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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아연의 문자를 보던 주석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비틀어졌다. 다시 K의 목소리에 집중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사망한 운전자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봤는데 기록이 없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벌써 17년 전 사건이니까 그 당시 경찰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죠. 운전자 DNA와 동일한 기록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있으니까 뭐라도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석은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했다, 모친과 자신이 사라지면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 결국 그 사람이 범인일 텐데 그렇다면 누가? 누군가를 의심하기에는 근거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자신의 지나친 상상으로 끝을 맺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바로 이어지는 높은 구두 굽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이서연의 발소리를 기억하는 자신이 싫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의자를 돌리자 걸어 들어오는 화려한 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이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방에 들어왔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퇴사를 각오한 건가?”
주석의 낮지만 차가운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채웠다.
“이 방은 여전하네. 앉을 의자 하나 없고.”
“네가 앉아서는 안 될 의자들뿐이라서.”
“훗! 차갑기도 여전하고.”
싸늘하게 돌아앉아서 모니터에 집중하는 주석의 옆모습을 주시하면서 책상에 걸터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황아연 그 여자랑 무슨 관계야?”
“관심 꺼.”
“어떻게 그래? 오빠가 관심가지는 순간 그 여자가 위험해진다는 걸 몰라?”
“뭐?”
“설마 몰랐다는 말을 할 셈은 아니지?”
잠시 주춤하던 서연이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놀라시기는. 오빠가 그만큼 유명인사 이기도 하니까.”
서연이 긴 다리를 세우고 또각 거리며 방 주위를 돌았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주석의 어깨를 따라 지나가던 손이 남자의 뺨을 감싸고 농염하게 그의 입술을 탐했다. 예상치 못한 여자의 당돌한 행동에 주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빌어먹을! 이서연!”
“난 여전히 오빠 사랑해.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주석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서연의 눈동자에 처연한 눈물이 서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일렁이며 남자를 보며 애원했다.
“훗, 이제 와서 우습다. 미안하지만 이혼녀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짙은 눈빛으로 입술을 비틀고 서연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리고 너랑은 놀 만큼 놀아서 식상하기도 하고.”
서연이 탐스럽게 익은 입술을 잘끈 물었다.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주석을 노려보았다.
“좋아, 하나만 물을게. 황아연에 대한 오빠의 감정… 뭐야?”
“그게 왜 궁금하지?”
“인주석은 여자 꽁무니 쫓을 만큼 한가한 적 없었잖아. 불안해서 지켜볼 만큼 여자에게 진지했던 적 없는 사람이니까.”
주석의 한쪽 입 꼬리가 흥미롭다는 슬쩍 올라갔다.
“훗… 예전과 달라서 질투라도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열 받게 하지 말고 말해!”
주석이 짜증을 참아내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비틀었다.
“황아연은… 그러고 싶은 여자라서. 누구랑 다르게 내가 그 여자 아니면 안 되겠어서!”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서연이 눈을 꽉 감으며 숨을 참았다. 잠시 후 긴 속눈썹을 떨며 눈을 뜨고 용기 내어 물었다.
“사랑…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만 가라. 바쁘다.”
모니터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무슨 말로든 이 남자를 자극하고 싶었다.
“훗! 피는 못 속여. 같은 여자한테 목매는 걸 보면….”
미간에 힘이 주며 고개를 외틀어서 서연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많은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의미야?”
“아하, 오빤 모르겠구나. 나는 다 아는데.”
속을 뒤집는 서연의 섹시한 미소가 따라붙었다.
“경고하는데 화난다고 아무소리나 지껄이지 마라, 이서연.”
“어머 무서워라. 도망가야겠네.”
서연이 장난치듯 웃으며 뒤돌아서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섰다.
“한 가지만 더. 오빠는 사람을 얼마나 믿어?”
“이서연!”
“오빤 내가 최우혁 하고 만나는 것도 몰랐잖아? 그러니까 황아연도 모를 일이라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걔도 결국 최우혁에게 잡아먹히고 말 거야.”
흔들리는 눈빛이 체념한 듯 서연을 노려보았다.
“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 자식은 오빠 것이라면 뭐든 뺏으려 들 걸?”
강한 충격에 뇌가 흔들렸다.
‘서연에 대한 마음이 뭐야? 사랑이야?’
언젠가 주석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사랑 같은 건 모르겠고.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희한하게 취향이 비슷해서? 훗, 그냥… 난 네가 갖는 건 뭐든 내 것 같아서 말이야.’
