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시절 우리가 그녀를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끓어오르는 열정과 애틋한 순정,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 미완성 된 영혼까지 모조리 바쳤던 우리의 첫사랑은 흙탕물 속에서도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밝아지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 세상 모든 것이 슬퍼지는 기적을 세 남자가 동시에 경험하면서 사랑의 실체를 믿을 수도 없게,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런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건 6년 전이었다.

내 옆에서 잠들었던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푹 젖은 베개만이 그녀가 우리의 이별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걸 말해 주었다.

그녀가 떠난 후 나보다 더 미쳐버린 박지오와 김에스타 때문에 나는 마음껏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우리의 시계는 6년 전 그 날 멈춰 버렸고 내 목에 걸린 자물쇠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우리들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오늘 김별 한국에 들어온다며?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바로 온대?”

쓸어 넘기는 머리가 금발이라 하기엔 허스키한 잿빛이 감돌았다. 하얀 피부와 어쩐지 냉정해 보이는 눈빛은 꽤나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도톰한 입술이나 웃을 때 사라지는 눈은 선한 인상을 풍겼다.

목소리는 감미로운 미성.

절친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말투에 애교가 섞여 나오는 박지오.

그가 걸터앉은 데스크 위에는 이라는 명패가 버젓이 놓여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완성형 얼굴이라 엄마가 갓난아기를 보고 깜짝 놀라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고 이름을 전율이라 지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고등학교 시절 박지오가 퍼트리고 다녔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다.

명패의 주인이자 CEO 자리에 앉은 전율은 남의 회사, 남의 사무실, 남의 책상에 앉아 떠드는 친구 놈이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대답을 날렸다.

“여기 들렀다가 고향에 내려간대.”

“1년 만인가? 하여튼 노는 건 겁나 잘해요.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건지,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건지 모르겠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밥벌이 하는 게 어디야. 어디서 객사 안하고 곱게 돌아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스마트폰으로 에스타의 SNS를 뒤적거리는 박지오의 귓불 끝에 찰랑이는 귀걸이가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처럼 예쁘게 반짝거렸다.

“와. 씨. 뭐 이 따위 사진에도 좋아요가 만 개씩 달리냐. 이 새끼 팔로우 하는 사람들은 풍경 사진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김별 셀카를 보러 오는 것 같아.”

에스타가 여자를 만나든 남자를 만나든 관심 없다는 표정의 전율은 명패로 박지오 엉덩이를 퍽 쳐냈다.

“넌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 가.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놀탱이 대표가 무슨 일을 해? 만날 쓸데없이 나와서 시간만 때우는 주제에.”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 백수가 사업가의 고뇌를 알기나 해?”

“백수라니. 이래봬도 건물주다. 까불지 마라.”

두 친구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회사 직원인 롤라가 CEO 룸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시원하게 말아 올린 머리, 깔끔한 목선, 엉킨 듯한 속눈썹, 분위기가 묘한 여자.

“대표님 차 드릴까요?”

공손하면서도 상냥한 그녀의 질문에 박지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롤라. 립스틱 색깔 바꿨어요? 훨씬 잘 어울려.”

“아. 네. 고맙습니다.”

“난 얼그레이. 땡큐.”

롤라의 타깃은 박지오가 아니었다. CEO 자리에 앉은 전율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대표님은요? 커피 드릴까요?”

“괜찮아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간다고 승재 형 오면 전해 줘요.”

늘 그랬듯이 깔끔한 거절.

박지오가 어깨 너머로 슬쩍 전율을 돌아보고 쯧쯧 고개를 저었다. 물어본 사람 민망하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아무 거나 달라고 하지.

“네. 알겠습니다.”

퇴장하는 그녀의 어깨가 들어 올 때와 달리 축 처져 있는 건 기분이 반영 된 확실한 의사표현이었지만 전율에게는 그런 걸 알아차릴 만큼의 관심도, 감각도 없었다.

사진을 찍겠다며 1년 전 카메라 하나 메고 유럽으로 떠난 에스타가 오늘 서울로 돌아온다.

에스타의 SNS에는 풍경 사진보다 여자랑 술 먹고 노는 사진이 더 많지만 그런 사진에도 하트가 수 만 개씩 달리는 걸 보면 가성비 좋은 인생인 건 분명하다.

