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2)

“그동안 잘 지냈느냐?”

이찬호는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영아를 옅은 미소로 보았다.

“예, 아버님께서도 평안…… 하셨는지요?”

평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긴 송구한 영아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였다. 영아는 한양에 올라오기 전 이모 댁에 머물고 있었다.

“나야 서책에 파묻혀 유유자적(悠悠自適) 지냈지.”

이찬호는 저의 눈길을 피해 다과상 위, 찻잔에 눈길을 묶어 둔 영아에게 들으라는 듯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영아는 긴말을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다. 이 애비가 되레 미안하구나.”

“그 무슨 당치도 않는. 아닙니다. 어찌 아버님께서 미안하다고 하십니까. 소녀가…….”

영아는 그런 말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치도 않는 말이다. 너도 그렇고 이 애비도 그렇고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미안해야 할 이들은 우리 두 사람이 아니라 저들이지.”

이찬호는 영아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

영아는 울컥, 울음이 올라왔다.

“조만간 결판이 날 것이다. 허니 저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혹, 소녀 때문에 아버님 하시려는 일을 단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영아는 제가 걱정하던 게 결국 일어나는구나, 했다.

“한양에서 내가 할 일은 없다. 그러니 너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을 단념할 일 또한 없는 것이다.”

“…….”

이찬호의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 영아였다.

한양에서 할 일이 없다는 말은 영의정에 오르지 않을 거라는 말일 터이다. 허나 자신 때문에 단념할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너의 일과는 별개로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상감마마께서 아버님께 조정에 다시 나오기를 바라시지 않았습니까.”

영아는 왕이 아버지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오래전부터 설득해오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 이찬호는 그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몇 년 전이었다. 그날도 왕에게서 온 서찰을 읽고 있던 그에게 영아는 물었다.

‘아버님은 어찌 전하의 부름을 따르시지 않는 것입니까?’

‘한번 떠나온 것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 병이 생기지. 헌데, 그것은 왜 묻는 것이냐? 한양에 가서 살고 싶은 게냐?’

‘아니어요.’

‘……언젠간 한번은 부름에 따라야 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서찰을 훑으며 낮게 읊조리던 이찬호의 말이 영아의 머릿속에 길게 머물다 사라졌다.

“주상전하의 부름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받았다.”

부름을 따라야 할 날이 지금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순간, 이찬호는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어요?”

영아는 혹여 저를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당연한 생각을 했다.

“그래, 전하께 지금 무척이나 필요한 이다.”

“허면…… 어찌 한양에 오신 것입니까?”

전하께 아버님만큼이나 필요한 이가 누구냐는 말을 뒤로 하고 그의 뜻이 정녕 맞는지 재차 물었다.

한양에 올라오고 나서야 일의 심각성을 알고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음…… 그것이 말이다. 저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다.”

어째 말하는 것이 재미난다는 듯해 보였다.

“생각해보니 이 또한 전하의 뜻이니 이 애비도 부름을 따른 게 되긴 하겠구나. 훗.”

“…….”

영아는 웃음이 실린 이찬호의 얼굴에 마음이 놓이기보다 되레 죄송한 마음이 커졌다.

“……영아야.”

이찬호가 문득 영아를 불렸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예, 아버님.”

영아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 애비는 네가 평생 그 일에 묶여 있지 않았으면 한다.”

“…….”

영아는 뭐라고 답을 못 하고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아픈 상처이고, 잊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에 얽매어 네 인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네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게 이 애비의 바람이다.”

평범한 삶…… 다른 여인네들처럼 좋은 짝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뤄 살아갔으면 한다는 뜻이라는 걸 영아는 모르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가정을 이룬 제 모습을 그려보려 해도 그려볼 수가 없었다. 애써 그려본들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그가 언제나 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악몽일까? 아니면…….

**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어둡고 고요한 방 안의 공기를 뚫고 정석이 물었다.

“…….”

옆에 누운 주원은 입을 다문 채 천장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핫, 정말…….”

정석은 열이 나는지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나 앉았다.

“김 박사 그런 인간으로 안 봤는데, 참 치졸하기 그지없네그려. 아니 어떻게 이 대감도 아닌 그 따님의 치부를 갖고…… 권력이 뭔지, 핫. 그 장인에 그 사위가 딱 맞네. 아주 하는 행태들이 엿 같아.”

“…….”

느리게 끔벅이던 주원의 눈꺼풀이 내려와 올라가지 않았다.

정석은 그런 주원에 말을 멈췄다. 허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대감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실지 걱정이구만…….”

나랏일과 딸, 어느 한쪽만을 택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참으로 이찬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좋은(?) 패였다. 그래서 더 열불이 치밀어 오른다. 마음 같아선 똑같은 방법으로 장순길과 김남수를 밀어 내던지고 싶었다.

흥, 들춰 보면 지들이 더하면서 누구의 치부를 입에 올린다, 만다, 한단 말인가.

어디 들춰 봐?

정석은 어둠 속에서 스륵 나타난 장순길과 김남수를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두 사람의 얼굴이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하아…….”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눈길이 주원에게로 옮겨졌다.

