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첫 키스

“축하해 김 과장. 능력 좋아.”

“뭐예요 두 분. 언제부터예요?”

“몇 개월이에요?”

사무실 직원 모두의 관심은 온통 강우와 유라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결혼 소식이었다. 유라는 행복했다. 강우와의 관계를 모두에게 드러내는 일도, 임신도, 관심도. 자신의 일을 축하해 주는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하루를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하루를 향해 한껏 미소 지어 보이며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하루는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유라를 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무언의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상대하기에 너무 지칠 대로 지쳤고, 더 이상 그들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6주밖에 안됐어요.”

“식은 언제야?”

“가을에 하려고요 3달 뒤로. 서둘러야죠.”

“둘이 띠동갑이지? 엄청나네.”

듣고 싶지 않은데 사무실 안에 모여 말하는 그들의 대화에 자꾸만 신경이 곤두섰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유부남이 생기는구나….”

“무슨 소란입니까?”

“과장님… 김 과장이랑 유라 씨가 결혼한대요.”

“…….”

사무실로 들어온 도원이 모여서 떠드는 직원들을 향해 물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도원 역시 둘의 결혼 소식이 적잖이 놀라웠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부디… 잘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럴 겁니다. 보란 듯이.”

도원과 강우가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고, 둘의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 옆에 있던 직원들이 서로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자 다들 일합시다. 일.”

도원이 먼저 고개를 돌려 모여 있는 직원들을 향해 말하며 빠르게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향하다 이내 하루와 눈이 마주쳤다.

“대리님 잠깐 제 사무실로 와주세요.”

그는 강우와 이야기를 나눌 때와 달리 하루를 바라볼 땐 한없이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무실로 향하는 그의 뒤를 일어나 뒤따라 올라갔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강우가 한껏 노려봤고, 그런 강우의 모습을 옆에서 유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하반기에 있을 경영실적 관리 때문에요. 그동안 어떻게 관리되고 있었는지 시스템을 잘 몰라서 대리님이 정리해서 좀 알려주셨으면 해요.”

사무실로 따라 들어가 도원이 하루에게 본론부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떤 위주로 정리하면 될까요.”

“일단 작년 수입, 지출, 투자 계획표랑 실적 평가를 좀 알려주세요.”

“네.”

“다음 달부터 바빠질 거예요. 대리님이 많이 힘드실 지도 몰라요.”

“늘 해오던 일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걱정 마세요.”

“…저 김강우 과장 결혼 일은….”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제. 신경 안 쓰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헤어져 남이 되어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는가. 도원은 하루가 걱정됐다.

“알겠어요. 나가보세요.”

“네.”

하루가 덤덤히 답하며 뒤돌아 도원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도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헤어진 지 일주일도 안돼서 결혼 소식을 알려오는 그와 그녀가 하루에게 너무 가혹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임신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의 행동이 기가 찼다.

하루가 도원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도 아직 모두들 강우와 유라의 결혼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대리님 남자친구랑 잘 지내고 계세요?”

“…헤어졌어요.”

“정말요? 언제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혜주가 기다렸단 듯 하루에게 붙어 질문을 했다. 둘의 대화를 맞은편의 연호 또한 들으며 하루의 눈치를 봤다.

“얼마 안 됐어요.”

“죄송해요… 대리님은 도통 자기 얘기를 안 하시니까 몰랐어요….”

“혜주 씨가 뭐가 미안해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혜주를 한번 바라본 뒤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사무실 중앙의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강우와 유라의 연애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지나쳐 빠르게 화장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한동안 제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과 10년을 만난 남자가 고작 몇 달 만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단다. 그것도 임신을 해서. 세월이 참 부질없다고 느껴져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와 결혼하기 위해 아등바등 대던 게 결국 다 물거품이었다니… 허무했다.

“대박이지?”

“그니까 말이에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때였다. 화장실로 경리부서 김 대리와 예림 씨가 들어오며 얘기했다.

“짜증나 죽겠어. 기껏 미영 씨 임신해서 나가서 뽑아놨더니. 또 임신?”

“둘이 원래부터 사귄 거죠? 그래놓고 아무것도 모른 척. 유라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여우였어요.”

“그니까. 아 또 사람 빌 거 생각하니까 짜증나네. 단축근무 출산휴가 그런 게 어딨어? 나 때는 그냥 다 묵묵히 일했지.”

벌컥!

하루가 그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 듯 문을 거칠게 열며 나왔다.

