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하얀 연인들

#1장

대명 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영애의 핸드폰이 지이이잉 울리고, 정 여사의 침대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던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은재 지금 우리 식당에 와 있어. 광고는 잘 찍은 것 같더라. 별문제 없었나 봐. 기분 좋아 보여.]

영애는 답장을 보냈다.

[다행이네. 고마워]

[지금 민 실장하고 강 매니저도 같이 있어.]

[저녁이 늦었네.]

[분위기 묘해서 재밌게 보고 있다. ㅋㅋ]

[무슨 얘기야?]

[좀 더 지켜보고 알려줄게. 아무튼, 은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든든한 장정이 둘씩이나 있네.]

[그래… 잘 해줘. 푸짐하게… 내가 나중에

돈 보내 줄게.]

[무슨 소리, 은재 친구들은 내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다 퍼주어도 하나도 안 아깝다.]

핸드폰을 다시 카디건 주머니에 넣고 영애가 정 여사에게 말했다.

“친구가 하는 식당에 은재가 왔다구요. 일이 늦게 끝나서 지금 밥 먹고 있대요.”

“연예인들은 밤낮이 따로 없다던데… 은재도 일이 많은가 봐.”

“그런 것 같아요. 밥도 제때 못 챙겨 먹고요.”

“연기를 참… 잘 하더만, 재능이 있어.”

“….”

정 여사는 말이 없는 영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은재 엄마는 딸내미 나오는 드라마를 안 보더라고”

사실이었다. 3인실 병실에서 놓인 공용 TV에서‘우리 사랑 이대로’가 나올 때면 영애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복도로 나가곤 했으니.

영애는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은재 모습에서 그이가 보여서요.”

“저런….”

“그렇게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은재일 뿐이라고 되뇌어도 너무 비슷해서… 연기하는 모습이, 그 눈빛이며 표정이며, 손동작까지.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워요.”

“쯧쯧….”

“그이에겐 연기가 전부였어요. 그걸 잃어버리고 삶이 무너져버렸죠. 그래서 연기는 우리 가족에게는 상처에요.”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소. 은재가 그 길을 원하면 어찌하려고?”

“은재도 원하지 않아요. 5년만 하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렇게 정하고 시작한 거예요.”

영애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감독님, 커피 왔습니다.”

스텝 한 명이 박 PD의 심부름으로 원두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짠돌이로 소문난 박 PD, 그가 웬일로 지갑을 꺼냈다.

“자, 자, 커피 마시면서 합시다. 이건 우리 은재 씨 거, 이건 우리 재민 씨 거.”

대본을 맞추어 보던 은재와 재민은 엉겁결에 커피를 받고, 박 PD는 함박웃음을 올리며 옆에 끼어 앉았다.

“감독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있지. 우리 은재 씨 OST가 어제 음악차트 1위 했다네. 두 애쁜이들 한밤 인터뷰도 히트 치고, 덕분에 우리 드라마가 화제성 1위 떴어. SBC를 가볍게 눌렀다고. 우하하하!”

그의 라이벌, 타 방송사의 송 PD가 맡은 동 시간대 경쟁 작을 화제성에서 드디어 제쳤다는 소식에 박 PD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은재의 OST‘내 마음이 보이나요’는 발매 직후 실시간 음악차트 1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로 불과 열흘 만에 1위 등극. 그야말로 핫하디 핫한 반응이었다.

뉴스 기사도 이어졌다.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마약 OST’

‘신선한 멜로디, 맑은 음색, 안정된 발성의 환상적 조합’

‘광고 요정, 이제 OST 계도 평정하나?’

‘기존 가수들의 아성에 버금가는 신예 등장’

“연일 은재 씨의 재발견이야. 최 감독이 그러는데 은재 씨 목소리는 배우만 하기 아깝다네. 나중에 뮤지컬도 해보라고 추천하던데. 잘 생각해봐.”

“은재 씨, 공연 티켓 나오면 나도 보내줘요. VIP석으로 두 장.”

박 PD는 흥이 나서 경쟁사 송 PD를 실컷 씹고 나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짠돌이 감독님이 커피를 다 쏘게 만들고, 하여튼 은재 씨 대단해”

은재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입에 대려다가 멈추었다. 문득 순영의 말이 떠올랐다.

“강 매니저는 원두커피만 좋아해요. 아침마다 모닝커피.”

모닝커피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오늘은 그대에게 양보하지.

은재는 밝은 얼굴로 세트장을 나섰다.

매일 여자 스텝들이 줄 서서 갖다 바치는 커피를 보면서 저도 한 번 사다 줄까도 싶었는데 이렇게도 기회가 되었다.

“강 매니저, 어딨나?”

한 바퀴를 돌았지만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품실 앞에서 준혁을 발견했다.

