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도 고아예요.

대형종합병원의 저녁 무렵이었다.

간호사인 수현이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는 중이다.

퇴근하기 전에 들러야할 곳이 있다.

수현이 병실로 들어서자 침상에 누워있던 박 원장이 고개를 돌려 알은체를 했다.

“왔냐.”

“예, 좀 어떠세요?”

“괜찮다, 노인네 몸이 그렇지, 뭐.”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암수술이라는 건 그 얼마나 힘겨운 고통일 것인가.

하지만 박 원장은 혹시나 수현이 염려라도 할까 봐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초기라서 다행이에요. 치료만 잘 받으시면 금방 건강해지실 거예요.”

“오냐, 내 걱정은 마라. 아무렴 내가 너 시집가는 건 보고 죽어야지.”

“원장 선생님도 참…….”

“그렇게 질색할 일이 아니야, 인마. 너도 어서 결혼해야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원장님 마지막 소원은 딸 같은 수현을 결혼식장에 들여보내주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수현이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입장이란 것 또한 알고 있다.

5년 전의 그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수현아.”

“예.”

“너 혹시 아직도 예전 일이 맘에 걸리는 거냐?”

“아니에요. 잊어버린 지 한참 된 걸요.”

“그래, 그래야지.”

박 원장의 부인이 들어왔다.

수현은 공손하게 묵례를 해 보이고 병실을 나갔고, 수현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박 원장이 중얼거렸다.

“애가 참 착해.아직도 나한테 저렇게 잘하니…….”

“당신이 해준 게 얼만데 그래요. 친딸처럼 키웠잖아요.”

“친딸이나 마찬가지지 뭘 그래.”

부인은 아직도 박 원장이 수현을 친딸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쓸쓸하게 웃으며 회상에 잠기는 박 원장.

***

20년쯤 전에 경기도 어느 작은 보육원으로 근무지를 옮겼을 때 거기서 수현을 보았다.

열 살 남짓한 그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박 원장 부부는 동시에 놀랐었다.

이렇게 생긴 아이라니……!

7년 전에 사고로 죽은 친딸하고 너무나 비슷하게 생긴 아이다.

마치 딸아이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흡사하게 생긴 아이를 보고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박 원장은 마치 친딸을 보는 거 같아 수현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원장 부인은 수현이 자기 딸을 닮았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으며 그보다 더 싫은 건 남편이 그 아이를 딸처럼 대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고아들에 섞여있으면 빛이 나던 아이.

너무나 예쁘고 신비로울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부잣집 귀한 외동딸처럼 귀티가 나던 아이.

그래서 박 원장에겐 더 신기하고 사랑스러웠고 원장 부인에겐 더 눈엣가시처럼 미워 보였던 아이다.

아니 생긴 게 어떻든 상관없다.

예쁘거나 귀티가 나거나 성품이 온화하거나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딸을 잃고 몇 년간을 그리 힘들어하던 사람이 생긴 거 하나 보고 홀딱 빠져서는 마치 죽은 딸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애정을 다 쏟는 게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이다.

만18세가 지나면 보육원을 나가야 하는 것이 철칙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던 그 아이에게 남편은 수현이 나가서 살 수 있는 방을 알아봐주었고 대학진학을 독려했으며 등록금까지 대주었다.

마치 친딸을 대하듯이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내 딸은 그 어떤 짓을 해도 돌아올 수가 없는데……. 차가운 흙 속에 묻혔는데…….

단지 얼굴 조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다니…….

그 자체가 괘씸해서 수현이 자라는 내내 마음에 걸렸었고 조금은 싸늘하게 대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이 들어 외로운 처지에다 남편이 암에 걸리고 보니 그나마 딸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수현이 내심 고마워졌다.

게다가 이런 대형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니 수술하고 입원하기도 수월하지 않은가.

수현을 보면 묘한 생각이 교차하는 박 원장 부인이었다.

