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진정, 고백은 애증이로다.

본채 거실.

“그럼 태주가 여기 들어오고 우열이는 태주 아파트로 들어가고?”

“응.”

우열이 딴소리할까 봐 이모의 세 번째, 똑같은 질문에 태주가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방 많은데. 아예 너네 둘이 같이 들어 오지 그래? 니 그 아파트는 임대하던가.”

이모의 말에 우열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태주는 반대로 가로젓는다.

“에이! 우열아! 여기 마당에 벌레 디게 많어. 너 벌레 무서워하잖아.”

“내가? 아아아아… 그지? 내가 그렇지? 저 벌레 포비아예요.”

이젠 두 남자가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긋나는 이들의 손발에 금희는 뭐가 있음을 직감했지만 일단 속아주기로 한다.

“그럼 별채 위층 정리할까?”

그리고 이어지는 태주의 열렬한 헤드뱅잉.

금희는 실눈을 뜨고 조카를 쳐다봤다. 철없는 놈. 오라고 오라고 해도 안 오던 녀석이. 우열이 때문에 오겠다? 저도 이젠 컸다고 당최 속이 안 보인다.

아무리 조카지만 먼저 들어와 사는 미호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다. 상사와 같이 아래 위층 살면서 즐겁다 하는 직원이 어디 있겠는가.

“아래층에 강 실장 사는데. 너 강 실장 괴롭혔다간 당장에 퇴출당할 줄 알아.”

“이모. 아니 나 그렇게 한심한 놈 아니야.”

“너 한심한 미친놈 맞아. 하나 더! 여자 데려왔다간 내 네 팔다리를 아예 부러뜨려 버릴 거야.”

옆에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던 우열이 마침내 박장대소한다.

“이모님께서 아파트로 이사 오시는 것은 어때요?”

“허! 이 자식이 뭔 짓을 할 줄 알고. 박태주! 내가 너 지켜본다.”

금희는 두 손가락으로 제 눈을 가리켰다가 태주를 가리켰다.

“그럼… 별채 위층 정리할까유?”

옆에서 음료를 내려놓다 대화를 듣게 된 김포댁이 살짝 묻자 금희가 고개를 까딱했다.

거기 밖에 없었다. 본채 2층에 방 두 개를 금희가 쓰고 있었다. 하나 남긴 하지만 태주가 쓰기엔 좁았다.

본채 1층은 안성댁과 김포댁이 나눠 쓰고 방 하나 남는 것은 좁은 데다 가끔 수철이 자고 갈 때 사용하는 방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열이 넌 어떻게 지낸 거야! 그동안 어디서 뭘 했길래 얼굴 한번 못 비춰!”

표정과 목소리가 싸악 바뀐 금희의 이 질문하나에 우열의 여행담이 이어졌다.

우열이 제집에서 부모님에게 못 떠는 아양과 투정을 금희에게 쏟아 놓고 있을 때, 태주는 옆에 앉아 속으로 커다랗게 안도했다.

큰일 날 뻔했다. 우열이 그냥 여기로 이사 왔으면 오! 노! 노! 노!

근데 저 여자는 여기로 이사 왔으면서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제까지 내가 모를 줄 알고!

밖에서 수철과 미호는 열심히 정원을 치우고 있다.

짧은 머리는 감지도 않았는지 뒤죽박죽이다. 트레이닝 바지에 낡은 면티에 난방하나를 걸쳐 입은 미호는 또 달라 보였다.

더운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수철과 같이 얘기를 하면서 햇빛 아래 웃고 섰다.

미호의 또 다른 모습에 태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같은 담벼락 안에서 살면 적어도 ‘밥 한번 먹어 보자’라는, 입속에서 단내나도록 돌고 돈 말이 언젠가는 나오겠지.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기회가 생기거나.

가만히 앉아서 푸스스 혼자 웃었다.

*

“안성댁!”

김포댁이 부랴부랴 본채를 나오며 외쳤다.

“박 대표님 위층으로 이사한다고 소지하라시네!”

“그래? 하야 마 이 집에 식구가 또 하나 능기는구나마! 얼씨구나!”

안성댁이 덩실거리며 김포댁을 따라나서다 말고, 뒤에선 미호와 수철에게 알아서 치우라고 고개를 까닥까딱 하신다.

수철이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안성댁을 보낼 때 미호는 마주한 현실에 넋이 빠져 서 있었다.

이렇게 무슨 일이 없는 날이 없을까?

