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키스 키스

출근길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 안에서 선 채로 꾸벅꾸벅 졸던 보나는 바로 옆에서 뉴스를 시청 중이던 남자분의 핸드폰 화면에 ‘민승연’이란 글자가 뜨는 것을 보고 번쩍 눈이 떠졌다.

<민흥그룹 민승연 프로포폴 투약 사실 폭로>

퇴사한 서민지가 신문사에 승연의 프로포폴 투약 전력을 폭로했다.

비서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출근한 승연에게 보나는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실이야.”

대답을 듣는 순간 보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 휘청거렸다.

이렇게 되면 민동훈을 흠집 낸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여성들이나 마치 연예인 보듯 승연을 흠모하고 응원하는 것이지, 사실 젊고 잘생겼다는 것은 대기업의 CEO로서 플러스라기보단 마이너스 요인으로 치부되기에 십상이다.

그런 데다 약물중독까지 있다면 그런 사람을 어느 주주가 CEO로 인정하고 싶겠는가?

정말이지 보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비서실에선 대책회의가 열렸다.

조 부장을 포함한 비서실 직원들은 승연에게 프로포폴 투약 사실을 인정하지 말고 대신 서민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서실에선 재빨리 승연이 프로포폴을 투약한 병원의 원장과 간호사들을 입막음했다. 특히 서민지와 함께 이번 폭로에 가담한 박 모 간호사의 경우, 그녀의 부모를 통해 접촉 및 회유하였고 그 결과 현재 일본에 피신해 있는 박 간호사는 심경변화를 일으켜 앞으로 절대 추가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반면에 보나는 투약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처벌을 받자고 주장했다.

“이사님은 초범이니까 집행유예가 나올 거예요. 문제는 윤리적인 비난인데, 만에 하나 이것을 감추다 발각이라도 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론도 투약 사실을 부정한다고 무조건 믿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그럴 바에 차라리 깨끗이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오히려 이사님의 이미지에 더 플러스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 부장은 반발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님.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이 어느 땝니까? 한참 승계 작업으로 민감한 시기 아닙니까? 그런 시기에, 만약 투약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민동훈 사장 측만 좋은 일 시키는 겁니다. 절대 인정하면 안 됩니다.”

보나도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이게 서민지 혼자 벌인 일일까요? 아니에요. 민동훈 사장과 같이 벌인 일이라고요. 그렇다면 아마 조 부장님이 말씀하신 그런 대응까지 저쪽에선 이미 다 예상하고 터뜨렸을 겁니다. 간단히 간호사를 매수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 추가 사실이 폭로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음….”

승연은 선뜻 결정을 못 내렸다.

보나를 제외한 비서실 모든 직원이 조 부장의 의견을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나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 조 부장의 말마따나 지금은 승계 작업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한참 동안 묵묵히 말이 없던 승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조 부장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일본에 있다는 그 간호사 확실하게 통제하고 이에 맞춰 준비해줘요.”

결국 승연은 그렇게 결정했다.

**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보나는 씻자마자 바로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얀 사슴 조각상이 그런 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연 역시 퇴근 후 바로 샤워 후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검은 사슴 조각상이 그런 승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보나가 먼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는 승연과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며칠 전 그와 첫 키스 하던 순간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때는 태블릿PC를 꺼내놓고 승연에게 업무보고를 했지만 이번엔 보나는 문서 창을 닫아버리고 음악 파일을 플레이시켰다. 그가 좋아하는 쇼팽이 흘러나왔고 보나는 이어폰을 꺼내 그와 한쪽씩 나누어 썼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승연이 묻자 보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쉬자고요.”

그리고는 승연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승연은 마치 평상시 다른 직원들 대하듯 사무적인 말투로 보나를 대했다.

보나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보나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사실이었다. 꿈에서 벌어진 일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아무튼, 꿈에선 운전해주는 기사도 없었고 오직 차 안엔 보나와 승연 둘 뿐이었다.

보나는 승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했다.

‘이럴 때 포근하게 안아 주면 좀 좋아?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까?’

그런데 아직 승연은 꿈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승연의 모습은 오로지 보나의 꿈이 만들어낸 모습일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보나는 승연에게 투덜댔다.

“난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단 말이에요.”

보나의 마음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그 순간 승연이 꿈속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보나를 보며 승연은 잠시 당황했다.

“이사님. 전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구요. 이사님은 안 그러세요?”

보나는 이제 진짜 승연이 꿈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승연은 투덜대는 듯한 보나의 모습이 귀여웠다. 평소에는 긴장한 얼굴로 꼼꼼하게 자신의 뒤를 챙기더니 갑자기 이렇게 애교를 부리다니. 무척 낯설었지만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데?”

승연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우리 여기서 키스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나지.”

기억나고말고.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나는 연애 경험이라도 있지 승연은 모태솔로였다.

“그럼 또 해요. 우리.”

보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쭈욱 내밀며 눈을 감았다.

승연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프로포폴 사건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미안.”

승연은 솔직하게 이러한 심정을 고백하고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보나의 모습이 일렁이더니 자신의 몸과 마음도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사님? 이사님!!”

보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승연을 소리쳐 불렀다. 보나의 눈에도 승연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지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왜 이래요?”

그것은 승연도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자꾸만 이 꿈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나 여기서 나가야 하나 봐.”

“안 돼요!”

승연이 소리치자 보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를 붙잡으려 했다.

