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아이가 되었다.

“송 대리 퇴근 안 해?”

“아, 마무리만 하고 가려고요. 먼저 퇴근하세요.”

“자기는 항상 너무 열심이야.”

“그러니까. 그럼 수고해.”

모든 직장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퇴근시간 오후 6시를 지나 30분이 더 흐른 시각. HK 신입사원들은 각자 자신들의 상사와 눈치 게임을 하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각 부서별 대부분의 과장들과 대리들 역시 빠르게 자리를 비워나가고 있었다.

‘후… 나도 마음 같아서는 칼퇴 하고 싶다고요….’

하루 또한 퇴근하는 그들 틈에 섞여 당장이라도 함께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아직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리저리 눈치 보며 의미 없는 키보드만 두드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직원들의 대부분이 퇴근한 사무실엔 하루를 포함해 3명뿐이 남지 않았다. 영업부 최윤식 부장과 김강우 과장.

힐끔.

구석자리에 위치한 최윤식 부장을 봤다. 그는 딱히 할 일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 바쁘게 마우스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고, 아마도 그는 지난번 하루에게 들켰던 것처럼 사행성 게임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고개를 작게 저으며 다음 눈길이 닿은 곳은 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는 김강우 과장이었다. 방금 전까지 최 부장을 보던 씁쓸했던 눈빛이 청명하게 바뀌었다.

‘바쁜가.’

뭐가 그리 바쁜지 그는 양쪽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책상 위엔 서류 뭉치들이 탑을 쌓아있었고, 타다 놓은 아메리카노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식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파티션 너머로 그녀가 강우를 훔쳐보고 있을 때 마침내 일을 끝냈는지 그는 개운한 표정으로 연신 모니터에서 거두질 못했던 눈길을 하루에게 돌렸다.

‘나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하루와 눈이 마주친 강우는 옅게 짧은 미소를 짓고는 입모양으로 하루에게만 비밀스럽게 전달했다.

끄덕.

“퇴근하겠습니다.”

강우가 가방과 겉옷을 챙겨들며 일어나 게임에만 빠져있는 최 부장에게 인사 후 큰 보폭으로 사무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5분 뒤 하루 또한 재빨리 컴퓨터 전원을 끄며 진즉에 갈아 신은 신발을 제외하고 겉옷과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퇴근하겠습니다!!”

하루가 최윤식 부장만이 남은 사무실에 목청껏 인사를 외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아있던 최윤식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회사를 빠져나온 하루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듯한 사람처럼 열심히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회사 근처 사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내 가까워진 사거리에는 익숙한 흰색 승용차가 비상등을 켜고 주차돼 있었고 하루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차를 향해 달려갔다. 주변에 혹시 남은 회사 사람들이 있는지 철두철미하게 확인 후 보조석에 몸을 실었다.

“하, 힘들다. 힘들어.”

차에 몸을 싣자마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오늘의 퇴근 과정이 고단했음을 운전석에 앉아있는 강우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자. 이 고생도 얼마 안 남았어.”

“응.”

강우는 그런 하루가 귀여운 듯 바라본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말했고, 그 덕에 기분이 풀린 하루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그 모습에 강우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핸들을 돌려 목적지로 향했다.

그는 사무실 내에서 가장 큰 키에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콧대,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이목구비로 자칫 위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그와 상반된 자상하고 세심한 성격으로 처음 보는 이도 다가가기 어렵지 않은 성향의 사람이었다. 왁스로 깔끔하게 고정된 헤어스타일에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긴 정장 바지 핏은 그를 더욱더 깔끔하고 선한 인상의 남자로 느껴지게끔 했다. 덕분에 사무실 내에 강우를 짝사랑하는 여직원들이 꽤 많았다.

하루는 그런 강우를 향한 여직원들의 마음에 간혹 작은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질투가 무색하게 하루 또한 미인이었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큰 키에 하얀 피부 청초하면서 선한 눈매에 웃으면 눈웃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머리는 진한 흑발에 허리까지 오는 긴 웨이브 진 머리를 하고 있었고 큰 키에 비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야리야리한 몸매였다. 오죽하면 이런 둘을 사내 직원들이 잘 어울린다며 밀어주는 분위기도 몇 번 형성됐었다. 이미 그들이 비밀 사내 연애 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따로 퇴근할까?”

놀리듯 강우를 바라보며 하루가 말했다.

“뭐야? 이 배신자. 언제는 꼭 같이 퇴근해야 내 얼굴도 바로 맘껏 보고 좋다며.”