*****

겨울바람이 매섭다.

거리로 나선 수현은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지하철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수현으로서는 이 겨울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원룸으로 가서는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들었다.

하긴 원장 선생님이 걱정하실 만하지.

내 나이가 벌써…….

5년 전에 그 사람이랑 결혼할 수 있었다면 난 지금쯤 아이를 둘 정도 가진 엄마가 되었을 테지.

그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하긴 했었던 걸까.

그래, 사랑하기야 했겠지.

만나는 동안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

결혼하자고 했고 나의 조건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도 했어.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

그리고 착한 아들이기도 했고.

갑자기 쓸쓸해진 수현은 기운이 없어지고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모든 건 내가 부족해서 그래.

어느 부모가 의사인 아들이 간호사와 결혼하는 것도 모자라 천애고아인 여자를 며느리로 환영하겠어.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도, 내 자존심 때문에 더 굽히고 들어가서 허락해달라고 애원하지 못했던 것도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 이후에 남자를 만나기가 겁났던 것도, 내 처지가 비관적이었던 것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젠 다 털어버렸어.

미련도 아쉬움도 서운함도 하나도 남지 않은걸.

나도 이젠 새로운 나를 찾고 싶다.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과연 내게 사랑이 올까?

*******

박 원장의 병실에서는 부인이 간병인용 간이침상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고 박 원장은 그 옛날 수현을 처음 보던 순간부터 보육원에서 성장하던 모습을 돌이켜보았다.

그전 원장한테 들었을 때 미혼모가 낳고 버린 아이라고 했었다.

처음부터 부모 같은 건 가져보지도 못한 아이.

너무나 안타깝고 정이 가서 입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신분도 아니고 보육원 원장이면서 그 원생을 입양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 포기했었다.

게다가 집사람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

무연고 고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호적에 올리는 일 같은 건 이미 그전의 유 원장이 해주었기 때문에 박 원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성도 이름도 정확한 생일도 모르는 아이.

하지만 마치 친딸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끌리는 아이였기에 박 원장이 생각하는 입양이란 건 보육원의 자녀들 모두에게 행하는 그런 호적 정리 차원의 입양이 아니라 정말로 딸로 삼아서 곁에 두고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곧 다른 고아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말하자면 보육원 원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사회생활을 해내가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었다.

똑똑한 아이답게 금방 취직해서 그때 지원해준 돈을 갚아 나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두고두고 집사람의 원망을 들을 뻔했던 것이다.

박 원장이 회상에 잠기는 동안 병원 바깥쪽은 몹시 시끄러워졌다.

어딘가에서 패싸움이 벌어진 듯 조직폭력배들이 줄줄이 실려 오는 중이다.

구급차에서 내려져 이동침대로 옮겨지는 남자, 차형도.

부하들이 이동침대에 달라붙으며 애가 탄다.

“아이구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형님, 기운 내십시오.”

형도가 실눈을 뜨고 아우들을 째려보았다.

“아, 시끄러워.”

형도가 수술실로 옮겨지는 동안 그 외 다치고 깨진 무리가 응급실 여기저기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의사가 나와서 조폭 부하들에게 간단히 설명을 했다.

“다행히 장기 손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서 2주 정도는 입원 치료하셔야 합니다.”

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병실로 옮겨진 형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복도가 한바탕 시끌벅적해졌다가 다시 잠잠해졌고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출근한 수현이 근무 시작 전에 원장 선생님의 병실로 오는 길이다. 친아버지 같은 분이라 자주 들러서 돌보고 싶지만 맡은 일이 있으므로 근무 시간 중에는 거의 짬을 낼 수가 없었고 그나마 일찍 출근해서 들여다보고 또 퇴근 전에 들여다보고 하는 것이었다.

걸어가던 수현이 멈춰 섰다.

원장님의 건너편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병실 앞에 웬 건장한 남자들이 서 있다.