유가 떠나고 3년 동안 누구도 먼저 그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유’의 이응 자도 먼저 꺼내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왜 그렇게 예고도 없이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유는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전율의 집.

유럽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돌아온 에스타가 슬쩍 쓸어 올리면 묶일 정도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자기네 집인 것처럼 짐을 풀었다.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소파에 기대 선 박지오는 잔소리를 쏟아냈다.

“네가 로빈슨 크루소야? 유럽에는 미용실이 없냐? 설마 그 헤어스타일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째서 옷들은 하나같이 동남아야? 그리고 인마 정력을 너무 낭비하면 오래 못 살아. 조선 왕들이 단명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 1년 뒤에 눈 새파란 아가들이 FEDEX 상자에 담겨서 택배로 오면 어쩌려고.”

에스타는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길고 그윽한 눈으로 박지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걔랑 헤어졌어? 작년에 누구 사귀고 있었잖아.”

“아. 박시연? 헤어진 지가 언젠데. 걘 이제 내 군대 동기나 다름없어.”

박지오는 손을 내미는 에스타에게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건네며 물었다.

“한국에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떠나더니. 그 많은 여자들 다 버리고 어떻게 왔냐?”

레드 와인 탓에 입술이 더 붉어진 에스타는 약간은 지친 목소리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을 했다.

“여기저기 다녀 봐도 역시 한국 여자가 제일 매력 있어. 입맛에 맞는 외국 음식도 김치 없으면 잘 안 넘어 가는 거랑 비슷해.”

아마도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아챌 필요도, 내색할 필요도 없었다.

“피카츄! 다 씻었으면 빨리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짜릿짜릿 전기가 통한다는 이유로 전율의 별명은 피카츄였다.

에스타가 박지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답은 알고 있지만 확인하듯이….

“율이는? 아직도 여자 안 만나?”

“몰라. 아직 개목걸이 걸고 있는 거 보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전율은 젖은 머리를 털며 테이블 위에 있던 얼음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에스타에게 안부를 건넸다.

“거지꼴로 돌아올 줄 알았더니 의외로 멀쩡하게 왔네? 이번엔 어디로 가려고?”

“지루해지면 다시 나가더라도 당분간은 사진 공부 좀 할 생각이야. 넌 요즘 사업하느라 여자도 안 만나?”

맞은편에서 박지오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나무랐다.

“여자 얘기 좀 그만해라. 어휴. 지겨워.”

에스타의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소식은… 없고?”

그 한마디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전율은 표정 변화 없이 무심히 되물었다.

“무슨 소식?”

“뭐. 아무 소식이나. 없으면 말고.”

누구도,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잠시 떠올린 생각만으로도 시간과 공간을 멈추게, 혹은 달리게 할 수 있는 존재.

박지오가 정적을 깼다.

“김별. 괜히 쓸데없는 소리해서 분위기 망치지 말고 할 얘기 없으면 그냥 다시 여자 얘기나 해.”

다음 날 에스타는 잠깐 고향에 다녀온다며 지방으로 내려갔고 박지오는 전율의 차에 함께 올랐다.

“나 출근하는데 넌 왜 따라 와?”

조수석에 앉은 박지오는 대답 없이 창밖의 풍경을 무심히 흘려보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율. 솔직히 말해. 롤라 면접 보러 왔을 때 깜짝 놀랐지?”

“뭐가.”

“닮아서.”

전율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박지오가 대신 말을 이어갔다.

“나도 처음에 보고 놀랐어. 너무 닮지 않았냐? 너 대표라서 할 일 없는데 만날 출근 하는 것도 롤라 때문이지? 아니야?”

정면을 응시하는 전율의 표정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헛소리 하지 마.”

“그럼 내가 롤라 한 번 만나볼까? 얼굴 외에도 닮은 점이 있을지 모르잖아.”

“남의 직원 꼬여내러 회사 오는 거면 가. 업무 방해 돼.”

오늘도 역시 ‘차 드릴까요?’ 하고 물어오는 롤라의 등장에 화색으로 반기는 건 박지오였다.

