고 올라간 능소화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줄기에 마지막 숨처럼 붙어있는 꽃 한 송이에 유화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꽃은 뭐 하러 그리 열심히 심나? 겨울이면 다 죽어서 없어질 것인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요. 내 손으로 직접 꽃송이를 피워 올렸다는 만족감도 있고요. 다음에 오실 때는 능소화 한 그루만 구해다 주세요. 꽃송이가 탐스럽고 얼마나 예쁜지 모른답니다.”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마음에 걸려서 비싼 술값을 지불하고 어렵게 구한 나무였다. 어린나무를 보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유화는 이듬해에 아주 탐스러운 꽃을 피워내는 데 성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유화에게 해 준 것이 없었다. 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여식에게는 더했다. 내가 왜 그리 모질게 굴었을까. 정호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주 오래전 일이 장마에 논바닥이 뒤집혀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정호는 태생 자체가 유약했다. 그런 아들이 욕심이 많은 부친에게는 평생 마음을 졸이게 하는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다. 역관들과 친하게 지냈던 부친은 뇌물을 바치고 그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돈이 되는 것은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몇 해 되지 않아 거부가 되었다. 바램처럼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된 것이다.

“돈이 양반보다 위에 있는 권력이다. 임금마저도 재력가는 무시하지 못한다. 한미했던 가문도 일으켜 세웠는데 내가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것이 자식 농사구나.”

부친은 많은 돈을 주고 성균관 유생 출신들을 독선생으로 붙여 정호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겨우 진사에 그친 자신과 달리 조정에 제대로 출사하는 관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용량이 작은 머리는 많은 지식을 담기에 한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과거시험은 번번이 미끄러졌다. 어떤 스승이 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겨우 일차 과거시험인 생원시를 통과했을 때 부친은 생각을 바꾸셨다. 아들이 안되니 총명하고 어진 며느리를 얻어 애써 모은 재산을 탕진하지 않도록 지키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졸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겨우 진사로 체면치레를 하고 소문마저 좋지 않은 집안에 여식을 선뜻 내주고 싶어 하는 명문가는 한 곳도 없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최 진사 댁의 고명딸인 유화에 관한 소문이었다.

“얼굴도 예쁘지만 바느질 솜씨가 아주 그만이에요. 오라비가 병약해서 약값을 마련하느라 모녀가 삯바느질을 하는 모양인데 일감을 주는 집마다 칭찬이 자자하다니까요. 천자문 정도는 떼어서 한자도 술술 읽고 언문은 말할 것도 없이 잘한답니다. 다리 한번 놓아 볼까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매파가 제 발로 찾아와 괜찮은 정보를 흘려주었다.

“내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지.”

그렇게 매파를 돌려보내고 부친은 직접 유화의 부친인 최 진사와 담판을 지었다. 자신보다 가족이 우선이었던 유화는 오라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혼례였다. 며느릿감이 흡족했던 부친은 혼인예물로 집을 한 채 마련해 주었다. 아들이 큰 실수를 저질러 마음 편히 본가에서 살 수 없음을 간파하고 취한 마음의 표시였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기는 했지만, 혼례 전까지는 모두 쉬쉬했다.

“내겐 이미 아이를 포태한 첩실이 있소. 하지만 그 사람은 그저 첩실에 불과할 뿐 우리 가문의 며느리는 아니요. 당연히 당신이 본처란 말이요.”

첫날밤이 지나고 처음 맞는 아침에 유화는 청천벽력 같은 고백을 들었다. 더 이상 숨길 자신이 없었던 정호가 잔인한 사실을 그대로 말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유화의 얼굴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나는 그런 놈이요. 파락호 같은 내게 속아서 혼인을 한 자신을 원망하시오. 첩실과 한집에서 사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소? 악다구니를 쓰고 굴러다니면서 세상을 산 여인이야 어찌 되었든 버티어 낼 수 있겠지만 곱게 자란 당신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요. 그래서 신방도 본가가 아닌 앞으로 당신이 살 집에 꾸민 것이요.”

너무도 엄청난 통보 앞에서 유화는 말문이 막혀 그저 정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남의 일 같았을 뿐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부모님께 아침 문안은 드리지 않아도 되오. 여기서 본가는 제법 먼 거리에 있소. 두 분 어른도 며느리에게 문안 인사를 받을 면목이 없으실 것이요.”

“그래도 오늘은 혼인을 하고 첫날이니 본가에 가서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올 수 없다고 직접 말씀을 올리고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유화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대도 고집을 피우는구먼.”

정호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유화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단장을 하고 기어이 따라나섰다. 차라리 마음에 차지 않으면 욕을 하고 할퀴려고 대드는 해월이 처럼 행패라도 부리면 좋으련만 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비수가 되어 정호의 양심을 찔렀다. 본가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일하던 하인들이 유화를 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을 향해 유화는 가벼운 목례와 옅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말 고우시네. 정갈하고 현숙하게 생긴 아씨가 어쩌다가….”

