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운명의 서막

#1장

제작사의 드라마 띄우기 사전 마케팅이 시작되고, 은재의 주인공 캐스팅 소식이 각종 매체에 실렸다. 배우에 대한 관심은 드라마 시청률로 이어지기 때문에, 붐업은 필수였다.

<서은재, 하반기 최고 기대작 내일의 태양 주연 발탁>

<물오른 연기력, 서은재의 화려한 날갯짓이 시작되다.>

<주인공을 가장 닮은 여배우, 생활력 짱 서은재>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던 제니스 스텝들이 난리가 났다. 지나가던 부원장도 옆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같이 읽었다.

“캐스팅 대박! 은재 씨가 주인공이래.”

“벌써 주연 급으로 올라서는가 봐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왜 이렇게 잘 풀려.”

이번에도 부원장의 시각은 독특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는 그녀였으니까.

“귀인을 만난 거지. 미스터 강이 온 이후로 은재 씨 때깔이 달라졌다니까. 역시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해.”

다들 은재의 캐스팅을 기뻐하고 부러워하는 가운데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우, 시끄러워! 아침부터 왜들 그래요. 정신 산란하게”

거울 앞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최수연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뭐 별거라고 저렇게 난리람.”

그녀는 은재한테 주연을 뺏겨서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었다. 분해서 간밤에 잠도 설치고, 홧김에 술까지 먹어서 피부가 완전히 뒤집어진 상태였다.

얼마 후.

은재가 준혁과 함께 제니스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입구를 걸어 들어오는 그녀에게서 후광이 보였다.

오, 주연의 품격인가! 부원장을 비롯한 스텝들은 두 팔 벌려 그녀를 환대했다.

“여우같이 천박한 최수연하고는 레베르가 다른 우리 은재 씨, 어서 와요.”

“라이징 스타, 은재 씨!”

A급 배우로 올라서는 건 이제 시간문제인 듯했다. 마침 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

“도착하셨어요? 그럼 안으로 가져다주세요.”

“누규?”

미스터 강 옆에 딱 달라붙어서 부원장이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아, 협찬이요.”

“어데?”

“르엘.”

“르, 르, 르엘!”

제니스 식구들은 르엘 직원들이 갖고 들어오는 제품들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최고급 명품 브랜드‘르엘’

연예인 협찬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도도한 브랜드, AAA급 배우라도 제 돈으로 사서 입어야 하는 명품 르엘이 서은재에게 협찬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액션이었다.

그녀의 포텐셜을 높이 평가한다는 암묵적인 사인. 분명 은재의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준혁의 어머니인 윤희의 지시를 받은 르엘 마케팅 실장이 직접 은재를 만나러 왔다.

“서은재 씨, 안녕하세요. 들으셨겠지만 오늘부터 르엘에서 직접 의상 협찬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입을 의상과 구두는 피팅룸에 세팅해 놓을게요.”

르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연은 속이 뒤집어졌다.

르엘이 서은재를 왜, 왜, 도대체 왜애애애! 세상이 왜 갑자기 서은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그 잘난 르엘. 도대체 어떻길래.

헤어가 끝나고 피팅룸에 들어가 본 수연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의상들을 보고 눈이 번쩍했다.

한 벌에 300만 원이 넘는 초호화 컬렉션. 사고 싶어도 구하기도 어려운 이번 시즌 신상들. 게다가 제가 결국은 협찬을 받지 못했던 은색 구두를 집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피팅룸을 나오던 수연은 막 들어가던 은재와 마주쳤다. 두 여자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은재는 싸늘한 눈으로 수연을 똑바로 바라보고, 수연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고개를 먼저 돌린 건 은재였다.

상종할 가치도 없는 사람,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사람, 최수연이니까.

휙 지나가는 그녀의 뒤에 대고 수연이 한 마디 던졌다.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하니?”

그럼 그렇지. 그냥 지나갈 리가 없지.

은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젠 전혀 꿀리지 않는 당당함이 뿜어져 나왔다.

“선배가 아니라서.”

