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떤 키스, 어떤 비밀

4월의 첫 날.

따사로운 봄날이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정원에 해먹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먹 위에는 한 젊은 남성이 잠들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 짙은 속눈썹, 오뚝한 콧날 등…….

남성은 눈을 감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꽃미남이었다. 그는 군살 없이 탄탄하고 마른 근육질의 체형에, 185cm가 훌쩍 넘을 정도로 키가 컸다. 하얀색 시폰 원피스를 단아하게 차려입은 해준은, 꽃미남을 향해 발소리를 낮춰 살금살금 다가갔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룬 작은 얼굴과 사뭇 다른 늘씬하고 기다란 몸매…….

해준은 허리 숙여 꽃미남의 볼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해준의 생기 도는 분홍빛 입술이 꽃미남의 볼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해준은 깜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섰다.

툭!

영상이 끊겼다.

짙은 안개에 묻힌 듯 시야는 흐렸고, 무언가에 눌린 듯 온몸은 저릿저릿했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며 천장의 파스텔 색상 분홍빛 벽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는 해준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해준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고 그 반동으로 매트리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늘도 실패네. 곧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꼭 성공해야 해.”

해준은 10년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어간 해준과 꽃미남은 18살 고등학생에서 28살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꿈을 꿀 때마다 달랐다.

해준은 일주일 남짓 이 꿈을 꾸지 않았는데, 유슬라 마을에 온 첫날 밤 다시 이 꿈을 꾸었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오전 5시 30분.

해준은 알람 앱으로 들어가 매일 오전 6시에 울리도록 설정한 알람을 해제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통유리 창문을 가린 하얀색 블라인드를 걷었다. 블라인드를 걷자 따뜻하고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해준은 통유리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2층 테라스 너머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그곳은 해준의 꿈 속 배경이었다. 그러나 해먹과 꽃미남은 그곳에 없었다. 해준은 먼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켜고 나서도 눈을 감은 채로 잠시 동안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이윽고 해준은 눈을 떴다. 해준의 눈빛은 강한 의지와 영민함으로 한층 더 빛났다.

**

해준이 어제 이사 온 세진 시 진안동 유슬라 마을은, 일방통행 생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유럽풍의 고급 펜션들이 들어선 평화롭고 아름다운 펜션 촌이다.

해준의 2층 집은 하얀 벽돌 담장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다. 정문과 후문 옆 담장에는 똑같이 생긴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해준이 사는 집의 이름은 폴라리스, 북극성이었다. ‘세진 시를 방문한 여행객들의 친근한 이웃’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폴라리스 정문은 유슬라 3길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후문은 유슬라 2길과 길 건너편 펜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탁!

폴라리스 후문이 열리며 해준이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청바지에 하얀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해준은 캐주얼 의류 화보 속의 모델 같았다.

[출발]

해준은 후문을 등지고 서서 JW에게 레몬톡 메시지를 보냈다.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리며 JW의 답신이 들어왔다.

[오키]

답신을 확인한 해준은 오른쪽 방향으로 향했다. 폴라리스 후문을 등지고 서면 유슬라 2길의 왼쪽 방향은 멀리 용왕산 정상과 그 곳에 있는 하얀색 등대가 보였다. 오른쪽 방향은 멀리 바다와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보였다. 해준은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자전거를 끌며 걸어갔다.

해준은 생활 도로와 해안 국도가 맞닿은 곳에 다다르자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녀의 자전거는 해안 국도를 가로질러, 가장자리 자전거 도로 위로 유유히 올라갔다.

해준의 자전거는 활기차게 달렸다.

자전거 도로와 나란히 있는 보행로에서 한 남성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는 185cm가 훌쩍 넘는 키, 군살 없이 균형 잡힌 단단한 체형에 유난히 다리가 길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리는 그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해준의 자전거는 남성의 옆을 지나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를 향해 달려갔다. 남성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자전거를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은 고글을 끼고 있었는데, 고글 아래로 보이는 얼굴 윤곽이 깔끔하고 수려했다.

“저 여자, 어제 폴라리스로 이사 온 사람이다!”

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성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스쳤다.

해준은 더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녀의 자전거는 방파제 입구에 세워진 푯말을 지나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 끝을 향해 달려갔다. 해안 국도에는 드물게 자동차가 지나갈 뿐, 사람은 해준과 조깅을 하는 남성 단 둘 뿐이었다.