시니컬한 서연의 웃음소리에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하! 그 여자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겠어.”
“헛소리 집어치고 나가.”
주석이 짙은 눈빛으로 서연에게 경고하듯 으르렁댔다. 더는 참기어려운지 책상에 있던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이랑 이혼했을 것 같아? 게다가 위자료까지 넘치게 챙기면서…. 알면 놀라자빠질 걸?”
주석은 화를 삼키며 멍하니 서연의 입만 보고 있었다. 또 어떤 의미심장한 말이 정신에 혼란을 야기할지 솔직히 두려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궁금했다.
“오빠, 황아연 지키고 싶으면 나한테 와야 할 거야. 미친개 진정시킬 사람은 나뿐이라는 거 명심해. 그리고 예전처럼만 하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맥 빠지는 소리에 긴장이 풀려서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꺼져.”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서연이 들어올 때와 같은 구두소리를 내며 들어올 때와 다르게 환한 표정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참, 내가 말 했나? 지금 황아연 미친 개 같은 내 엑스 허즈번드랑 함께 있는 것 같던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지구가 돈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어지러웠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핸드폰을 들어 아연에게서 왔던 문자를 확인했다.
<이봐 이사님, 나 지금 장소 헌팅 가.>
벌써 두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이 보냈던 답문 이외에 더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어디야?>
짧은 문자를 보내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뇌를 꺼내서 씻어내고 싶을 만큼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우혁은 늘 가깝게 있었다. 형이라 부르며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외국으로 나가버려서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주석이 경영에 참여하고 플랫폼 사업이 모습을 갖추고 수익이 커지면서 영입한 인재가 최우혁이었다.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같은 사람이라서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서연과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형이라 부르며 의지했을지도 몰랐다.
생각은 했지만 단 한 번에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던 말 폭탄들이 무수히 이성을 강타했다. 뇌관을 건드려서 한 개라도 터지면 연쇄폭발을 일으킬 것 같은 무서운 말들을 이서연은 시시하게 뱉어놓고 갔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스멀스멀 전신을 타고 오르는 불안감에 숨고르기를 했다. 주석이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아하, 오빤 모르겠구나. 나는 다 아는데.’
‘그 자식은 오빠 것이라면 뭐든 뺏으려 들 걸?’
대체 뭐야? 뭘 다 안다는 거야, 이서연!
“좆같네!”
주석이 거칠게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묵직한 회전의자가 벽에 부딪친 채 여전히 빙그르르 돌았다.
**
잘 달리던 차가 타르가 죄 벗겨져서 요철이 심한 국도 어디선가 퍼져버렸다. 주변은 숲이었고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우혁이 열어 놓은 보닛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연은 핸드폰을 들고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아니, 아프리카도 아니고 IT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통신이 안 터지는 곳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불현듯 주석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떠올랐지만 거긴 선택적인 영역이라 제 머릿속에서 자신 있게 제외시켰다.
“아하… 나도 몹시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만 알아줘요, 아연 씨.”
봄의 끝자락이라 날씨가 제법 더웠다. 낮이 많이 길어졌지만 서울에서 두 시간을 달려온 거리라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밤이 될 게 뻔했다.
“근데 팀장님, 야외 프로모션을 이렇게 먼 데서 진행해도 사람들이 오나요?”
“야외 프로모션은 당연히 서울에서 해야지. 장소는 호텔 H로 결정됐고.”
“엥? 그럼,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봄바람 같은 우혁의 웃음소리가 보닛 뚜껑 너머에서 불어와서 아연의 귀를 간질였다.
“뭐, 겸사겸사 아연 씨랑 묵혀뒀던 데이트.”
보닛 뚜껑에 가려져서 우혁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아연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나 삐치고 속 터져서 너 때문에 눈 돌아가는 일 없도록 내 말 좀 잘 듣자.’
달달해서 좋아 죽을 것 같던 주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에 애간장이 녹았다.
꼬르륵.
느닷없는 고백에 들떠 밥을 삼킬 수가 없어서 종일 물만 마셨더니 지금에서야 배가 고팠다.
“옘병…. 데이트가 빵이면 좋겠네. 종일 굶었더니 배고파.”
혼잣말 하는 아연의 곁으로 우혁이 손을 털며 다가왔다.
