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실 문이 열리고 전율이 등장하자마자 옆 반 애리가 찾아와 따지듯이 물었다.

“야! 전율! 김별 얼굴 왜 저래? 너 별이 맞을 때 옆에 없었어? 어떻게 친구가 저렇게 맞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전율은 유와 함께한 주말 덕분에 마음이 한껏 느긋하고 세상이 아름다워서 오는 길에 꽃들에게도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런 달콤한 기분이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꿈처럼 깨져버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안아름이 새빨간 입술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주애리. 너 지금 율이한테 뭐 하는 거야? 율이가 김별 보디가드야 뭐야? 김별 얼굴 저렇게 된 게 율이 탓이야?”

오렌지 컬러의 명품 헤어밴드, 손목에 같은 브랜드의 시계를 찬 애리의 목소리가 더욱 앙칼지게 변했다.

“너 요즘 웃긴 거 알아? 손여은 학교 그만뒀다고 이제 네가 전율 여친이나 되는 것처럼 군다? 그래 봤자 너도 손여은 꼴 날 거 뻔하지 않아?”

초콜릿 노래방 사건이 있은 후 학교를 그만 둔 손여은은 걸그룹 데뷔를 준비한다며 서울에 있는 한 연예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자신이 전율 여자 친구라도 되는 양 기고만장 설치는 안아름의 꼴은 도저히 못 봐줄 정도였다.

두 여자의 싸우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이유로 교실 주인들은 쉬는 시간마다 매점이나 복도로 피신했다.

어째서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건지.

전율, 박지오, 에스타를 한 반에 묶어 놓은 사람이 누구냐며 오죽하면 교감이 담당 교사에게 반 편성 책임을 물었다는 소문이 있다.

에스타는 1, 2교시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전율은 그런 에스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고 보니 쟤네 셋 오늘 왜 저래? 박지오도 김별이랑 여태까지 한마디도 안 했어. 셋이 싸운 거 아니야?”

안아름이 휴대폰 모서리로 박지오의 등을 쿡쿡 찔렀다.

“야. 빡쵸. 뭔데? 설마 너네끼리 싸웠냐?”

박지오는 엎드려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킨 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안아름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뒤진다.”

수업을 시작하는 벨이 울렸고 안아름과 주애리,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교실로 돌아갔다.

점심시간 박지오는 평소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다른 친구들과 급식실로 갔고, 에스타는 팔에 주애리를 매달고 나갔다.

“율아 우리도 점심 먹으러 가자”

안아름이 팔을 흔들고 손가락을 잡아끌었지만 전율은 귀찮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먹어.”

“지오랑 별이는 밥 먹으러 갔어. 너 혼자 먹을까 봐 내가 같이 가주는 건데?”

“됐고, 너나 먹어.”

친구들 얼굴 보기도 싫고, 입맛도 없다.

“너희들 싸웠어? 딱 봐도 싸웠는데? 말도 안 하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무슨 일인데? 설마 김별 얼굴 네가 그런 거야?”

“귀찮으니까 저리 가.”

안아름은 잔뜩 삐쳐서 교실을 나가버렸다.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전율은 인상을 팍 구겼다.

박지오, 에스타. 저것들을 생각하면 짜증나서 오던 잠도 달아나버린다.

그 얼굴로 학교에는 왜 온 거야? 생각할수록 열 받네.

에스타는 눈썹 옆에 커다란 밴드를 붙이고 검정 마스크를 쓴 채 버젓이 등교했다. 우뚝 솟은 코가 늠름하고 섹시하게 마스크를 들어 올려서 얼굴을 가렸는데도 오히려 눈에 띄었다. 안 보려고 해도 힐끔 눈길이 갈 때마다 속이 상해서 명치가 찌르르하다.

누구의 잘못을 따질 수도 없고, 누군가 나서서 대신 해결할 수도 없다.

막막한 분노와 한 여자에 대한 열정, 친구의 부재가 주는 우울함을 견디기 힘든 건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점심 식사를 마친 에스타는 주애리와 함께 교실로 들어왔고, 박지오도 다른 친구들과 요란하게 떠들면서 교실 안으로 모였다.

친구 한 놈이 박지오에게 물었다.

“왜 싸웠냐? 김별 얼굴 전율이 그런 거 맞지? 와. 전율 무섭다. 친구도 안 봐주네?”