“집안이 어려워 이리되셨다잖아. 작은 아씨의 행패가 만만치 않을 것인데….”

“입조심해. 작은 아씨가 들으면 경을 칠 것이야.”

“작은 아씨는 무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 파는 기생이었는데. 우리보다 나을 것 없어. 돈이 많아도 결국 정실부인 자리는 따로 있잖아.”

숙덕숙덕하는 소리가 그대로 다 들려왔다. 유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체의 힘이 저절로 풀려 주저앉을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지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저 많은 시선 중 어딘가에서 자신을 노려볼 첩실이 의식되어서였다.

“우리가 네 절을 어찌 받겠느냐.”

이 진사 내외는 반듯이 앉아 있지도 못하고 모로 앉아 새 며느리의 첫인사를 받았다.

“매일 문안을 올려야 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알면서도 불효를 저지를 것 같습니다. 나무라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밥을 지어서 조반상을 올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첫날이니 그건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모친이 다가와 며느리의 손을 잡았다.

“아가야! 이일을 어쩌면 좋으냐….”

“모든 것이 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친을 모시고 유화는 부엌으로 향했다.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밥을 짓고 생선을 구웠다. 조물조물 나물을 무치고 시원한 소고기뭇국을 끓여서 한 상을 뚝딱 만들었다. 사랑채로 밥상을 들이고 숭늉까지 준비해둔 유화는 조용히 본가를 물러 나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본가 방문이었다. 유화가 방을 나가자마자 아버지의 목침이 정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날아온 목침이 이마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금새 얼굴을 적셨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박힌 혼례 후 첫째 날 아침이었다. 피를 줄줄 흘리며 정호가 별채로 들어갔다. 모든 사단을 지켜보고 있던 해월이 약통을 들고 다가왔다.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그대로 쳐냈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정호는 그대로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더 답답해.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며 싸울 수 있는 상대면 시원하겠는데 순순히 물러서 주면 재미가 없지. 내 서방이 나를 두고 다른 여인과 혼례를 올렸는데 마음이 편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어제 초례청을 뒤집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다 뱃속의 아이 때문에 참은 거야. 포태를 해서 배가 앞산마냥 나온 부인을 두고 새 여자를 맞은 네가 사람이 아닌 것이지.”

해월이 장신구가 더덕더덕 매달린 머리를 들이밀며 악을 썼다. 본처가 집에 온다고 하니 혹시라도 마주하면 지기 싫었던 모양인지 온갖 모양은 다 내고 있었다.

“내가 사람이 아닌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 없고. 짐승 같은 나랑 사는 너도 사람이 아닌 것이 맞고. 뱃속의 아이가 너를 살리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라. 아들 아니면 그날로 너는 쫓겨나는 거야. 잊지 말라고.”

“재주껏 해봐. 이 집에 먼저 들어온 것은 나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하물며 혼인이야 말해 뭐 하겠어.”

“우리가 혼인을 하긴 했니? 너 혼자 꿈에서 한 게 아니고?”

“혼인이 별거야? 함께 살 부비고 살면 그게 혼인이지. 나는 엄연히 이씨 집안 대문을 당당하게 넘어서 들어온 며느리야. 아버님도 내가 죽도록 싫으셨어 봐. 별채에 이대로 두시겠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해월은 뚫린 입이라고 정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앞으로 한 지아비를 모시면서 살게 되었는데 어찌 인사도 없이 간대? 배운 사람들은 다 그렇게 예의가 없나? 먼저 들어온 며느리로서 가풍이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기회를 안 주네.”

해월이 쉬지 않고 이죽거렸다. 참다못한 정호가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

“내가 놀라서 팔삭둥이라도 낳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뱃속에 아이가 있는 한 나는 무서울 것이 없다니까 그러네.”

듣다 못한 정호가 벌떡 일어나 별채를 나왔다. 어디든 해월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허름한 주막집이 보였다. 작은방을 하나 얻어 들어갔다. 눈치 빠른 주모가 술상과 함께 물수건을 준비해 가져다주었다. 피딱지가 엉킨 얼굴을 닦았다. 무심결에 단아한 유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어제 혼례를 치른 새신랑이었다. 그런데 몰골이 이게 뭐란 말인가. 어쩌다 찰거머리 같은 여자에게 발목을 잡혀 좋은 세상을 스스로 버렸는지… 술이 원수였다. 그날도 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치명적인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멍청한 인간….”