**

빨간 등대 옆에 도착한 해준은 자전거에서 내렸다. 유슬라 등대, 자전거 지지대를 내리고 빨간 등대에 새겨진 하얀색 글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글자를 보던 해준은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바다를 바라보는 해준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 속에서 화사하게 빛났다.

휘익! 휘익!

“이거 새로운 사람이네?”

그때 해준의 등 뒤에서 휘파람 소리에 이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준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의 긴 커트 머리를 한 인물 좋은 청년이 해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해준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은 당당하고 활기차며 건강미와 섹시미가 넘쳤다.

“이사 왔어?”

금발 머리 청년은 해준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해준은 그를 한 발 피해서며 자전거 지지대를 올렸다. 그러자 금발 머리는 해준의 앞을 막아섰다.

“사람 말 안 들려?”

금발 머리의 얼굴에 불쾌함이 역력했다. 해준은 금발 머리를 외면하며 한 발 비켜섰다.

“여긴 동네가 좁아서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눈에 띄어. 폼을 보아하니 여행객 같지는 않고 이사 왔어?”

금발 머리는 한 발 더 해준 가까이 다가서며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해준의 시선이 자전거 사이드미러를 향했다. 사이드미러에는 해안 국도를 따라 조깅 하던 남성이 담겨 있었다.

“그만하지? 문주원.”

침착한 목소리였다. 금발 머리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라면, 이 남성의 목소리는 고혹적인 고음의 목소리였다. 남성은 금발 머리 청년을 향해 다가왔다.

“하이든이네.”

금발 머리 청년 주원과 고글 쓴 청년 이든은 상대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이든은 고글을 벗어 이마에 걸쳤다. 그가 고글을 벗는 순간, 주위가 밝아지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이든은 같은 남성이 보아도 탄성이 나올 만큼 참으로 인물 좋은 청년이었다. 그는 주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든의 얼굴을 본 해준은 깜짝 놀랐다. 꿈에 나오던 해먹 위 잠자는 꽃미남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진 시 유지면 아무데서나 껄떡대도 되는 거야?”

이든은 주원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세진 시 유지? 해준은 이든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얘기에 주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뭐! 껄떡!”

주원은 인상을 쓰며 하이든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요리사가 싸움 좀 하나 보지? 응?”

주원이 이든을 거칠게 밀어붙이자, 해준은 양팔을 벌리고 이든 앞에 보호막을 쳤다.

“하지 마!”

해준은 주원을 올려다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비켜!”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주원은 건장한 팔뚝으로 해준을 밀치며 이든에게 바짝 다가갔다.

퍽!

해준은 방파제 위로 쓰러졌다. 쓰러질 때 바닥에 있던 작은 조각돌이 튀어 해준의 입술에 부딪혔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해준을 힐끗 보던 주원의 얼굴에 찰나의 순간 걱정 어린 표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주원은 이든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유슬라 마을의 룰 하나 알려줄까?”

주원이 이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거만하게 말했다.

“유슬라 마을의 룰, 문주원이 곧 법이다!”

“글쎄?”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 없어. 그렇지만 내가 이제 유슬라 마을에 돌아왔으니까 내 룰을 따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든은 주원을 빤히 쳐다보며 대응했다.

“여기서 레스토랑 그만하고 싶으면 더 까불어 봐!”

이든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주원은 해준에게 한 발 다가섰다. 해준은 방파제 바닥에 넘어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부딪힌 충격은 꽤 컸다.

“자! 잡아.”

넘어져 있는 해준 앞으로 주원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서 건들거리던 기색이 지워졌다. 건들거림과 사뭇 다른 사려 깊은 얼굴이 해준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준은 그를 외면하며 눈 앞에 있는 그의 팔을 밀쳤다.

“곧 또 보자.”

주원이 웃으며 해준에게 말했다. 일어서는 주원의 얼굴에는 다시 건들거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원을 외면하던 해준은 자신의 옆을 지나 방파제 입구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슬라 등대 앞에는 해준과 이든 둘만 남게 되었다. 이든은 해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해준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의 청바지와 하얀 점퍼는 더럽혀져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해준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이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꿈에서 그에게 키스를 시도했던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입술에서 피가 나요.”

