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초저녁부터 비가 내리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한 눈은 온 세상을 온통 하얗게 꽉 채우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의 들뜬 기분이 거리를 울리는 캐롤송과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주변의 집들 중에서 가장 큰 집의 2층 창가에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영이 한 명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숙해 보이고 여자라고 하기에는 아직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아릿한 눈으로 밖을 보고 서 있었다. 마치 행복이란 것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밖을 볼 뿐이었다. '온 집안이 빛 한 점 없이 어둠에 휩싸여 차가운 무덤 속처럼 고요하고 스산하기만 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집안엔 여자아이 혼자만이 불도 밝히지 않고 눈 오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미동 없이 밖을 볼 뿐이었다. '창가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책상 위에는 고풍스런 액자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사랑과 행복이 물씬 묻어나는 일가족 사진이었다. 아빠인 듯한 남자가 한 손은 부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딸아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사진이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만큼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이었다.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어 중년의 여자 얼굴을 부들거리며 쓰다듬었다. 여자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머리를 흔들어 눈가의 눈물을 털어내 버렸다. 볼 위로 흘러내린 눈물마저도 여자아이는 입술을 꽉 깨무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냉정히 쳐냈다. 눈물이 아직 가시지 않은 여자아이의 눈이 갑자기 분노가 번득인다 싶더니 일가족이 담긴 액자를 책상 서랍 안에 던지듯 넣어버렸다.'다시 창 밖을 보는 여자아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악문 입술 사이로 피가 맺히자 괴기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아님 모르는 것인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있었다. 양팔로 온 몸을 끌어안고 분노에 휩싸인 슬픔을 삼켜보려 애를 썼지만 쉽지만은 않은 듯 두 눈마저 질끈 감았다. ' -휘야.' “외할아버지.”'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 벨이 정적에 감싸인 집을 울리자 여자아이가 떨리는 몸을 급히 수습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여자아이의 입가에 미소라고 할 만한 것이 잠깐 머물렀다. 얼굴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