“가지 마요!”

승연은 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픈 눈으로 말했다.

“미안.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

.

.

“이사님! 이사님!”

보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깼다.

“헉… 헉….”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보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벌컥벌컥 찬물을 마시고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방금 전 꿈을 다시 회상했다.

아쉬운 것이 많았던 꿈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승연의 걱정스러웠다.

시름에 잠긴 얼굴로 흐릿하게 사라져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잉~ 지잉~

보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느라 핸드폰 진동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참 후, 조금 진정이 되고 다시 자기 위해 침대에 들어가 몇 시인가 하고 핸드폰을 쳐다본 보나는 깜짝 놀랐다.

승연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20분 전인 새벽 3시 10분이었다.

보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승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받았다.

[보나 씨. 나 때문에 깼어요?]

“아니요. 깨어 있었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러더니 잠시 동안 승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보나는 다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결국 너무나 침묵이 길어져 보나가 막 입을 여는 순간 승연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사님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침묵.

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창피했다.

하지만 보나가 더 창피하지 않게 승연이 바로 입을 열었다.

[보나 씨, 정말 그래 줄래요?]

보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갈게요.”

*

보나는 승연이 보내준 콜택시를 타고 승연의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풀 메이크업은 못 했지만 나름 정성스레 화장하고 옷은 무엇을 입을까 하다 원피스로 정했다.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 사놓고 평소 입지 않던 검정 원피스였다. 그리고 그 위에 트위드 재킷을 걸쳤다. 가방 안에는 업무용 태블릿PC도 챙겨 넣었다.

묘한 흥분과 긴장감에 휩싸인 채 승연의 집까지 가는 30분은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것처럼 짧게 느껴졌다.

도착하니 집 앞에 승연이 와 있었다.

뒤에 커다란 후드가 달린 흡사 망토같이 생긴 두꺼운 가운을 입고 있었다.

택시를 보낸 승연이 보나를 보고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뭐지?’ 하면서도 보나는 승연이 내민 손을 잡았다.

커다란 승연의 손은 따뜻했다.

승연의 손에 이끌려 보나는 승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망토 쓴 드라큘라의 손에 이끌려 그의 고성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

실내는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은은한 조명으로 정말로 드라큘라의 고성처럼 느껴졌다.

드라큘라는 가운을 벗으며 보나에게 다가왔다.

“옷 이리 줘요.”

보나는 머뭇거리며 재킷을 벗었다.

그런데 승연은 보나가 건네는 재킷을 받지 않고 대신 보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화장했나?”

뭐야… 짓궂게 굳이 이런 질문을 해서 사람을 당황시키다니.

“네.”

보나는 약간 뚱한 얼굴로 승연을 올려다봤고 승연은 웃었다.

“뭐 마시겠어? 음료? 아니면 술?”

왼편에 고풍스러운 가구와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놓여있는 것과 달리 오른편으로 모던한 느낌의 홈 바가 있었다. 탁자 위 핀 조명 아래 승연이 마시던 온더록스 잔이 보였다.

“이사님은 뭐 드시고 계셨어요?”

“나? 난 위스키.”

“그럼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보나의 대답에 승연은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봤다.

“왜요?”

그럼, 이 시간에 남자 집에 와서 커피 달라고 하겠어? 보나는 다시 뚱한 얼굴로 승연을 쳐다보았고 승연은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래.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승연의 말에 보나는 그제야 오늘이 토요일이란 사실이 생각났다.

꿈과 현실이 헛갈릴 정도이니 요일 감각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승연이 위스키며 얼음을 꺼내는 동안 보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의 왼편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운 톤의 엔틱가구들. 그런데 그 엔틱가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 투박하고 큼직큼직한 것이 화려한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가구는 이사님이 직접 고르셨나요?”

“가구? 응. 뭐 그렇지.”

그러면서 승연은 보나에게 위스키 온더록스를 건넸다.

건배 같은 건 없었다. 짠하고 잔을 부딪치지도 않고 승연은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마시더니 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린 보나도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빈속에 차갑고 독한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찌릿~했다.

어쩔 수 없이 보나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 모습을 보며 승연은 웃었다.

“술이 좀 독한가? 얼음 더 넣어줘?”

“아니요.”

얼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얼음이 녹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연이 갑자기 일 이야기를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조 부장 말대로 그렇게 간단히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뭐야? 이러려고 부른 거야?’

어리둥절한 보나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승연은 계속했다.

“물론 병원 의사도 닥터 한이라고 나랑 잘 아는 사이고 그 사람 말로는 간호사들이며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만….”

“맞아요.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예요.”

보나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분위기 내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한 보나는 비서 모드로 탈바꿈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고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죠.”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승연은 온더록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말하는 모습에서 승연의 불안이 느껴졌다.

“정 결정을 내리기 힘드시면 이사님 직관을 믿으세요.”

보나의 말에 승연이 놀란 듯 홱 돌아봤다.

“무슨 뜻이지? 직관을 믿으라니?”

보나는 승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사님 지금 불안하시잖아요. 결정은 이미 낮에 다 내렸는데 아직도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계시죠.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간에 절 부르신 거고요. 괜찮아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보나를 보며 웃었다.

웃을 때 보면 꼭 꿈에서 본 어릴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보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린 승연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제가 불안할 때 쓰는 방법인데. 이사님도 한번 써보세요. 저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불안할 때.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요.”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승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