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돌이키지 못할 하룻밤

도원의 말에 모두들 일제히 그를 응시했다.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도원은 꿋꿋하게 하루만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하루도 똑같이 응시하고 있을 때 대훈이 둘 사이를 끼어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과장님이 모르셔서 그런데 이미 5년 전부터 암묵적으로 금지입니다.”

“그래요?”

“네, 이미 한번 있었대요. 안 좋게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5년 전 사내연애 후 도망치듯 퇴사한 신입사원 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저 입사할 때 만나는 과장님들마다 저한테 조심하라고 했어요. 절대 사내연애 하지 말라고.”

“근데 그럼 뭐해요. 아마 비밀로 많이들 만날 텐데.”

마지막 대훈의 말에 내내 좌불안석이던 연호가 힐끔 하루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좀 전의 도원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이 자식은 어쩌려고 송하루 씨 신경을 건드려….’

자신이 을인 입장에서 까부는 도원이 신경 쓰였다. 발로 툭툭 도원에게만 전달되도록 그의 발을 건드렸다.

“…으쯔… 려고 그래… 가만… 있어….”

“물론, 지극히 개인사고 남녀가 눈이 맞아 사귄다는데 제가 뭐라 왈가왈부할 건 아니죠. 그렇지만….”

꿀꺽.

도원의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연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기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회사 업무에 지장을 줄 수 도 있고 또….”

“전 과장님 말씀이 이해가 잘 안가네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루가 냉담히 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부분이 말이죠?”

“전부 다요. 보기가 어느 부분이 안 좋죠? 회사 업무에 지장을 준다고요? 10대 어린아이들 아닙니다. 공과 사 구분할 줄 알고 업무에 크게 지장 줄만큼 회사일 나 몰라라 하면서 연애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죠?”

“물론 다는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회사에서 연애한다고 색안경 끼고 보지 마세요. 사람 마음이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면 좋겠죠. 그게 안 되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함께 하게 된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마세요. 아닌 사람도 많으니.”

“폄하할 생각 없습니다. 단지 대훈 씨 말대로 5년 전 사내연애 후 퇴사한 그들처럼 또 누군가가 그렇게 될 거란 생각에 너무 앞서 걱정한 겁니다.”

“그분들은….”

하루는 자신과 같은 입사 동기였던 유진 씨를 떠올렸다. 자신보다 4살이나 어렸고, 그녀에겐 자신과 마찬가지로 첫 직장이었다. 함께 의지하며 같이 밥도 먹어 몇 번 대화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애사심이 강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일에 자부심도 느꼈다. 자처해서 남들이 기피하던 야근까지 할 정도로…. 그런 그녀가 8개월 만에 그만둘지는 상상도 못했다. 헤어진 후 도망치듯 회사를 나간 건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이었다.

“전 사내연애가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 안 해요. 절대. 유진 씨는 회사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일 하는걸 즐거워했어요. 사람들의 수많은 추측과 소문, 뒷담으로 떠난 거지….”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들었다. 자신 또한 사내연애를 해서일까? 아니었다. 사내연애는커녕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사내연애를 나쁘게 볼 생각은 추후도 없었다.

‘하루 씨는 혹시나 사내연애 조심해요. 이렇게까지 이게 욕먹을 일인지… 난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돼요. 단지 만나고 헤어진 걸로 이렇게 뒷말 나오는 거 참 유치하네요. 하루 씨랑 같이 의지하고 친해져서 좋았어요.’

퇴사하는 날 유진 씨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하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가게 밖으로 나갔고, 혜주와 대훈은 숨 막히는 분위기에 달아오르던 술이 깨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마세요. 아닌 사람도 많으니.’

연호는 도원과의 대화에서 하루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마치 죽은 재원과 그녀가 비슷해 보였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했다. 회사 일에는 전혀 관심 없던 그는 아버지와 자주 부딪혔고 말다툼도 잦았다.

‘아버지 미래도 한 아이의 엄마고 저한텐 소중한 사람이에요. 미혼모라고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마세요. 아닌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

미혼모 봉사활동에서 만나 여자친구가 됐던 미래를 아버지가 반대하자 재원이 했던 말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던 그가 아버지와 많이 부딪히게 된 계기의 여자였다.

“실수하신 거 같은데요. 과장님?”

연호가 말없이 앉아있는 도원에게 말했다.

도원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자신이 굉장히 유치하게 굴었다.