“송 대리… 안에 있었어?”

하루가 세면대 앞을 막아서는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물을 틀고 손을 씻었다.

“대리님은 휴대폰 왜 사용하세요?”

“어… 어? 나?”

“예전엔 없었는데 지금은 왜 사용하시냐고요. 다 묵묵히 살았는데.”

“허… 송 대리 지금 유라 씨 흉 좀 봤다고 나한테 뭐라 하는 거야?”

“유라 씨 흉을 봐서 그런 게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사용하는 사람을 욕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대리님이 그럴수록 당연한 혜택을 남 눈치 보며 사용 못 할 직원들이 생겨나니 드리는 말씀이에요.”

“나도 알아… 안다고.”

하루가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황당해하고 있는 김 대리와 예림 씨를 지나쳐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허 참. 송 대리 진짜 맘에 안 드네.”

“완전 차가워요 대리님….”

하루의 말에 한껏 화가 난 김 대리는 하루가 빠져나간 입구 쪽만 괜히 흘겼다.

퇴근 후 강우와 유라는 함께 차에 타고 가며 이야기했다.

“이번 주 주말에 우리 집 인사드려요.”

“네! 어머님 아버님 뭐 좋아하세요?”

“다 좋아해요. 유라 씨 집은….”

“저희 집은 싫어요. 연 끊으려고 나왔는데 가서 뭐해요. 없는 셈 살 거예요.”

“…….”

유라가 단호히 말하며 양손 주먹을 꼭 쥐었다. 강우는 그런 유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꼬옥 잡아주었다.

“난 오빠만 있으면 돼요.”

“같이 정리하고 이번 주부터 우리 집으로 들어와요.”

“정말요?!”

“당연하죠. 뱃속에 아기도 있는데.”

강우와 함께 살수 있다는 생각에 유라가 한껏 기뻐하며 좋아했다. 그렇게 강우의 차는 유라의 원룸을 향해 달렸다.

* * *

“정리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하루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짐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틀 연속 의도치 않게 도원의 오피스텔에서 자는 바람에 짐 정리를 일절 하지 못했다.

띠리링.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

발신자를 확인하니 아침이었다. 저번에 본가에서 본 이후로 연락을 못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평소 반갑던 언니의 전화가 왜일까 오늘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응.”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대고 받으며 손은 여전히 짐 정리를 했다.

-뭐해? 요새 연락도 없고?

“아… 그냥 집 정리 좀… 왜?”

-옆에 강우 있어?

“아니.”

-대박인 거 알아냈어.

“뭔데?”

-차 과장. 그때 그 변한다는….

“응.”

-예전에 우리 할머니 요양원에서 본 적 있어.

“뭐?”

-하늘빛 요양원. 거기서 봤어.

아침의 말에 짐 정리를 하던 하루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서 많이 봤다 했지. 잘생겨서 낯이 익더라고. 가끔 왔었어. 기억나? 재원 씨.

“재원…? 아! 그 할머니가 좋아하던.”

-재원 씨 동생이잖아.

“뭐라고?”

하루가 휴대폰을 손으로 고쳐 잡으며 놀라워했다. 아침의 말에 어렴풋이 과거 할머니의 요양원에 자주 오던 대학생이 떠올랐다. 이름은 자세히 기억 못 했었지만 얼굴은 기억했다. 어떻게 잊겠는가 할머니의 생명의 은인이니…

“확실한 거지?”

-그럼. 물어봐. 과장님한테. 그리고 주말에 강우랑 본가 놀러 와.

“어? 알았어. 연락할게. 나 지금 바빠서 끊을게.”

전화를 끊은 하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과거 자신의 할머니와 도원이 만난 적이 있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를 살려준 은인이 도원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형이었다니… 갑자기 죄책감과 함께 마음이 복잡해졌다.

‘알아봐야겠어.’

아무래도 그가 그런 마법에 걸린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하루가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하루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 급하게 만난 인물은 다름 아닌 연호였다. 둘은 하루의 오피스텔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과장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요. 맞죠?”

“아마 그럴 겁니다.”

“차재원 씨… 그러니까 과장님의 돌아가신 친형분 말이에요.”

하루의 입에서 재원의 이름이 나오자 연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맞나요? 저희 할머니를 살려주시고 돌아가신 게.”

“맞아요. 저도 이번에 알아보고 놀랐습니다.”

“과장님도….”