“사실은 프로모션 준비차원에서 OT 진행하려고 장소 확인차 가는 거예요.”
여유 있는 표정의 우혁과 달리 일분일초가 아쉬운 아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유능한 인턴 황아연 씨도 환영하는 단합의 의미도 있겠죠.”
우혁이 타들어가는 남의 속도 모르고 잘생긴 눈으로 요사스럽게 윙크를 했다.
“아… 그럼… 이, 이제 어떡해요?”
그가 큰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하는 아연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목을 잡고 끌었다.
“좀 걷지 뭐.”
“예? 좀 가면 신호가 잡힐까요? 전화가 돼야 긴급출동도 부를 수 있으니까….”
“여기서 한 20분 걸어가면 내가 가보려던 펜션이 나오거든.”
아연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지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 그럼 빨리 가요. 빨리 걸어야 해요.”
“집에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럼요, 있죠. 제가요 보기에는 좀 그런지 몰라도 있을 건 다 있는 사람이거든요.”
인주석을 말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짜증이 밀려들었다. 너는 내게 아무런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풉!”
갑작스런 웃음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아연이 고개를 외틀어 우혁을 올려 보았다.
“옘…. 큼큼, 왜 웃어요?”
“재밌는 말인 것 같아서. 그리고 내가 먼저 아니었나? 나는 아연 씨한테 관심 끌려고 아침마다 일부러 커피 사러 가고 그랬는데, 기억 안 나요?”
우혁이 슬랙스에 손을 찔러 넣고 여유 있게 걸으며 물었다.
“그럼요, 커피 사러 오신 거 당연히 기억하죠. 일부러 오셨다는 건 진짜 몰랐네요. 맞다, 내가 팀장님한테만 쿠키 드렸던 거 몰랐죠? 그땐 많이 설렜는데….”
“그땐…?”
우혁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른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이봐 이봐, 이러니 팀장님 웃음에 여자들이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요.”
“지금은 어떤데?”
“지금도 설레죠. 하늘같은 팀장님이시고 어찌나 다정….”
“나랑 한 번만 만나보면 제대로 설렐 텐데.”
밑도 끝도 없이 전환되는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아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겨보려고 애를 썼다.
“팀장님을 매일 만나면서 충분히 설레고 있어요.”
“그런 거 말고, 남자로.”
너무 놀란 나머지 제 발에 걸려서 넘어질 듯 휘청 이는 아연의 양 어깨를 우혁이 감싸 쥐고 중심을 잡았다. 헝클어져서 눈앞으로 쏟아진 아연의 머리카락을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휘둥그렇게 놀란 예쁜 두 눈망울이 그제야 보였다.
“훗…. 설레나?”
“겨, 결혼 안 하셨어요? 의외네.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시기에 당연히 결혼 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죠. 팀장님 같이 보기만 해도 설레는 분이 노총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우혁은 기분이 좋아져서 과하게 웃었다.
“하하. 아연 씨는 귀엽기까지 한 여자였네. 하하하.”
아연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고 웃는 우혁의 모습을 긴장된 눈빛으로 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날 ‘이연대박’을 설명하던 강 실장님이 말했다.
‘이서연이 우리 시크한 이사님 애인이라는 건 회사사람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는데 어느 날 청첩장을 돌린 거지.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을 하나보다 했더니, 세상에나! 남편이 누군지 알아? 바로 최우혁 팀장이더라니까. 회사에서 제일 알 수 없는 사람이 최 팀장님이야. 그러니까 아연 씨도 조심해.’
아연 씨도 조심해….
이 상황에서 강 실장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거슬린다는 사실이었다.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티, 팀장님? 벌써 30분은 걸어온 것 같은데 어째서 아직 펜션이 보이지 않는 걸까요?”
우혁이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아연을 직시하며 싱긋 웃었다.
“아… 어쩌지? 이 산이 아닌가봐.”
지가 나폴레옹도 아니고….
“반대방향이었나? 다시 가요, 아연 씨.”
헐…. 혼자서 신이 난 듯 보이는 이 느낌적인 느낌이 느낌으로 끝나길 바랐다.
멀쩡히 잘 가던 차가 갑자기 말울음 소리를 내며 우뚝 설 때 알아봤어야 했다. IT초강국에서 무인도도 아닌 곳임에도 불구하고 신호가 터지지 않았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30분을 아연만 쳐다보며 걷는 남자를 보고 눈치 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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