머리를 쥐어박았다. 분이 풀리지 않아 안주도 없이 술병을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

정호의 부친은 돈을 벌면 땅부터 사고 보는 사람이었다. 집주름이 목이 좋은 땅을 찾아서 소개하면 주저 없이 사들였다. 어디서 화수분처럼 돈이 솟아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땅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계약서를 쓰고 권리이전이 끝나면 항상 기생집에서 집주름 들에게 거하게 술대접을 했다. 다음 거래를 위한 포석이자 위로 자리였다. 물론 빠지지 않고 거마비가 지급되었다. 처음엔 모든 거래를 혼자서 하던 부친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호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혼자서 하기에 벅차기도 했지만 큰돈을 나눠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어느 샌가 정호가 부친의 일을 대신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기생집을 자신의 안방처럼 거침없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전대를 열어 놓는 그의 씀씀이에 반한 기생들은 너나없이 정호의 시중을 들고 싶어 했다. 해월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다른 기생들이 정호 곁에 오지 못하도록 단속을 했고 자신이 늘 지명을 받은 기생처럼 행동했다. 사단이 나던 날도 집주름과 거래를 성사시키고 기분이 좋아 기생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이고, 머리야.”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에 흐린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역시 기생집이었다.

“꿀물이라도 좀 가져오너라.”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으며 정호가 말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빈 이불이었다.

“아이쿠! 사단이 났구나.”

옆에 함께 누워 있어야 할 해월이 없었다. 머리맡에 벗어 두었던 도포 안주머니 먼저 확인했다. 집주름에게서 넘겨받은 산문서가 사리지고 없었다.

“내 이것을 그냥!”

자리끼가 담긴 그릇을 그대로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침부터 이 무슨 행패이십니까. 꿀물을 준비해 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제가 보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거짓말처럼 해월이 눈앞에서 꿀물 그릇을 내밀었다.

“필요 없다. 땅문서 먼저 이리 내거라. 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예쁘다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할애비 수염을 잡아 뜯는다고 네가 그 꼴을 하고 있구나. 어디다 함부로 손을 넣은 것이냐. 그러다 손모가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정호가 거칠게 해월의 옷섶을 그러쥐었다.

“잠시만 제 말 좀 들어 보시어요.”

해월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동안 받아 챙긴 화대가 적었더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아버님께서 대노하실 것이니 살고 싶으면 문서부터 내거라.”

“산문서 보다도, 화대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느닷없이 해월이 정호의 손을 끌어다 배에 대었다.

“네 배가 왜?”

“아이가 생겼습니다. 나리의 아이입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헛소리 말고 비켜라. 네 말이 맞더라도 내 아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느냐.”

“나리를 자주 모시게 되면서부터 저는 양반 댁 마님처럼 음전한 몸가짐을 했습니다. 그건 나리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해월이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섬뜩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정호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재물이냐?”

“그런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해월이 처연한 표정으로 도리질을 쳤다.

“저는 그저 나리 한 분이면 만족합니다.”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기생이 한 사내로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이냐?”

“정실부인이 될 수 없음은 제가 더 잘 알지요. 첩실로 삼아 주십시오.”

“헛꿈 꾸지 말아라. 부친이 말도 꺼내기 전에 나를 죽이려고 하실 것이다.”

더 이상 뒷말을 듣고 싶지 않은 정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대로 가시면 다른 이유로 죽게 되실 것입니다. 땅문서는 영원히 찾지 못하실 것이니까요.”

해월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게 어떤 문서인 줄 알고 장난질을 치는 것이야.”

정호가 호통을 쳤다.

“중요함을 알기에 제가 감추었습니다. 뱃속에 아이를 포태하고도 지아비에게 버림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부친께 저를 첩실로 들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오시면 문서는 즉시 내드리겠습니다.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 내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시지요.”

“요망한 것. 내가 저를 한때 어여삐 여긴 것을 빌미로 이렇게 발목을 잡는구나.”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다시 담을 수 없지요.”

해월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호가 완력으로 몸을 더듬어 보았지만 지니고 있을 리 만무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이 정황을 어떻게 집에 가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부친께서 좋은 가문의 여식을 들이고 싶어서 그렇게 수소문하시는 것을 잘 아는데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

“도련님! 돌쇠입니다. 진사 어른께서 대노하셔서 도련님을 찾아오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얼른 집으로 가시지요.”

날이 밝아도 돌아오지 않으니 집에서 부리는 머슴인 돌쇠가 결국은 정호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되었네요. 더 망설이시면 진사 어른이 직접 오실 것이고, 그리되면 망신 중에 그런 망신이 또 없지요. 좋은 소식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해월이 등을 떠다밀었다. 별수 없이 돌쇠의 손에 이끌려 정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산문서부터 내놓아라. 산지기는 돌쇠를 시키기로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땅 중에서 제일 큰 덩어리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구나. 문만 열면 바라보이는 앞산이 내 것인데 뭐가 더 부럽겠느냐.”

부친은 산을 산 것이 그저 기쁘셨는지 술독에 빠졌다 돌아온 아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