생각할수록 믿어지지 않는 인연이다. 아니 악연이라 해야 하나? 어떻게 그를 납치한 이가 이 대감의 부인이라 말인가. 기가 막혔다. 헌데 더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는 사실은.

“하룻밤 신랑이라니…….”

“…….”

주원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눈을 떴다.

“미쳤지, 어떻게 사람을 납치하여…… 자네도 미쳤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룻밤 신랑이 되어주겠다고 자청할 리 없었다.

“생전 처음 만나, 얼굴도 몰라, 뭣보다 납치를 한 여인인데 순순히 몸을 내주다니.”

정석은 도저히 이해할래야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네.”

“헛.”

세상에, 대변(代辯)해주기까지 한다.

평온하지만 험담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정석은 어이 상실이었다.

대체 그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얼마나 단단히 쌓았기에…….

정녕 마음을 준 걸까?

정석은 강선동이 서찰이 낚아채 갔다는 말에 지나쳐 가는 이들이 쳐다볼 정도로 성(화)을 내던 주원의 모습이 떠올렸다.

저쪽은 어떨까? 주원에게 마음을 주었을까?

만리장성을 홀로 쌓을 수는 없을 터. 궁금하다.

“어딜 가려고?”

생각에 빠져 있는데 주원이 이부자리에서 벗어났다.

“집에 가려고.”

“새벽녘인데?”

어젯밤 늦게까지 정석의 집에서 술을 기울인 두 사람이었다.

“새벽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그러네.”

주원은 다시 누울 생각이 없는지 횃대로 다가가 옷을 걷어냈다.

“그냥 내 집에서 바로 등청하면 될 것을. 사람을 시켜 자고 간다고도 이르지 않았는가.”

“…….”

아무런 말도 않은 채 주원은 옷을 입고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녕 어찌할 생각인가?”

정석은 아까 전 한 물음을 재차 했다.

“그녀를 만날 것이네.”

주운은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말할 것이네. 내가 누구인지.”

“자네 혹, ……말하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눈썹을 꿈틀대며 정석은 문고리를 잡고 있는 주원을 향해 물었다.

이찬호 대감을 위해서라는 명분에 영아를 돕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 보였다.

“…….”

드르륵, 주원은 답을 주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

“경이 궐에 오니 아주 떠들썩합니다.”

왕은 오랜만에 보는 이찬호를 향해 시원스레 웃었다.

“의미 없는 떠들썩함이지요.”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떠들썩할수록 좋은 거지요.”

두 사람은 말을 하며 눈빛으로도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신수(身手)가 훤해지셨습니다. 과인은 매일 고뇌의 시간을 보냈는데 말입니다.”

언뜻 아버지 앞에서 투정 부리는 어린 아들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왕에게 이찬호는 다른 걸 떠나 마음이 편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송구하옵니다.”

농이라는 걸 알지만 이찬호는 피로감이 쌓여 있는 왕의 얼굴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송구하기까지야 없지만 참 너무했습니다. 과인이 그리 청을 했는데 한 번도 들어 주지 않고 말입니다.”

“…….”

뭐라 할 말이 없는 이찬호였다.

“뭐 그래도 덕분에 큰 물고기를 잡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잘되겠지요?”

왕은 이찬호를 보며 확신을 달라, 청했다.

“잘되게 해야겠지요.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인해 한 세력이 변하고 바뀌는 것은 긴 인고가 필요로 하는 일이니 말이옵니다. 지금 그가 전하와 함께한다고 하여 계속 함께한다는 보장은 할 수 없나이다. 인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옵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옥좌에 앉아 계시는 동안 계속될 것이옵니다.”

바람과 달리 그리 밝지 않는 소견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지요. 부왕께서도 그리 노력하셨거늘 끝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시고 승하하셨습니다. 내 편만 아니라 반대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라 하시었는데 정작 저들은 말 같지 않는 말을 하고 있으니…….”

왕은 선대왕이 생각하며 그리움의 얼굴을 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말 같지 않는 말을 하는 이들…… 필연적으로 병판 장순길이 먼저 떠올려진다. 그는 양 세력 간의 균형을 잡으며 정사(政事)를 펼치려 하는 왕을 자꾸만 흔들어대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 하고 있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모든 세력이 장순길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대감은 장순길 대감과 달리 편협(偏狹)하지 않고 세상의 넓게 보는 사람입니다. 염려 마시오소서.”

이번에는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이찬호였다.

그는 항시 경계해야 할 면과 긍정적인 면을 같이 말하며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과인을 대신해 한덕봉 대감을 설득해주어서.”

“아니옵니다. 소신은 그저 전하의 뜻을 전했을 뿐이옵니다.”

이찬호는 낙향을 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한덕봉이 대제학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였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사에서도 떠났고, 더 이상 소모적인 대립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 이찬호는 그에게 서찰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면 그냥 안부나 주고받자고 말이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헌데 한덕봉이 보름이 지날 때쯤 답신을 보내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서찰이 오고 감이 몇 년 동안 이어지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자신이 가진 정치적 신념,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이야기도 자연스레 서찰 안에 녹아들었다.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도 서로의 의견에 공감하며 해결방안을 도출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두 사람 간의 안부(?) 서찰은 끊어지지 않았고 왕도 어느 순간에 거기에 동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