“주연 하나 맡았다고 세상 다 가진 것 같지? 개점 약발이야. 그거 얼마 안 간다고. 서은재는 주연이 처음이라 모를까 봐 알려주는 거야.”

“상관없어. 주연이든 조연이든 충실히 할 거니까.”

“어머, 그러세요? 대 배우 나셨네.”

마침 준혁이 은재를 따라 피팅룸으로 들어왔다. 최수연이 또 무슨 시비를 거는지 확인하러 온 그는 은재보다 더 냉기 어린 시선으로 쏘아 봤다.

“이번엔 또 뭐지?”

어머, 어머, 점점 말도 까는 것 좀 봐.

“강 매니저, 예의 좀 지키죠. 우리가 그렇게 절친한 사이였나? 말도 놓고.”

“예의를 지킬 사이가 아니라서. 얘기 끝났으면 좀 비키죠. 우리 은재 씨 바쁜데.”

‘우리’ 은재 씨? 아씨… 매니저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우둔한 우두식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씩씩대며 수연이 자리를 떴다.

***

고급 술집 앞에 검정색 세단이 서고, 준규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담의 안내를 받은 룸에는 먼저 온 세중이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누가 들어오건 개의치 않고 스킨십에 열중했고 준규 역시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저벅저벅, 맞은편 소파로 걸어가 털썩 기대어 앉은 준규의 입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 좋네.”

그제야 세중은 고개를 들고 준규를 알아보았다.

“왔어?”

준규가 턱 끝을 까딱하자, 여자는 얼른 세중의 무릎에서 일어나 룸 밖으로 나갔다.

세중은 준규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몇 시인데 이제 오냐,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빠?”

“중국 반도체 기업 인수 건. 인수 계약 서명이 지연되고 있어.”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어차피 회사 물려받을 놈은 따로 있는데.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지.”

세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피식, 비릿한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기분이 상한 듯, 잔을 든 준규의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네가 뭘 알아?”

뚫어질 듯 노려보는 살벌한 눈빛에 세중이 움찔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거기가 원래 네 자리이니까 하는 말이야. 강 회장이 결혼만 안 했어도.”

세중의 부추김은 준규의 질투심을 더 자극했다.

강준혁. 재수 없는 새끼.

그는 손에 든 위스키를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얼음을 우두둑우두둑 씹었다.

장남인 강 회장이 채윤희를 기다리며 독신주의를 선언한 동안, 둘째 아들이 먼저 결혼하고 낳은 아들이 준규였다. 집안의 첫 손자, 영민한 그는 선대 회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모두들 말했다. 네가 대를 이을 거라고.

그리고 6년 후에 준혁이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은 순하고 반듯한 준혁의 차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준규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장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누리는 놈.

너만 없었으면….

준규는 소파에 한쪽 팔을 걸치고 뒤고 기댔다. 잔에 남은 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나직한 목소리가 깔렸다.

“죽 쒀서 개한테 줄지, 개를 잡아먹을지는, 가봐야 아는 거지.”

“무슨 복안이라고 있는 거냐?”

“복안? 플랜 A, 다음은 플랜 B, 그다음은 플랜 C. 계획은 항상 존재하고, 진화하지.”

훗…. 세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려. 강준규. 빈틈없는 녀석.

“그래서 이번엔 뭔데?”

“서은재 쪽 파보는 중이다. 뭐라도 나오겠지. 하나라도 걸리기만 해.”

“치사하게 일이 아니고, 여자를 건드려?”

“여자니까 건드려야지. 그게 잘 먹히거든.”

후후… 준규의 눈빛이 사악하게 반짝였다.

놈이 한 번 된통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나는 말이다….”

준규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놈이 웃는 꼴을 못 보겠어. 다 제 손아귀에 있으면서 욕심 없는 척,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는 새끼.”

“그게 다, 가진 자의 여유 아니겠냐?”

“가진 자의 여유라?”

준규는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래서 뺏어버리려고. 회사도, 여자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놈으로 만들 거다. 두고 봐.”

“우하하… 우리 준혁이 큰일 났네. 어떡하냐?”