이번엔 강우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워. 강우가 이리 애교도 많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이 모습에 힘들어도 견디지.’

“풉. 장난이야. 역시 잘생긴 우리 자기 얼굴 바로 맘껏 봐서 좋네. 에이 조금만 더 참지 뭐!”

장난스레 말하자 강우가 피식 웃었다. 이처럼 매번 퇴근시간마다 미션 임파서블 버금가듯 눈에 띄지 않게 퇴근 미션 고초를 겪은 지도 벌써 6년. 하루와 강우는 비밀연애와 동시에 동거 중이다. 스무 살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서 만나 2년을 친구로 그 후 10년 넘게 연애 중이다. 함께 일하고 있는 현재의 건설회사인 HK 그룹은 성장 중인 중견기업으로 강우가 1년 먼저 입사 후 다음 해에 하루가 입사해 강우는 6년 차 영업부서 과장으로 하루는 5년 차 경영부서 대리로 일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들이 비밀로 연애를 시작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하루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그 해에 나이 많은 기획부 부장과 경리부서 어린 신입사원이 사내연애를 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게 그들은 툭하면 직원들의 안줏거리가 되었고, 결국 6개월의 연애 끝에 헤어지면서 어린 신입사원은 도망치듯 퇴사했다. 그 모습이 이제 막 같은 신입사원이었던 이들의 눈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반드시 비밀로 연애하자고 다짐했다. 더군다나 하루와 강우는 동거까지 하지 않는가. 그렇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후.’

하루는 사내연애의 고달픔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다 이내 털어 버린 뒤 고개를 돌려 운전에 집중 중인 강우를 바라봤다. 강우는 꽤나 회사 일이 힘들었던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왁스로 고정시킨 앞머리는 반쯤 흘러내려 흐트러져 있었고 목을 쬐는 셔츠가 답답했는지 단추는 두어 개가 풀어져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도 많은 날이었는데 그러게 어제 일찍 자자니까…. 잠도 못 자고 피곤하지?”

“괜찮아. 어젯밤에 하루 네가 적당히 예뻤어야지.”

강우의 훅 들어온 거침없는 말에 간밤에 그와의 잠자리가 생각나 하루는 금세 귀까지 빨개졌다.

‘하여튼 능구렁이….’

하루는 그의 뺨을 쓸던 손을 멈춘 채 강우를 살짝 흘겼고, 그런 하루가 귀여운 듯 강우는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당혹 시키는 게 즐거운 듯 보였다. 하루가 강우의 볼을 잡아당기며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을 때 어느덧 차는 익숙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함께 집에 들어와 먼저 씻고 나온 하루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론 미처 다 말리지 못한 젖은 머리칼을 흔들고 다른 한 손으론 자신을 반기는 고양이 초코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을 들은 강우는 이미 원인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하루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새로 오는 사람 때문에 그래?”

멈칫. 머리칼을 정리 중이던 하루의 손이 멈췄다. 아무래도 같은 직장이어서 그런지 강우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아니 뭐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안….”

하루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정말 신경 쓰이지 않나? 아니 정말 신경이 쓰인다!!’

다음 주에 새로 부임하는 과장이 그것도 하루의 직속 상사가 대표 아들이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쓰이지?”

“응. 안 쓰인다면 거짓말.”

하루는 오전에 있던 회의가 마무리될 때 들었던 조 부장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여러분 다음 주 월요일부터 우리 회사 경영 부서에 새로운 과장과 신입사원이 옵니다. 음… 이미 모두가 은연중 알고 있듯 과장 자리에는 대표님 아드님으로… 너무 불편해하지 말고 서로 잘 생활해 봅시다.’

말을 마친 부장은 힐끔 토끼 눈을 한 채 굳어있는 하루를 보고 빚쟁이에게서 도망치듯 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후…. 심지어 나이도 어린 데다 성격도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아니 이미 너무 불편한 존재인데 그렇지 않게 생활하는 게 가능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많이 불편하고 싫을 거야.”

싫은 수준이면 괜찮았다. 유일하게 과장 자리가 오랜 공석으로 비어있는 경영지원부서. 아직은 내 몫은 아니다 생각하며 열심히 하면 언젠가 저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가며 열정을 쏟아 부어 일했는데 그 자리에 새파랗게 어린, 그것도 대표 아들이 바로 들어오다니. 하루는 그동안의 고생과 노력이 물거품 같아졌다. 첫 직장 누구보다 애사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회사였다. 그래서 결혼까지 미루고 다닌 회사였는데 애초에 그녀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표 아들이면 다야?’