‘젠장…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하루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그녀에게 사과하기 위해 뒤따라 나갔다. 하루가 아니어도 사내연애가 거슬리는 건 맞았다. 아무래도 한 공간에서 연애를 하다 보면 온전히 일에 집중하는 건 무리니까. 하지만 아니라 하더라도 온전히 회사 일에 열정을 쏟는 사람은 드물다. 그걸 알면서도 어린애처럼 하루와 신경전을 벌인 게 후회됐다. 화장실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후… 생각까지 어린애가 돼버리면 어쩌잔 거냐….”

머리를 한껏 헝클어트렸다.

‘…사람 마음이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면 좋겠죠. 그게 안 되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함께 하게 된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마세요. 아닌 사람도 많으니.‘

도원 또한 방금 전 가게 안에서 하루의 말이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의 의미를 몰랐을 거다. 아니 들으려 조차 안 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현재 마음을 꿰뚫어보고 하는 말 같아 괜히 마음에 찔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화난 듯 말하다 이내 슬픈 눈으로 생각에 잠기던 그녀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이내 하루는 화장실에서 나왔고, 앞에 서서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도원을 발견한 후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과장님 뭐 하세요? 담배 때문인가요?”

“아뇨. 담배는 안 피워요.”

“끊으셨어요?”

“그건 아니고….”

하루가 담배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앞에서 피지 않았다. 가게를 나갈 때와 달리 하루는 기분이 나아져 보였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

“아니에요. 과장님 의도는 충분히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과장님 회사니까요. 저라도 신경 쓰일 거예요.”

“…….”

하루의 다독이는 듯한 말에 도원은 좀 전보다 더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한없이 깊은 포옹력과 이해심. 그리고 자상함 도저히 이 여자는 어디까지 이 많은 감정들을 유지하고 베푸는 걸까?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이는 하루를 보며 도원은 자신이 마냥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감히 자신은 넘볼 수 없는 여자라는 걸 새삼 한 번 더 가슴 깊이 깨달았다.

“대리님. 뭐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네.”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건지 차 과장은 한껏 긴장돼 보였다.

“김강우… 과장.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

“네??”

갑자기 강우에 대한 마음을 묻는 질문에 애써 식힌 볼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건 왜….”

“아까 대리님 말씀 듣고 궁금해졌어요. 대리님은 무척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게 보여요. 단단… 하다고 해야 하나.”

“…….”

“잃지 않으려고 관계에 대해서 무척 애쓰고 노력하는 게 느껴져요.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고…?’

도원의 말은 그동안 자신이 강우를 향해 해온 수많은 노력들이 인정받는 기분을 들게끔 했다. 맞다. 그의 말대로 무던히도 강우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마치 벽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화도 났지만… 강우가 아닌 도원이 그걸 느끼다니…. 하루는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작 알아주길 원하는 사람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알아주다니.

“왜… 웃으세요?”

“글쎄요… 어디 가라… 그냥 강우여서 좋았어요. 뭘 하든 좋았고, 그 사람이라서 특별했어요. 그게 다예요”

“…….”

“말하고 나니 오글거리네요.”

하루의 말에 도원이 피식 웃었다.

“복 받았네요. 김강우 과장은.”

“그렇죠? 그걸 강우가 알아야 할 텐데….”

“분명 알 겁니다. 김강우 과….”

“하루야.”

도원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작스러운 익숙한 음성에 하루의 뒤편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언제 도착했는지 강우는 가게 앞에 도착해 뒤돌아있는 하루를 향해 말했고, 하루는 뒤돌아 데리러 온 그를 놀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루라니….’

힐끔 도원과 강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강우는 도원이 자신과 비밀로 연애 중이란 걸 모르는 줄 알고 있다. 그런 그의 표정과 말은 도원에게 자신들의 사이를 알리겠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강우야….”

“놀라지 않는 거 보니 과장님께선 알고 계셨나 봅니다.”

“…….”

“저희 연애 중인 거.”

한껏 위풍당당히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강우는 하루에게 다가와 팔로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네. 김강우 과장이 이렇게 티를 많이 내니 모를 수가 없더군요.”

하루의 어깨를 잡고 있는 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끼고 하루가 강우를 힐끔 올려다봤다. 참고 있었지만 그는 매우 화가 난 게 느껴졌다. 화가 나면 일렁이는 그의 눈썹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강우야.”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그제서야 힘주고 있던 강우의 손이 자연스레 풀렸다.

“가자 하루야. 많이 마셨어?”

