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너 그렇게 살았어?

특급 호텔 뷔페에서 회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수현은 입덧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에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놀라울 만큼 식욕이 동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던 것이다.

호텔 뷔페에서 동료들과 식사하는 동안 아기를 위해서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소식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아이의 아빠일 것이다.

형도 앞에서 임신했다고 티내면서 이것저것 막 사달라고 하고 싶다. 그것도 한밤중에 구하기 어려운 걸로 요구해서 그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고 배가 불러오면 힘들다고 유세부리고 여왕 대접을 받아보고 싶은 마음에 혼자 빙그레 웃어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데 후배 간호사가 다가왔다.

“2차 안 가세요?”

“응, 나는 좀…….”

임신 중인데 음주는 곤란하다.

“피곤한가 봐요, 얼굴빛이 안 좋네.”

“그래요, 좀 일찍 들어가 봐야 될 거 같으니 가서들 놀아요.”

아직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후배 간호사는 그 핼쑥해 보이는 낯빛이 어른들이 소위 말하는 ‘애가 서느라’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이 몇 걸음 걷던 간호사가 수현을 쿡쿡 찔렀다.

“왜요?”

“장태진 선생님 나오시네요. 유 선생님, 저분하고 같은 아파트 사신댔죠?”

수현은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싶어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장 박사님도 2차 안 가신대요. 태워다 달라고 하세요.”

“아니 나는…….”

“뭘 그래요, 편하게 가면 좋지 뭐. 저 갈게요. 내일 만나요.”

주춤하는 사이에 후배는 가버리고 혼자 서 있던 수현이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사이에 다른 의사들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던 장태진이 혼자가 되어 이쪽을 보고는 수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2차 안 가고 바로 집으로 가는 건가요?”

“예.”

“그럼 같이 가지.”

“아, 저기……. 저는…….”

수현은 저도 모르게 주저하게 되었다.

형도가 이 사람이랑 같이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왜? 남자친구 오기로 했나?”

“아, 그게…… 저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수현은 그때 그 장소에서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장 박사의 눈에 띄기 전에 동료와 함께 호텔을 벗어났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장 박사 앞에 서게 되었더라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냥 태워주신다니 고맙습니다, 하고 재빨리 같이 걸어 나왔어야 했다.

수현이 머뭇거렸기 때문에, 장 박사는 당연히 남자친구가 오는 건가, 하고 휘둘러보았을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수현과 대화하던 장 박사가 저 건너편을 보는 거 같았다.

1분? 아니 불과 30초 사이에 운명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수현을 마주보며 뭔가 말하려던 장태진이 건너편을 보며 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 반가운 표정이 어,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고 금방 당황스러워졌다.

수현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얼른 옆으로 다가선 장태진이 급하게 말을 붙였다.

“나가자고, 내가 데려다줄게.”

하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볼 수밖에 없었다.

형도가 있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지금 막 지나가는 저 남자는 형도 같다.

지방에 가 있어야 할 남자가 여긴 왜……?

게다가 여자하고 같이 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지금 어떤 여자하고 나란히 붙어서 객실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 저 남자는 형도가 아니다.

형도일 리가 없다. 그런데 저런 뒤태가 흔할까? 저런 키에 저런 체격이 흔할까.

장 박사가 혼돈 상태에 빠져 멍하니 있는 수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해, 어서 가자고.”

“저, 저는…….”

“여기서 택시 기다리기도 만만찮을 텐데 어서 가지.”

장태진에 이끌려 주춤주춤 걸어가면서 수현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거 같았다.

차 안에서도 수현은 병원에서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운전하는 장 박사 옆에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 선생님도 보셨냐고, 내 남자친구가 맞더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는 수현의 머릿속은 이미 갖가지 생각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수현이 사는 동 앞에 차를 세운 장태진이 짧은 인사말을 했다.

“잘 들어가.”

“네.”

감사하다거나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도 없이 휘청휘청 안으로 들어갔던 수현은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그 호텔로 되돌아갔다.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였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거 같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여태 보아왔던 형도의 뒷모습마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0.5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보았던 그의 옆모습마저도.

호텔 로비에 가서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한동안 서 있으면서 수현은 자꾸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합리화하려 했다.

닮은 사람일 거야. 그래서 장 선생님도 그 사람인가 했다가 착각한 거라서 아무 말씀 안 하신 거야.

내가 왜 여기에 왔지? 미쳤어, 돈이 남아도나, 택시비가 얼만데……. 그냥 장 선생님이 태워다주실 때 얌전히 타고 집에 갔으면 씻고 잠이나 잘 것이지.

그냥 가자. 그 사람을 의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면서도 어느새 전화기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더 초조해졌다.