마저 말리던 머리를 털며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데 탁자 위 놓여있던 강우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 아버지]

액정에 찍힌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강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내 전화를 받는 그를 보며 하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

-넌 엄마가 아픈데 통 소식이 없냐?

“죄송해요. 요새 바빴어요.”

-됐고 들러라. 너희 엄마 허리 아프다 그런다.

뚝.

일방적인 통보였다. 통화가 끊어지고 꺼진 휴대폰 액정화면만 바라보던 강우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 하루야. 본가에 좀 다녀와야겠다.”

미간을 찌푸린 채 매우 미안하다는 듯 강우가 하루를 향해 말했다. 티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발신자를 본 순간 찡그려진 하루의 표정을 강우가 봤는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버려진 강아지 같은 슬픈 눈을 하고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하루도 살짝 미안해졌다.

“응 다녀와 자고 내일 와도 돼. 그걸 바라실거야.”

하루의 손을 잡고 있는 강우의 손을 양손으로 포개어 함께 잡아주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그래 얘기 다 못 들어줘서 미안해. 전화할게.”

강우는 아직 갈아입지 못한 옷에 겉옷과 차 키만 다급히 챙긴 뒤 빠르게 집을 나섰고, 홀연히 떠난 그의 빈자리에 현관문만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강우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매일 아픈 곳을 만들어가며 찾아오길 바라시는 아들 바라기 부모님. 매번 갈 때마다 잘난 아들 덕 좀 보자며 용돈과 이것저것 가전 살림을 바꿔 달라 요구하시는 분들이라 강우나 하루나 이래저래 골치가 아팠다. 바라기만 하는 부모님께 한 번쯤 냉담해질 법도 한데 그는 늙은 부모님이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냐며 말 한마디 못하며 늘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역시 오늘도 그는 효자다.

‘이러면 같이 퇴근한 이유가 없잖아….’

강우와 좀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하루는 투덜거리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렇게 그에게 퇴짜 맞은 날 술 생각이 절로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어 열어본 냉장고에는 그녀를 반겨야 할 맥주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다 마신 거지. 웬만하면 귀찮아서 사러 나가지 않았겠지만 금요일 저녁 이렇게 우울한 날에 맥주를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견디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갑자기 웬 비가….’

빠른 판단 후 나갈 채비를 했다. 어렴풋이 거실 창문에 비치는 밖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에 더욱더 귀찮았지만 얼마 내리지 않는 비에 더 거세게 내리기 전에 얼른 갔다 오자 생각하며 빠르게 얇은 겉옷을 챙겨 집 앞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시끄러운 술 집안.

각양각색의 화려한 조명 아래 여기저기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하며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우와….’

지나다니는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는 은은한 갈색 빛이 자연스럽게 도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은 그가 반쯤 고개를 들자 화려한 제 모습이 온전히 모두 드러났다. 남자다운 짙은 눈썹이지만 선한 눈매와 오뚝한 코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목구비에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다부진 몸을 한 도원이었다. 그는 술자리 내내 의자에 기대앉아 기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만 만지며 들여다보았고, 자신의 무리들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양가 없는 대화에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그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들어댔고, 더 있어봤자 피곤하기만 하겠다 판단 후 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어디 가요?”

내내 말없이 앉아있던 도원이 일어서자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혜라가 손목을 재빨리 붙잡으며 물었다.

“재미없어.”

“아 왜요. 더 놀다가요…!”

탁.

그런 혜라의 손이 귀찮다는 듯 도원이 잡혀있던 손으로 무심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자신을 붙잡고 있던 혜라의 손 쪽으로 향했다. 차디찬 한겨울 같은 그의 눈빛에 혜라가 움찔했다.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는 혜라는 그에게 내쳐진 손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재미없다고. 간다.”

도원은 인파를 비집고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아있던 일행들은 날카로운 도원의 행동을 지켜만 보다 이내 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 혜라를 향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 재수 없는 새끼.”

“냅둬. 다음 주부터 아버지 회사 나간다고 징징거리는 거야.”

“혜라야. 우리랑 놀자 저런 놈 놔두고.”

‘앞에선 말도 못 하면서….’

하지만 오히려 혜라는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아냥거릴 뿐 그들에게 관심 없었고, 그저 멀어져 가던 도원이 나간 출입문만 애처롭게 바라봤다.

추적추적.

술집에서 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가지고 있던 우산을 펴고 무작정 목적지 없이 걸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앞에서 여자가 우산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좁은 길이라 서로 조금씩 비켜줘야 했지만 도원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