이든이 점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실례할게요.”

그는 직접 해준의 입술에 난 피를 닦아줄 기세였다.

“제가 닦을게요.”

해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낸 이든은 그녀의 입술에 손수건을 살며시 댔다. 그의 손수건이 입술에 닿는 순간 해준의 눈 앞에 강력한 빛과 함께 영상이 시작 되었다.

컴컴한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산길 위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눈이 감겨진 소녀는 의식을 잃은 듯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툭, 소녀의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소녀의 지갑이었다.

“7천 원?”

모자부터 운동화까지 전부 시커먼 건장한 남성은 소녀의 지갑에서 돈을 꺼낸 뒤 소녀 옆으로 지갑을 툭 던졌다. 돈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남성은 다른 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남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키를 낮춰 소녀의 얼굴에 묻은 흙을 손수건으로 털었다.

가로등 불빛이 손수건에 걸쳐 있어서 손수건 무늬가 보였다. D&K, 명품 로고가 손수건 전체에 프린트 되어 있었다. 어둠과 가로등 그늘에 가려져 남성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남성의 뒤로 가깝게 보이는 산 정상에서 하얀 등대가 초록 불빛을 반짝였다.

“잘 가라.”

소녀는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앳됐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이 봐!”

남성은 키를 낮춰 미동 없는 소녀의 몸을 흔들었다. 소녀의 고개가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남성은 순간 얼어붙었다.

“뭐야? 죽은 거야?”

남성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도유리! 눈 뜨라고!”

남성은 교복 상의에 있는 이름표를 보며 소녀의 몸을 흔들어댔다. 당황한 남성의 외침이 컴컴한 산 속으로 스산하게 퍼져나갔다.

툭!

이든의 손수건이 해준의 입술에서 떨어지자 영상이 끊겼다.

농염한 붉은빛을 띠던 해준의 입술은 서서히 원래의 생기 도는 분홍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준은 살며시 손끝을 입술에 댔다. 입술을 뜨겁게 달구었던 열기가 점차 점차 식어 내리고 있었다.

해준에게는 사람과 사물에 남아 있는 비밀을 읽어낼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있었다. 대개의 사이코메트리가 손이 닿을 때 일어나는데 반해 해준의 사이코메트리는 입술이 스칠 때 일어났다. 해준은 남모르는 자신의 능력을 ‘키스 사이코메트리’라고 불렀다. 키스 사이코메트리가 일어날 때면 해준의 입술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농염한 붉은빛을 띠었다.

해준은 키스 사이코메트리 반응이 일어난 이든의 손수건을 힐끗 보았다. 영상에 나온 남자가 사용했던 손수건과 같은 무늬였다.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은 꽤 오래 사용한 듯 빛이 흐려져 있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이든이 현실감 없이 멍한 상태로 서 있는 해준에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영상의 여운에서 벗어난 해준이 답했다.

“저, 스타 셰프 하이든 씨죠?”

영상의 여운을 말끔히 정리한 해준은 이든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네.”

이든은 해준의 물음에 짧은 답을 했다. 그는 뛰어난 요리 실력은 기본,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톱스타 못지않은 팬들을 보유한 스타 셰프였다.

“손등도 다쳤습니다.”

해준의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한 이든이 말했다.

“괜찮아요.”

해준은 상처를 본 뒤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자전거, 가는 곳까지 갖다 줄게요.”

“괜찮아요.”

“그쪽 안 괜찮습니다. 다리도 불편해 보여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요? 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해준이 연신 다친 것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자 이든이 다그쳤다. 그는 해준에게 한 발 성큼 다가가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초면에 신세를 지네요.”

해준은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이든은 자전거 양쪽 핸들을 잡고, 해준의 걸음에 맞춰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민첩하고 걸음이 빠른 해준이었지만, 넘어진 충격이 남아 있어 평소처럼 걷을 수 없었다. 해준과 이든은 말없이 적당히 어색하게 걸었다. 그들의 등 뒤에 있는 빨간색 유슬라 등대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난 아픈데 안 아픈 척,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는 거 딱 질색입니다.”

이든은 앞을 바라본 채로 말했다. 앞을 보던 해준은 이든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0일. 반드시 30일 이내에 하이든을 내 남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해준의 눈빛은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든은 앞을 보며 걷고 있어서 해준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