“아니.”

방금까지 눈빛에서 금방이라도 불이 내뿜어져 나올 듯 도원을 보더니 하루를 향한 눈빛이 청량해지고 따뜻해졌다.

“들어가서 가방 가져올게. 잠깐만.”

서둘러 하루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에 그들을 지켜보던 도원도 다시 가게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차 과장님.”

자신을 부르는 김강우 과장의 부름에 도원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네.”

“제 여자친구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알고 있….”

“네. 알고 계시니 하루한테 사적인 감정 보이지 마시죠.”

강우가 단호히 경고하듯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차가운 도원의 눈빛이 더욱더 시린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다. 그의 눈빛을 보며 강우 또한 다시금 매서운 눈빛으로 변했고, 그렇게 둘은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방금 전 강우는 하루를 데리러 왔을 때 가게 앞에서 둘의 모습을 쉽게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도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처럼 하루를 향한 그의 눈빛이 또 한 번 거슬렸다.

‘그래. 저 눈빛.’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질투라면 질투 일수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말해두기로 결심했다. 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랑 저 동거 중이고, 내년엔 결혼도 할 겁니다.”

“김강우 과장은 송 대리님 어디가 좋죠?”

뜻밖의 말에 강우가 주춤했다.

‘갑자기 뭔 헛소리지?’

“제가 그걸 왜 과장님께 말씀드려야 하죠?”

“송 대리님이 그러더군요. 김강우 과장이 좋은 이유. 그냥 김강우 과장이라서 좋다던데…. 김 과장도 그런가 해서요.”

“그렇다면 어떻고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이미 제 여잔데.”

도원이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지금껏 당당한 모습으로 말하던 강우가 살짝 흐트러졌다.

‘왜 웃지?’

도원은 강우의 대답에 강우가 하루에게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하루를 대함에 있어 강압적이고 거칠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하루가 자신의 여자라고 믿고 있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데….

“부디 끝까지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가자 강우야.”

도원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다시 가게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하루가 가방을 메며 나왔다.

“내일 봬요. 대리님.”

“네. 내일 뵙겠습니다.”

“….”

좀 전까지 차디찬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던 도원의 눈빛이 하루를 향할 땐 사그라들며 한결 부드러워졌다. 강우의 기분이 다시 안 좋아졌다. 들어가는 도원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좀 전의 그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했다.

‘부디 끝까지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복잡했다.

‘뺏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상당히 불쾌했다.

“강우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가게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강우를 보며 하루는 의아했다.

혹시 둘이 무슨 이야기라도 한 걸까? 불안해서 빠르게 짐을 챙겨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강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우는 계속해서 도원과 했던 대화가 거슬리게 자꾸 생각났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의 비웃는 표정이 떠오르면서 한껏 짜증이 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등에 힘줄이 섰다.

“하루야.”

자신을 부르는 강우의 목소리에 창밖을 응시하던 고개를 돌려 강우를 바라봤다.

“응.”

“차 과장이랑 어울리지 마.”

“뭐?”

“웬만하며 엮이지 말라고.”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어딨어. 내가 싫어 그냥.”

말을 하면서 힘주고 있던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하루는 이유를 물어볼까도 했지만 술기운과 피곤함에 질문을 미루기로 했다.

그런 하루를 강우는 한번 쳐다봤다. 이쯤이면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물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말에 피곤하기만 한 듯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녀가 많이 취해서 그렇다고 넘겼다. 그러다 이내 오늘 만난 유라가 생각났다.

“하루야. 유라 씨 말이야.”

“응?”

유라 씨라는 말에 고개가 자동으로 꼿꼿이 세워졌다. 동시에 술기운도 반쯤 날아갔다.

“우리 회사 계약직으로 일하면 어떨까 해.”

“계약직?”

계약직이란 말에 경리부서가 떠올랐다. 사람을 구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강우가 거기까지 생각한 건 적잖이 놀라웠다.

“응. 경리부서 사람 뽑는데 어려운 업무도 아니고. 괜찮은 것 같아서.”

“업무 경험이 아예 없는데 괜찮을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배우다 보면 괜찮을 거야. 이력서도 주고 왔어.”

“신경 많이 써주네….”

“응. 안타깝잖아. 상황이.”

‘그래서 오늘 연락이 없었구나….’

또 한 번 강우에게 실망했다. 이미 알아보고 그녀에게 먼저 말한 것도, 그녀를 만나느라 연락도 없었던 것 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