왜 이리 나의 하루하루는 오르락내리락 멀미 나도록 넘실거릴까?

그냥 평행선처럼 쭈욱 일직선일 수는 없을까?

그까짓게 뭐라고! 똑같지는 않아도 뭐 비슷한 하루하루가 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울까?

“뭐해? 이것 좀 들어.”

나지막한 수철의 목소리가 미호를 현실로 잡아당긴다.

“아! 네? 아. 네….”

미호는 어질어질 걸어가 바비큐 그릴 손잡이 하나를 잡아 쥐었다.

*

한편 금희는 조카의 얼굴에 난데없이 뜨다 사라지는 잠소(潛笑)에 두 눈이 솔깃했다.

웃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절로 나오는 솔직한 미소였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미호가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어때! 같이 일하기로 했어?”

금희는 모르는 척 회사 얘기를 꺼냈다.

“네! 태주한테 신세 좀 지기로 했어요.”

제 이름이 튀어나와도 본인은 밖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신세는 무슨. 그나저나! 보기 좋다! 친구 셋이서 한 프로젝트를 하니….”

보다 못한 우열이 정신을 팔고 있는 태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호로부터 시선을 거둔 태주의 얼굴은 아직도 그 미소가 잔잔하다.

순간 금희는 심장이 철렁했다. 어릴 적 마냥 어릴 때 손에 쥐여 준 작은 선물 보따리 하나에, 마음 깊은 속까지 따뜻하게 해줬던 어린 조카의 미소였다.

세상에. 태주가 미호를.

“참! 이모! 우열이 중국 가요.”

여태 우열이가 뭐라 쫑알거리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정신을 팔아 없앨 정도로 좋아하는구나.

우열은 이미 다 한 얘기를 또 꺼내는 친구의 얼빠진 모습에 얼굴이 찢어져라 소리 없이 웃는다.

“왜? 왜 웃어.”

태주는 얼음에 물방울이 맺힌 유리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이모! 할 말 있어요. 우열이도 이제 같이 들어도 되구.”

혁구에 대한 얘기였다.

*

어느덧 정원은 바비큐의 잔재 없이 다시 멀끔한 초록초록을 찾았다.

허나, 미호의 속은 타들어 바비큐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주가 위층으로 이사를 온단다. 깨우라고 하면 위층에 가서 깨우면 되는가? 이젠 맨날 깨우라 하겠네. 이젠 주말에도 툭하면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벨을 누를지 몰랐다.

무엇보다 상사도 뭐 그냥 보통 상사인가?

두 밤을 보낸 사이다. 이거 괜히 밤마다 내려오는 것은 아닌지.

강미호.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설마 네가 네 발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악!”

주위를 둘러보니 집 안이다. 별채 아래층.

발라당 누워 천정을 바라봤다. 안성댁과 김포댁이 청소를 하고 있다. 가구 끄는 소리가 들릴 뿐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안 되겠다. 이사를 해야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돼버렸는지. 여기가 좋은데.

*

뜬 눈으로 토요일 밤을 보냈다. 잠을 못 잔다는 태주를 백분지 일만큼은 이해할 것 같다.

침실을 열고 나오니 집은 금요일부터 치우지 않아 개판 오 분 전이다.

대충 씻고 청소나 할까…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욕실로 들어갈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네!”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이젠 생각 없이 살았다간 인생이 골로 가겠다는 깊은 깨달음에 입이 떡 벌어진다.

“뭐해?”

태주였다.

“안녕하세요.”

보스는 말없이 미호의 인간다운 꼴을 보고 피식 웃는다.

굳이 거울이 없어도 상상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미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생각이 없이 행동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벌써 이사하셨어요?”

“벌써라니, 이 아가씨야. 지금 점심때구만.”

“아!”

미호가 입을 다물기도 전에 태주의 눈은 집안으로 향해 여기저기 요망하게 더듬고 있다.

남의 사무실을 보고 쓰레기장 같다고 하더니 제집은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

미호가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문을 닫고 나오려 하자.

“이모가 점심 먹으러 오라는데?”

“점심….”

“아침이겠지. 오거나 말거나. 난 전했다!”

남자가 팽하니 뒤돌아 걸어간다.

아. 젠장. 이사했구나. 진짜구나.

덜렁대는 심장과 후끈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문을 닫았다. 아침이고 나발이고 이번 주 목요일 보증금 들어오는 대로 집을 찾으리라.