“어떡하긴. 지 복이지.”

“네 계획, 마음에 든다. 후후… 내가 좀 도와줘?”

“어떻게?”

***

TNT 본사에 차를 대고 준혁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광고주 미팅을 왜 술집에서 하지?”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나오면 된대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말이 딱 맞아. 모델료가 세니까 그런 자리에 불려 나가는 거 아냐.”

“내가 가는 거 싫구나?”

은재는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굳어진 그의 미간을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 드글드글한 자리에 널 어떻게 혼자 보내냐.”

뭘 믿고 황 이사한테 널 맡기냐고, 그 사악한 인간을.

황 이사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재가 들어가자 눈이 위아래로 스윽 훑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준비됐으면 가지.”

준혁이 은재의 곁에 딱 붙어 다니자 황 이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자네는 없어도 돼. 은재 씨, 내 차 타고 가지.”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저도 가겠습니다.”

준혁은 확고하게 의사를 표시했다.

“광고주 미팅에 자네가 왜 끼나? 매니저 주제에”

하지만 물러섬 없는 당당한 강 매니저였다.

“그래서요. 은재 씨 매니저이니까요.”

허허… 황 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참… 가만 보면, 주제 파악을 못 해. 자네는 낄 데 안 낄 데 분간이 그렇게 안 되나? 유신건설 임원이 나오는 자리에 한낱 매니저가 끼는 게 격에 맞는다고 생각해?”

“그럼 밖에서라도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대리기사 부르면 돼. 언제 끝날 줄 알고.”

“미팅을 밤새 하시게요?”

준혁이 한 마디도 지지 않자 황 이사는 귀찮아서 포기했다.

“아우, 네 맘대로 해라.”

그는 짜증을 팍팍 내면서 출발하고, 준혁은 은재를 밴에 태웠다.

***

고급 술집, 어둡고 기다란 복도에는 주홍색 등이 켜져 있었다.

또각또각, 황 이사를 따라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은재의 하이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둡고 낯선 분위기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룸에 들어간 사람들은 소파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신건설 광고팀장이 말했다.

“황 이사님,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윗분이 지시하신 거라서요. 은재 씨, 이렇게 시간을 뺏어서 미안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광고주 미팅은 다른 데하고도 종종 하는 건데요. 괜찮습니다. 그렇지 은재 씨?”

“양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광고는 저희가 신경을 좀 썼습니다. 모델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은재 씨한테 특별대우를 해드린 거죠.”

“그럼, 마케팅 상무님이 오늘 오시는 겁니까?”

“아뇨. 상무님이 아니고, 유신 그룹 지주회사 양세중 전무님이세요. 완전 실세죠. 회장님 둘째 아드님이거든요. 은재 씨 팬이라고, 오늘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 신경질적인 인상, 거만한 걸음걸이.

유신건설 직원들과 황 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은재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고, 소파 중앙에 앉았다.

룸 안의 공기는 무겁게 착, 가라앉았다.

세중은 곁눈질로 은재를 유심히 쳐다보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유신건설 직원이 술을 돌리고 비즈니스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에 끼지 못하는 은재는 조용히 앉아서 과일 안주만 집어 먹었다. 존재감이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양주 한 잔을 다 비울 즈음, 세중은 은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서은재 씨?”

화들짝 놀란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은재 씨 팬이에요. 그래서 오늘 꼭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묘한 분위기에 은재는 움찔했다. 말은 친절하지만, 눈빛은 차가운, 이상한 사람이었다.

“한 잔 받아요. 아름다운 숙녀를 모셔놓고 홀대하면 안 되지.”

세중이 양주병을 집어 들자 황 이사가 옆에서 은재를 부추겼다.

“아닙니다. 저희가 따라 드려야죠. 은재 씨가 아직 이런 자리에 경험이 없어서요, 용서하십시오. 은재 씨, 뭐 해? 어서 가서 따라드려.”

황 이사는 은재의 등을 떠밀어 세중의 옆으로 보냈다.

싫은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재는 세중의 옆에 앉고, 세중이 내민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세중은 느끼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