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도화는 그날 하나뿐인 친오라비 하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준의 말을 듣고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려 남복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만이라도 검 대신 바늘을 손에 쥐었더라면. 생에 단 하나뿐인 혼롓날 지아비의 얼굴을 보고 기함하지는 않았겠지.



“내 아내 될 사람이 사내라고는 전해 들은 적은 없는데.”



자신의 통찰이 결국에는 맞았다는 흐뭇함인지 자신을 속인 여인에 대한 괘씸함인지 뜻을 모를 미소가 일국의 황태자의 입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못 가 혼례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혼례는 초장에 들어섰건만 도화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태자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도화의 죄를 물어 경을 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쩌자고 태자에게 사내라고 박박 우겨댔던 걸까?’



도화는 태자의 앞에서 있지도 않은 물건의 크기를 뽐내던 그날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볼기짝을 내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후회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도화가 황궁으로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태자와 가까운 곳에 머물며 홍주의 정체를 밝혀 주었으면 해요.]

어쨌든 자신의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평생 지아비로 받들어야 할 청운국의 태자이며 자신은 황후에게 비밀리에 그를 보호할 임무를 명받은 후궁이었다.

청운국의 황족들에게만 전해진다는 신비로운 벽안이 도화의 흰 얼굴을 끈질기게 따랐다.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었음에도 따가운 시선이 피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도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금일부터 도화의 지아비가 될 무휘가 술잔을 입에 대는 척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다시 보는구나.

도화는 무휘의 입모양만으로 귀신같이 그가 전하는 뜻을 알아차렸다.

‘망했다.’

도화의 얼굴이 절망감에 일그러졌다.

그가 이 나라의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도화는 무휘의 급소를 쳐 기절시키고 달아났을 것이었다.

짙은 흑발과 대조되는 유백색의 얼굴과 또렷한 청안의 무휘는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여인들보다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그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저 여인이 대장군의 여식인가?”

“과연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군. 눈빛부터가 다르지 않는가.”

하나 도화의 존재감 또한 확실했다.

귀한 가문의 여식인 만큼 작은 행동에도 기품이 흘러나왔고 흔들림 없이 강건한 눈빛에는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다.

단아하고 청초한 외관은 검을 쥐는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토끼 같은 온순함을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됐다.

그녀의 겁 없고 불같은 성미대로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휘를 힘껏 걷어차고 달아났다 해도 놀라울 것이 없었다.

도화의 아버지는 청운국이 주여국에게 전락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전장에 나가 적장의 목을 베어 왔던 일등공신 도원이었다.

거기에다 친오라비가 한때 전하제일검으로 불리던 도하준이니 도화가 검을 모르고 살 수는 없었다.

실로 도하준에게서 전하제일검이라는 칭호를 뺏어 간 이는 같은 집안의 사람이었다.

집안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제 오라비보다 검술에 능하고 선천적으로 몸이 날렵하고 유연한 도화가 여인으로 태어났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청운국에서는 여인이 검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화가 제 키보다 한 뼘 이상은 큰 하준을 검술로 넘어섰을 때, 도원은 그녀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즐겁지만은 못했다.

[이 아비가 네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도원은 도화가 당당히 꿈을 펼칠 수 없는 것에 비통해했다.

출중한 실력을 가진 장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가 안타까워한 것을 보면 도화가 전하제일검에 걸맞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줄줄이 늘어선 행렬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혼례의식 중간중간에 간간이 무휘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꼭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도화의 속을 끓게 했다.

만약 도화가 무휘를 처음 본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객들에게 모진 꼴을 당하든 말든 그를 팽개치고 달아날 것이지 결코 나서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했다.

***

길게 늘어지던 혼례가 겨우 끝을 맺었다. 도화는 제 또래 여인의 손에 이끌려 낯선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몸종 모란이었다.

“도화 마마, 이곳이 앞으로 지내실 곳입니다.”

황궁의 지붕 아래 도화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줄 청화궁이었다.

궁 뒤에 작은 후원이 있고 앞에는 흐르는 연못에는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청화궁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오랜만에 만난 벗처럼 친근하게 여겨졌다.

“황후마마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아름답지요?”

모란이 신이 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도화는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물동이를 인 것처럼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운데 느긋하게 풍경을 즐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마! 지금 무엇 하시는 거예요? 기껏 정리한 옷이 구겨지지 않습니까? 제가 그것을 다리느라 꼭두새벽부터 얼마나 정성을 들인 줄 아세요?”

도화의 몸에 짓눌린 옷자락을 모란이 기겁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모란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했다.

말만 몸종이지 도화와는 친자매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격도 없고 비밀도 없는 절친한 사이라 하겠다.

도화는 모란의 쨍한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 세가 내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상이 셌다. 물론 도화, 그녀도 포함해서.

모란이 재빨리 도화를 일으켜 구겨진 혼례복의 끝자락을 바르게 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가 진짜이니 더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셔야죠. 몸단장을 새로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혼례도 끝이 났는데 단장을 해서 뭘 하려고?”

항의하듯 도화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푹신한 솜이 가득 들어찬 이부자리에 드러눕고 싶은데 뭘 자꾸 하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례에만 해도 반나절 이상이 걸리지 않았던가.

사랑도 없는 의식에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다 싶다.

도화에게 이번 혼례는 ‘흉내’ 그뿐이었다.

그녀가 황궁에 후궁으로 온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황태자의 눈에 들어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달고 싶다거나 화려한 옷을 입고 싶다거나 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황태자와의 혼례가 있기 전.

도화는 도원을 통해 황후에게 불리어 갔다.