받지 마라. 제발 받지 마. 아니야, 받아서 멀리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기만 하면 돼. 근데 어떻게……?

객실에서 형도의 전화벨이 울리자, 멈칫했던 그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통화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수현의 전화를 받고 싶진 않다.

전원을 꺼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는데, 침대에서 제니퍼가 한 마디 한다.

“받지 마.”

이러자 오기가 생긴다. 대체 자기가 뭔데 내 전화를 받으라, 마라 하는 거야.

전화를 받으면서 그는 최대한 평범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어, 나야.”

전화기 저편에선 대답 대신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의 입장에선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형도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쏟아진다. 그동안 염려했던 마음의 고통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거 같다.

“아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놀라서 목소리가 커지면서 형도는 이미 평정심이고 뭐고 다 날려버린 뒤였다.

[흑, 아냐,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하고 그냥 끊어야 하는데 맘처럼 쉽게 되지가 않았다.

“뭐야? 어디 아파?”

긴장하여 날이 선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에게 마음껏 응석부리고 위로받고 싶어졌다. 내가 바보 같은 생각한 거지? 당신 지금 저 멀리 지방에 내려가 있는 거지?

[어…….]

마음이 아파. 널 이렇게 의심하고 확인하려고 든다는 자체가 내겐 고통이야.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내가 지금 갈게.”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대답하는 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와줄 거야? 그래주면 좋겠다.]

“알았어. 지금 갈게.”

수현은 전화를 끊고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역시 이 사람은 오로지 내 생각뿐이야. 날 위해서 달려오겠다잖아. 바보같이 왜 그런 무시무시한 상상을 했는지…….

웃어보려다가 심장이 덜컹하는 수현이었다.

설마 이 호텔에서, 객실에서 내려오는 건 아니겠지? 호텔에서 나오는 널 보면 난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릴 거 같아. 제발 그러지 마.

객실에서는 제니퍼가 나가려는 형도를 붙잡았다.

“가지 마.”

“이거 놔요.”

“그 여자 지금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야, 내 말 들어.”

“그럴 사람 아니에요.”

“넌 아직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사랑에 눈이 멀었어.”

“내가 내 여자에 대해서 알든 모르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라구요!”

제니퍼는 소리 지르는 형도를 기막히다는 듯 쳐다보다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어떤 년인지, 그년 때문에 네가 나한테 소리를 질렀다 이거지?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천천히 가도 시간은 충분해.”

어쩌면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방에 내려가 있다고 해두었으니 서울로 올라오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내 여자가 아프다는데, 저리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찾는데, 거리나 시간 같은 거 일일이 계산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형도가 여전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나갈 채비를 하자, 제니퍼는 다시 한 번 더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을 눌러야 했다.

“내 말 들어라, 별일 아닐 거야.”

“됐어요.”

“가지말래도!”

더 이상 못 참겠는지 형도를 다시 적극적으로 잡아본다.

“비켜요!”

거칠게 확 뿌리치자 떠밀려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야, 차형도! 너 지금 떠나면 평생 후회할 줄 알아! 내가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이성을 잃은 제니퍼가 악을 쓰는데, 형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챙겨 입고 황급히 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문 앞에서 경호원들이 막아선다.

이것들은 끝까지 말썽이군.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에 제니퍼가 따라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케빈, 마이클, 저 녀석 잡아! 절대 못 가게 해!”

한 명은 형도를 막아서고 다른 한 명은 제니퍼를 만류한다.

“하워드 부인, 이런 차림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옷을 마저 입으시지요.”

“저 녀석 붙잡아, 어서!”

형도가 자기를 가로막는 흑인 경호원에게 한 방 날리고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경호원에게 욕을 해대던 제니퍼 하워드는 다른 경호원이 가져온 옷을 걸치며 형도가 가버린 복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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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으로 내려가서 숨을 고르는데, 아차, 그러고 보니 너무 서둘렀다. 제니퍼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 지방이라고 했는데 지금 바로 가면 들통 나는 거 아닌가? 이런, 제기랄!

일단 전화부터 해봐야겠다. 너무 아프면 구급차 불러서 병원부터 가라고 해야지.

수현에게 전화를 거니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아서 더 걱정이 되었다.

정말 너무 아파서 쓰러진 건가?

[여보세요.]

“어, 그래,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전화기 저편에선 아무 말도 없었고 그녀의 숨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지만 형도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

[무슨 일은 지금 일어난 거지.]

수현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들렸지만 그 어조의 끝에 찬바람이 도는 거 같았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하다 말고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리는 그의 눈앞에 수현이 서 있었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형도가 맥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 저기, 수현아, 그게…….”

뭐든 말을 해봐야겠는데 말이 잘 안 나와서 더듬거리는 사이에 수현이 한 발 나서며 철썩 소리 나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분해서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