뭐지? 싶었지만 길게 생각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박 원장을 한번 보살펴드리고 나서 자기 근무지로 돌아온 수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전에 다시 박 원장의 병실에 들렀다.

박 원장에게 책을 읽어드리던 수현은 평온하게 잠에 빠져든 박 원장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원장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저한텐 아무도 없잖아요. 원장 선생님밖에는…….’

웃다 말고 쓸쓸해져서 책을 덮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다가, 범상치 않은 옷차림의 여자들이 서너 명이나 몰려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망사스타킹에 초미니스커트의 야한 옷차림에 겉에는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신기하다.

춥겠다, 좀 든든히들 입지. 요즘 날씨 장난이 아니던데…….

그 여자들의 요란한 화장과 귀걸이 등에 놀라다가 바로 그 때의 맞은편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뜨악해하는 수현이다.

대체 누가 입원했길래……?

하지만 그이상의 관심은 없다.

돌아선 수현이 서둘러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

다른 날의 병원.

수현이 퇴근 전에 박 원장의 병실에 오다가 얼마 전에 본 요란한 차림새의 여자를 보았다.

이번엔 혼자서 쇼핑백을 들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면서 걸어오는 여자, 현지다.

맞은편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현.

짙은 화장과 옷차림에 놀라 쳐다보던 수현이 한동안 그녀가 들어간 병실 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삐죽거리고 돌아선다.

도대체 뭐하는 여자길래…….

형도의 침상에 바짝 붙어 앉아 죽을 떠먹여주려 하는 현지에 비해 형도는 만사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숟갈을 턱 앞에 받쳐 들고 애교를 부리는 바람에 마지못해 입을 벌리는 모습이었다.

“옳지, 그렇지. 아이 착해, 아유 귀여워!”

요란하게 좋아하는 현지를 바라보는 형도는 덤덤하기만 하다.

“맛있지? 그지? 자, 한 번만 더…….”

“됐어. 이리 내.”

현지에게서 죽 그릇을 빼앗아 자기가 몇 숟가락 먹기 시작하는 형도.

빈 그릇을 현지에게 내밀며 이제 됐지? 하는 눈빛을 한번 해보이고 티슈로 입을 쓱 닦는다.

“오빠, 아직 많이 아프지? 어디야?"

현지가 눈치를 보며 그의 허리를 더듬어보다가 싸늘한 반응을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건드리지 마.”

“당분간 그건 못하겠다, 그치?”

“넌 이 와중에도 그 타령이냐?”

“언제부터 가능한지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볼까?”

“뭐?”

“내가 와이프라고 하면 되잖아.”

형도가 매섭게 노려보자 무안해하던 현지가 화제를 돌렸다.

“소변줄 뺐네? 이제 화장실 갈 수 있겠다.”

“음…….”

“어서 나아야지, 어디 보자.”

현지가 형도의 환자복을 들추어 상처 부분을 보는데, 수술 자국 위에 가제가 덮여있다.

그 부분을 살살 어루만지던 현지의 손이 슬그머니 바지 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형도가 그 손목을 탁 잡았다.

“왜……? 누구 들어올까 봐 그래?”

“…….”

“그냥 잘 있나 보구 싶어서 그래.”

“됐구, 이제 그만 가봐라.”

“벌써……?”

서운함이 묻어나는 현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형도는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가서 준비해야지. 나 없어도 무대 잘 뛰고…….”

“진짜 오빠 없으니까 춤추기도 싫어. 빨리 나아서 나와라, 응?”

“알았어, 그만 가봐.”

현지가 일어서자 형도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왜? 나 배웅해주려고?”

“비켜, 오줌마려.”

“오빠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이거 들어줄게.”

현지가 링거 병을 들어 내렸다.

한 손으로 링거 병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형도를 부축하려다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형도의 손등에 꽂힌 정맥주사선에서 피가 배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