창가 쪽에 앉아 주애리와 노닥거리고 있는 에스타에게 박지오의 서늘한 시선이 날아갔다.

“봐 줬으니까 두 발로 걸어서 학교 왔지 새끼야. 그리고 김스타가 맞을 짓을 했으니 처 맞았겠지. 더 맞아야 되는데 전율이 많이 참았어.”

박지오의 말을 들은 에스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 불꽃이 번쩍 튀었다.

박지오의 특기가 나왔다.

“뷰웅신. 이제야 쳐다보네. 그 꼬라지로 대학생 누나 찾아가니까 누나가 좋아하든? 너 얼굴 하나 보고 헤벌레하던 여잔데 안 쫓아내고 재워줬냐?”

수위를 넘나드는 박지오의 막말에 에스타가 성큼성큼 교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도 터진 입은 멈추지 않았다.

“네가 어떤 여잘 만나든 누구랑 자든 그건 내 알 바 아닌데. 유 쳐다볼 때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라. 어? 심심할 때 가끔 만나서 노는 여자들 쳐다보듯 하지 말라고.”

더는 들어줄 수가 없다.

화가 난 에스타는 결국 박지오에게 주먹을 날렸고, 박지오도 지지 않고 에스타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엄청난 싸움이 붙었다.

“야! 이 새끼들 말려!”

“진정해! 미친놈들아!”

주위 친구들은 전율을 불러대며 서너 명씩 달려들어 각각 박지오와 에스타를 붙잡았고 두 사람은 성난 황소마냥 서로 붙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놔! 씨발!”

맨 뒷자리에 엎드려있던 전율이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건 전율밖에 없었다.

구경하던 모든 학생들이 길을 트고 숨을 죽였다.

드디어 전율이 입을 열었다.

“하아…. 내 여자 두고 왜 너희 둘이 싸워?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전율의 말을 듣고 대충 상황을 파악해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주애리가 에스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별. 너 윤유한테 관심 있어?”

에스타는 아직 아물지 않은 입 안을 혀로 훑으며 박지오와 전율을 보았다.

길고 커다란 눈이 조금은 애처롭게 목적지를 잃었다.

유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그 말이 비집고 나와 버렸다.

“어. 나 윤유 좋아해.”

그 한마디에, 냄비 속 조개가 입을 벌리듯 교실에 있던 적어도 삼십 개 이상의 입이 헐 소리와 함께 쩍 벌어졌다.

주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발악을 했다.

“너 진짜 미쳤구나? 네가 걜 왜 좋아하는데? 걔 지금 전율이랑 사귄다며!”

한 쪽에서 앙칼지게 쏘아붙이거나 말거나.

“네 입에서 유 좋아한다는 말 나오면 가만히 안 있는다고 했다!”

마주 서 있던 박지오는 자신을 잡고 있던 놈들의 팔에 힘이 빠진 틈을 타 다시 한 번 에스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전율이 중간에 서서 박지오의 멱살을 꽉 잡고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았다.

발버둥 칠수록 엄청난 힘으로 조여 오는 악력에 캑캑거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안아름도 대충 상황을 이해했는지 냉소를 날렸다.

“어라? 이 거지같은 상황 뭐야. 전율도 가만히 있는데 박지오 네가 왜 화를 내? 와. 너희 셋 다 미쳤구나? 대박이다.”

깔깔깔 웃는 안아름의 웃음소리가 히스테릭하게 울렸다.

전율은 지금 교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난장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꿈이길 바랐지만 그럴수록 모든 것은 더욱 생생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교실을 나간 에스타는 아예 교문 밖으로 나가버렸고 박지오도 보건실로 내려가 오후 수업 전부를 제꼈다.

악몽 같은 하루였다.

**

하교 준비를 하는 전율에게 안아름이 은근슬쩍 다가왔다.

“전율. 근데 너 이거 윤유도 알아?”

당연히 모른다.

“입 조심해.”

“아. 몰라? 하긴. 알면 윤유도 꽤 곤란하겠다. 그치?”

새침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혀를 배배 꼬는 안아름 꼴을 보아하니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하다.

“말하지 말라고 했다.”