“롤라. 앞머리 잘랐어요? 헤어스타일 예쁜데? 잠깐, 이런 말도 성희롱인가? 난 홍차. 고마워요.”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나 매력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유와 닮은 분위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인이었다. 유보다 키도 크고 눈매가 살짝 올라가 더욱 세련되고 도도해 보였다.

“대표님은요?”

이 정도로 물어오면 바위산도 움찔할 법한데 전율은 한결 같았다.

“난 괜찮아요. 가서 일 보세요.”

롤라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박지오가 떠들어댔다.

“아무리 봐도 닮았어. 너 진짜 아니야? 롤라가 유 닮아서 뽑은 거?”

“아니라고 새끼야.”

“그냥 인정하고 롤라 만나보는 건 어때? 내가 너 불쌍해서 백 번 양보한다. 걔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기다려? 아마 걘 우리 같은 머저리들 깨끗하게 다 잊고 살지도 몰라. 죽었을지도 모르고.”

차라리 죽은 거라면 잊기 쉬웠을 텐데.

다리 없는 사람이 잃어버린 다리의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이, 내 곁에 없는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사실은 떨쳐낼 수 없는 환각 통에 시달리게 했다.

**

며칠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에스타는 전율 집에 방 하나를 차지했다. 세 남자는 입주를 축하하자며 밖으로 나가 집 근처 고기 집에 둘러앉았다.

곧 한 여자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 반갑다는 듯 에스타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철썩 갈겼다.

“김별! 오랜만이다? 유럽은 잘 갔다 왔냐? 기네스에 올려야지. 1년 동안 여자 제일 많이 만난 놈. 전 대표도 요즘 잘 나가, JY 소프트 게임 광고도 하던데?”

에스타도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넌 점점 남자다워지고 있어. 멋있다.”

그녀는 누가 보면 국가대표로 오해할 만큼 건장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얼굴도 예쁘장했지만 성격도 그만큼 밝았고, 남녀 구별이나 인종, 나이와 상관없이 10초면 친해지는 넉살과 사이다 성격을 갖춘 여장부였다.

“숨만 쉬어도 근육이 붙어서 요즘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내 맘을 아냐?”

음료수 잔에 맥주를 콸콸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고 빈 잔을 정수리에 털며 끝내준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맞은편에 앉은 전율이 박지오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 박시연 부르지 마. 왠지 술 취하면 남자 화장실 들어갈 것 같아. 나 얘 진짜 별로야.”

박시연은 박지오가 사귀었던 여자로 군대 전역하자마자 클럽에서 만나 만취 상태로 원나잇. 그리고 한 달 만에 헤어진 전 여친이다.

헤어진 이유는 박지오가 술만 먹으면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 이름은 언제나 같은 이름이었다고 한다.

작년 박지오 생일 파티에 온 박시연의 입에서 ‘도대체 윤유가 누구야?’ 라는 말이 나왔을 때 세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도 입에 담지 못했던 그 이름.

미칠 듯이 원망하고 그리워했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설탕으로 만든 유리가 부서지듯이 애써 봉인해 왔던 열여덟 그 해의 기억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생일 파티는 엉망이 되었다.

테이블에 소주가 일곱 병째 놓여졌다.

“잘 됐네! 김별 님께서 전율 집에 살게 됐으면 전율도 이제 솔로 탈출 아니야? 별아. 너 집에 들어갈 때 여자 하나씩 말고 둘씩 데리고 들어가. 전율 하나 나눠 줘!”

술에 취한 박시연의 혀가 꼬였다.

“얘 지금 뭐라는 거냐? 박지오. 저 새끼 입 좀 막아.”

“아무리 박시연이 남자 같아도 ‘저 새끼’는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사귀었던 애거든?”

박시연의 혀는 꼬이기도 꼬였지만 풀리기도 풀려서 말은 술술 나오는 대로 지껄여졌다.

“전유울! 너도 이제 그 개목걸이 좀 빼! 언제까지 기다릴래? 어차피 첫사랑은 이루어질 확률이 없어! 도망간 첫사랑 아직도 기다리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냐? 여자가 걔밖에 없는 줄 알아? 세상에 여자는 널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