도원이 청운국에 충성을 다하는 만큼 황제와 황후도 그를 충신으로 여기며 아끼고 사랑했다.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니 두 사람도 도가 내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원의 하나뿐인 여식, 도화가 제 오라비를 검술로 넘어서는 전하제일검이라는 사실도.

황후와의 첫 만남에서 도화는 퍽 달콤한 제안을 받았다.

“내 도화에게 긴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소신에게 말입니까?”

도화는 무척이나 당황한 눈치였다.

이 나라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황후가 무엇이 아쉬워 그녀에게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

고개를 갸웃대던 도화가 슬쩍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미소를 띠고 있긴 하나 황후의 낯빛이 어두워 보였다.

“실은 황궁에 첩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첩자라니요? 의심하시는 곳이 계신 겁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황후가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황태자비 홍주. 난 그 아이를 첩자라 의심하고 있습니다.”

도화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청운국의 황태자비, 홍주.

그녀는 청운국의 유명 인사다.

검 외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도화도 홍주가 청운국으로 시집온 날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건 청운국의 다른 백성들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홍주와의 혼인에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본국의 원수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주여국의 하나뿐인 공주였다.

청운국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주여국의 황제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딸을 덥석 내주겠다 제안해 왔다.

‘첩자? 그렇지만 어째서 금지옥엽처럼 키운 친딸을 첩자로 삼을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부분은 남아 있었다.

“그 누가 애지중지 아끼는 딸을 흔쾌히 다른 나라에 보내겠습니까? 그것도 주여국이 한때 속국으로 삼으려 했던 이곳에 말이지요.”

황후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홍주가 내 아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청운국도 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할 나라가 아니지요. 다만, 나라의 힘이 비등하니 전쟁이 일어난다면 긴 시간 동안 나라가 혼란스러울 것을 염려해 혼인을 받아들인 것일 뿐이고.”

말을 이어 가는 황후의 낯빛에 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여리고 선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따금식 보이는 눈빛에 독기가 서려 있는 것이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도화를 찾게 된 겁니다.”

도화는 그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홍주가 수상쩍은 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무엇을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제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청운국의 수많은 백성 중 하나일 뿐인 것을요.”

마치 도화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황후는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도화가 황궁으로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태자와 가까운 곳에 머물며 그를 지키고 홍주의 정체를 밝혀 주었으면 해요. 그 아이가 태자를 해하려 했다는 증좌만 얻는다면 주여국도 순순히 물러날 겁니다. 그들도 기나긴 전쟁을 피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제가요?”

‘태자 전하를 지킨다라….’

도화에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황태자의 호위가 되면 여인의 몸으로도 자유자재로 검을 다룰 수 있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태자 전하께는 이미 호위 무사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전에 하준이 전장의 꿈을 키우기 위해 무휘의 호위 무사 자리를 거절한 적이 있다. 그 이후에 그 자리에 누군가 들어왔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렇지만 태자 전하께는 이미 호위가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자리를 늘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화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자리는 태자에게서 너무 멀리 있지 않습니까?”

‘태자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호위 무사보다도 가까운 자리라면….’

내관? 내관복을 입은 자신을 상상하던 도화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도화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태자의 후궁 자리입니다.”

도화는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일면식도 없는 황태자와 갑자기 혼인하라니! 물론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긴 했지만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혼자 늙어 죽더라도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후궁이라면…. 태자 전하와 혼인한 관계가 아닙니까?”

도화는 온몸으로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마치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황후는 담담한 얼굴로 차를 머금었다.

“그렇지요. 물론 그냥 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찻잔을 내린 황후가 본격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도원과 함께 전장에 나가는 것이 도화의 평생의 소원이라 했지요?”

‘그걸 어떻게 아셨지?’

문득 도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를 황후에게 전할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말씀하신 걸까?’

도화가 진땀을 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청운국은 여인들이 검을 다루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얌전하고 단아한 현모양처였다. 오죽하면 황궁 내에서는 여인들이 검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을까. 그런데 전장에 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니 흠을 잡는다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번 품은 꿈을 하루아침에 거짓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면 황후에게 여인도 검을 소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애초에 사내만 검을 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도화는 알지 못했다. 후에 제게 다가올 파격적인 제안을.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도화에게 자유로이 검을 들 수 있게 하고 도원과 함께 출정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도화.”

안 그래도 큰 눈이 놀라움에 점차 커지는 것을 눈치챈 황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운국의 황실을 위해 힘을 보태어 주시겠습니까?”

황후의 달콤한 제안은 검에 목말라 있는 도화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

도화는 제 아비의 곁에서 검술을 뽐낼 수 있는 날을 떠올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혼례를 올리면 일이 다 끝난다고 합니까? 진짜 큰일이 남았는데.”

“뭐 전쟁이라도 난다고 하니?”

거사를 치를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어째 모란이 더 애가 탔다. 정작 도화는 만사가 피곤하다는 듯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쫓기듯 진행된 혼사였기에 평생 검만 바라보고 자라 온 그녀가 혼인한 첫날밤의 중요성을 익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미리 귀띔을 해두고 오는 것인데….”

“황실 법도에 대해서라면 더는 듣고 싶지도 않다. 본가에 있을 때 귀가 닳도록 익힌 것이지 않아?”

답답함에 가슴을 쿵쿵 내려치던 모란이 도화를 다시 일으켜 앉혔다. 구겨진 옷자락을 펼치고 흐트러진 머리 장식을 바르게 정돈해 준 모란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분위기를 잡는 거야?”

“마마,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 마마는 태자 전하와 초야를 치를 것입니다.”

“초야?”

아무리 남녀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도화도 초야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마을에서 혼인이 있는 날이면 하객들이 초야에 관한 이야기로 새신랑을 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