“아니요. 도원이는 아직 모릅니다. 곧 얘기하려 했는데…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도원이가 대리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조심스러웠어요. 그저 도원이가 많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원망했거든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시는 대로 알려주세요. 부탁드릴게요.”

하루의 말에 연호가 매우 슬픈 눈빛이 되어 천천히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9년 전. 하늘빛 요양원

“할머니! 또 나가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거 놔 망할 것아! 집에 갈 거야!”

“아니 글쎄 이젠 여기서 지내셔야 한다니까. 몇 번을 말씀드려요?”

“내가 왜 여기서 살아? 내 집 놔두고?”

“여기서 치료 잘 받으시고 밥도 잘 드셔야 집에 가요.”

“에라이!”

“악!”

하루의 할머니 옥분은 요양원 내에서 심술 맞고 고약하기로 유명했다. 입소한지 1년이나 지났지만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직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할머니! 먹던 숟가락으로 때리면 어떻게 해요?”

요양 보호사가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옥분에게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왔어요? 할머니 밥 좀 드시게 해요.”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에 대학생 봉사자 재원이 왔다. 그 덕에 옥분에게 한껏 시달린 보호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할머니 왜 또 이렇게 심술 나셨어요?”

“시끄러.”

“제가 너무 늦게 왔죠? 죄송해요. 학교 시험기간이라 바빴어요.”

“시험? 밥은?”

“먹었죠. 이쁜 우리 할머니도 밥 드셔야지.”

재원이 다정하게 옥분에게 다가가 숟가락으로 밥을 한 숟갈 뜨며 웃었다. 재원은 유일하게 옥분이 마음을 여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옥분은 지금껏 밥 먹기를 거부하다 재원이 떠먹여 주는 밥은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에 이마를 맞은 요양보호사가 허탈하게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나 없는 동안 심심했죠 할머니? 오늘은 무슨 얘기 해드릴까요?”

“아가 얼굴이 왜 상했어….”

“상하긴요.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렇지 뭐.”

“그깟 공부가 뭐라고! 공부 못해도 돼. 아프지 말어.”

“우리 할머니밖에 없네.”

둘은 진짜 가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이가 각별했다. 재원 역시 옥분이 처음부터 그에게도 숟가락을 휘둘렀었다. 난폭함에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떠난 자원봉사자들이 많았지만 재원은 달랐다. 몇 번이고 옥분의 숟가락을 맞아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아까워. 내 손녀딸하고 딱인데.”

“또 그러신다. 전 여자친구 있어요.”

“내 손녀딸도 이쁜데 봐봐.”

옥분이 품에서 가족사진을 꺼냈다. 자신과 딸과 사위 그리고 아침과 하루, 새벽의 사진이었다. 옥분은 그중 손가락으로 아침과 하루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둘 다 이쁘고 착해.”

“그렇네요.”

재원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사진이었지만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첫째는 근데 남자친구랑 결혼한다고 난리고… 우리 둘째 애가 좋겠네.”

“하하. 할머니 저 여자친구 있다니까요.”

계속되는 옥분에 재원이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사진 속 하루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무척이나 앳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함께 찍은 사진인 듯 사진은 많이 낡아 있었다.

“아까워 아까워.”

“정 그러면 나중에 제 동생 소개시켜 주세요.”

“동생? 그 싹퉁머리 없는 놈?”

“에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에요. 도원이가 얼마나 착한데.”

“착하긴 뭐가 착해. 와도 인사만 빼꼼하고 사라지는 놈이! 안 돼 내 손녀딸이 아까워.”

“많이 외로운 아이에요. 의지할 곳이라고 저밖에 없어요. 다음에 할머니가 많이 이뻐해 주세요.”

재원이 눈꼬리를 크게 휘며 웃었다. 그는 이렇게 웃을 때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언제나 웃는 상을 유지했다.

“할머니 식사 다하셨어요? 목욕할 시간이에요.”

요양보호사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고, 재원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그럼 씻고 오세요. 저는 할아버님들 도와드리고 올게요.”

“안 와도 돼.”

옥분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툴툴거렸다.

“할머니 다음엔 도원이랑 올게요.”

“그놈은 안 데려와도 돼.”

“하하, 제 동생 착해요.”

재원이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가 가는 게 아쉬웠지만 옥분은 붙잡지 않았다.

다음날 옥분을 먼저 찾은 건 아침과 하루였다.

“할머니!”

“왔네. 우리 강아지들.”

옥분은 가족들이 오면 순한 양이 되었다. 숟가락을 더 이상 휘두르지도 않았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