“글쎄. 오늘 이 재미있는 광경을 나만 본 게 아니잖아? 나도 모르지. 소문이 어디로 어떻게 퍼질지.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계집애가 알게 되면 너랑 걔 사이도 썩 좋진 않겠다.”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역할을 하는 동물들이 꼭 한 마리씩 있다. 나긋나긋 꾀부려서 골탕 먹이고, 이간질하는 토끼 혹은 여우.

진절머리가 난다.

“밥이나 사 주든가. 그럼 윤유 귀에 안 들어가게 내가 애들 입단속 확실하게 할 수 있는데.”

애교 있게 눈웃음치는 안아름의 제안에 전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민 중이라는 걸 알고 살살 거슬리는 멘트를 날렸다.

“싫으면 할 수 없지 뭐. 친구 셋이 여자 하나 때문에 교실에서 멱살 잡고 싸우고, 친구 사이 다 깨진 거 알면 걔 기분이 어떨까? 하긴 윤유처럼 둔한 년이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밥?”

전율의 질문에 안아름은 활짝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진짜 약속 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저녁 약속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 유가 알면 안 된다. 박지오와 에스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쩔 줄 몰라 망설이는 유의 얼굴이 생각난다. 미안해하는 표정이 떠오르면 불안함에 식은땀이 흐른다.

에스타의 손을 잡고 뒤돌아서는 유가 꿈에 나왔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싫지만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까봐 겁이 난다. 이제 겨우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봐.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유가 모르게 하는 일.

유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지금은 휴대폰을 꺼 놓고 있겠지만.

- 유야. 미안. 오늘은 데리러 못 가. 이따가 독서실 앞으로 갈게.

그리고는 안아름과 함께 시내로 향했다.

학교를 마친 유는 터덜터덜 교문을 나서면서 데리러 오지 못한다는 전율의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은 독서실까지 혼자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도서관 옆을 지날 때 계단에 앉아 있던 박지오를 발견했다.

“어? 지오야. 여기 어쩐 일이야?”

소년과 남자의 중간쯤 되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뛰어오는 그를 마주하고 걸음을 멈췄다.

“누나! 이제 끝났어요? 이 학교는 7교시가 아니고 8교시까지 해요? 한 시간 넘게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났어. 야옹 해줘요.”

“야옹.”

얼떨결에 해버렸다. 그랬더니 깔깔깔 웃는다.

“그걸 시킨다고 또 해. 어휴. 내가 이 여자 때문에 웃는다.”

넘치는 건강함을 결코 숨기는 법이 없는 이 아이는 어째서 오늘 혼자 여기에 있는 걸까?

“오늘 율이는 무슨 일 있어? 왜 혼자 왔어?”

묻는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몰라요. 다른 여자 만나나보죠.”

정말이냐고 묻는 듯 휘어지는 유의 눈썹을 보니 거짓말도 못하겠다 싶어 얼른 손을 저었다.

“농담. 오늘은 내가 독서실까지 바래다줄게요. 배 안 고파요? 독서실 가기 전에 뭐 먹고 갈래요? 햄버거 좋아해요?”

햄버거 가게에 들어 간 두 사람은 햄버거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다.

박지오는 오늘 작정을 했다. 그는 칼을 뽑았으면 칼이 부러지든 팔이 부러지든 둘 중 하나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누나. 나 오늘 할 말이 있어요.”

“응? 할 말?”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고. 이따가 독서실 앞에 가면 얘기해줄게요.”

겁 없기로 유명한 박지오도 고백 앞에서는 꽤 긴장되는지 웬일로 말을 아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이 여자에게 진심인 건지, 친구 여자에게 들이댈 만큼 제정신 아닌 게 확실한 건지.

“욕 한 번 해볼래요?”

창가에 놓아 둔 꽃병처럼 예쁜 얼굴로 얌전히 앉아 있던 유는 느닷없는 박지오의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나 욕 잘하는 여자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욕 한 번 해 봐요.”

“바보….”

놀란 박지오의 입이 동굴처럼 벌어졌다.

“지금 그걸 욕이라고 한 거예요? 미쳤네. 근데 왜 시키는 걸 다 해요? 욕하란다고 하는 여자는 처음 보네.”

욕 해보라고 하는 남자도 처음 본다.

하라고 해서 한 건 아니고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펄쩍 뛰는 박지오 반응이 더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