일단 금희의 초청은 가야 했다. 그리고 보스가 이사 오셨다는데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대충 양치와 세수를 끝내고 여기저기 뻗어 있는 머리칼을 정돈하고 별채를 나섰다.

“강 실장 왔어!”

금희가 인사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얼른 와! 여기 앉아.”

태주의 맞은편, 금희의 옆. 아니면 태주의 옆, 금희의 맞은편. 거기나 여기나. 엎어치나 매치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미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앉았다.

그래. 어차피 한번 치러야 할 행사다. 미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당당하게 들었다.

이 순간, 난 당신의 비서가 아니다. 쌀쌀맞은 당신 이웃이다. 아랫집에 사는, 나름 성깔 있는 처자란 말이다.

귀찮게만 해봐라. 그냥 팍!

*

아침인지 점심인지.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에게나 보여줄 법한 적나라한 모습으로 앉아 태주와 금희, 현과 전 보스를 모시고 앉았다. 미호는 눈앞 진수성찬을 두고 먹을 생각보다 정신 차릴 생각을 했다.

“이게 아침이라며!”

깨갱.

우리 보스는 입이 매우 방정맞으세요. 나는야 성깔 있는 처자라네.

“네. 늦게 일어났네요.”

“원래 그렇게 잠이 많아? 하긴 저번에 부산 갈 때에도 비행기 안에서 진짜 잘 자더라.”

우리 보스는 아주 솔직하세요. 나는야 쌀쌀맞은 이웃이라네.

“너처럼 못 자는 것보다 낫지.”

“난 아픈 거고, 이모.”

“아픈 게 뭔 자랑이야?”

미호는 조용히 앉아 이모와 조카를 윽박지르는 이 상황을 몰래 음미하고 있었다.

반면 태주는 오늘따라 이모의 구박이 싫었다. 같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이것을 요 며칠 고대하고 또 바라는 바였으나, 모양 빠지게 이모한테 혼나는 꼴이라니.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으나, 버릇없이 대들 수도 없고.

구미호. 당신도 나처럼 이모한테 한 번 혼나봐라. 뭔 건수 없나?

“근데 왜 여기로 이사 왔어?”

“집이 새서요. 물이 천정에서 펑펑 떨어져서.”

아. 생각난다. 남자친구랑 1년 살다가 헤어졌다고 했지. 아하. 그래. 그런 집에서 어찌 살겠니.

“그으래애애애? 지금 있는 집은 살만해?”

“네. 옛날에도….”

말끝을 흐리자 금희가 받아준다.

“너 들어오기 전에 강 실장이 여기 살았었어. 남동생이랑 엄마랑.”

태주는 몰랐었다. 이모랑 각별한 사이인 것은 알았는데 그게 그냥 일만 잘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지.

“그으래?”

“강 실장 엄마, 진애 씨가 손이 얼마나 매웠는데. 취나물을 하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난 그 쓴 나물이 그렇게 단지 처음 알았다.”

미호가 배시시 웃는다.

“그래? 그럼 강 실장도 취나물 잘해?”

“아뇨.”

이 여자는 뭐든 부정의 대답은 정말 속사포다.

“그럼 어머니한테 좀 배우지 그래?”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태주의 종아리로 날아드는 금희의 발 대포.

“악!”

뭐 이리 되는 일이 없냐.

그리고 우리 이모는 전직 암 환자가 맞는가. 뭔 다리 힘이 이리도 세신지.

미간을 찡그리며 제 종아리를 잠깐 문질렀다.

“미안해. 돌아가신 줄 몰랐어.”

“아니에요. 예전에 돌아가셔서.”

“그럼 이모랑 깡 비서는 어떻게 다시 만난 거예요? 둘이 뭔 사이야?”

그러니까 미호가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준호는 고3. 갑자기 가장이 된 미호는 장례가 끝나자마자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에이스 백화점에서 판매직원으로 아르바이트하다가 만났죠.”

“난 그때 진짜 진애 씨를 보는 줄 알았어. 어쩜 저 사람은 늙지도 않았나 했는데.”

미호의 과거를 알게 된 거야 월척이었으나 어째 두 사람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만 한 것 같고 미호와 태주 두 사람 사이는 하나도 발전이 없는 것 같다.

밥그릇도 바닥이 보인다. 이 식사 자리는 꽝이라 결론 냈다. 이럴 때는 얼렁 뒤집고 엎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