“강… 매”

이름을 부르려던 그녀의 시야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제 은재 씨 OST가 드디어 음악차트 1위를 했대요.”

“그래요?”

준혁의 손에는 이미 여자 스텝이 건넨 원두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기 봐요. 차트.”

스텝이 핸드폰으로 뮤직차트를 보여주자,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둘의 머리가 가깝게 붙었다.

“오, 대단한데요.”

준혁은 여자에게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여자도 그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죠?”

“요즘에 이 노래만 무한 반복 중이에요. 은재 씨는 진짜 가수해도 되겠어요. 같이 들어볼래요?”

여자는 이어폰 한쪽을 준혁의 귀에 직접 꽂아 주고 다른 한쪽은 자기 귀에 꽂았다. 준혁은 리듬을 타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도 박자를 맞추었다.

은재가 알면 되게 좋아하겠네. 어서 알려줘야지.

멀리서 보고 있는 은재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좋아라 하는 두 사람.

은재는 손등으로 눈을 쓱쓱 비볐다.

아, 눈이 썩는 것 같아. 저렇게 다정하게 웃어도 되는 거야? 강 매니저, 안 되겠네.

웃음이 너무 헤퍼. 흥.

그녀는 홱 몸을 돌려서 다시 세트장으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고개를 쏙 빼고 은재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갈 거예요?”

“응”

준혁은 무심하게 답했다.

“가지 말아요. 우 매니저가 벼르고 있다는데.”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형준 씨가 그랬어요.”

“가야 돼. 신입 신고식에 빠지면 나도 너도 매장이야. 그 말은 못 들었나 보네.”

“어차피 아웃사이더인데 더 매장당할 게 뭐 있어. 그냥 지금처럼 우리끼리 지내면 돼.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응?”

진짜 걱정된다고. 강 매니저.

“우두식 같은 인간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야. 정면 돌파가 답이지.”

무식한 우두식.

표독한 최수연.

두 인간이 쌍으로 서은재를 질근질근 건드리는 꼴을 못 봐주겠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고.

제깟 우두식이 홈그라운드를 업고 뭔 짓을 할지 모르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죽기야 하겠어?

땅이 꺼질 듯, 은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강 매니저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시네…. 소주판이 벌어질 게 뻔한데, 강 매니저 주량으로는 어림도 없을걸. 죽을지도 몰라.

집 앞에 도착한 은재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숙취 해소제를 사가지고 나왔다.

“미리 마셔둬요. 술이 덜 취한대.”

“뭐 이런 걸 다.”

“주는 대로 다 마시지 말고, 적당히 빼요. 그리고 힘들면 내일은 쉬어도 돼. 모닝콜 안 해줘도 되고, 내가 알아서 촬영장 갈게. 알았죠?”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준혁은 씨익 웃어 보이며, 결전지로 출발했다.

*****

삼겹살 식당에서 TNT 매니저 정기 모임이 열렸다. 40여 명의 매니저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준혁이 들어서자 구석 테이블에서 형준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형준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테이블마다 소주병이 6병씩 세팅 되어 있었고, 잠시 후 헤드 테이블에 장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매지니먼트 팀 식구들 반갑습니다. 세 달 만에 모였네요. 올해는 매출액이 30% 늘었고 여러분 덕분에 잘나가고 있습니다.”

“연말에 보너스 나옵니까?”

장 실장은 슬쩍 웃으면 소주잔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함성과 젓가락으로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자자, 진정하시고. 새 식구가 들어왔습니다. 다들 인사하죠. 강대일 씨, 앞으로 나와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준혁에게 향하고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눈초리가 쏟아졌다.

준혁과 우두식의 설전은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도대체 어느 간 큰 놈이 두식에게 개겼는지, 다들 궁금하던 차에 드디어 오늘 정체가 드러났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서은재 씨를 맡고 있는 매니저 강대일입니다. (중략) 선배님들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인사 중간에 준혁은 저만치서 레이저를 쏘고 있는 두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준혁을 보더니 손가락 집게를 만들어 눈을 찝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가 너, 보고 있다.

준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인사가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의 품격 있는 이미지에 놀라고. 두식의 기에 밀리지 않는 포스에 또 한 번 놀랐다.

맛있게 삼겹살이 익어가고, 대화가 무르익던 중에 누군가 의자를 탁, 하고 발로 찼다.

“야, 비켜!”

양손에 소주병을 들고 술배를 들이밀며 두식이 등판했다. 형식이 비킨 자리에 두식이 철퍼덕 앉았다. 그는 준혁을 정면으로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용케도 왔네.”

“무서운 게 없어서 말이지.”

준혁은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새파랗게 어린 노무시키가. 선배 알기를 개코딱지만도 못하게 보나?”

그러자 형준이 두식에게 속삭였다.

“두 분, 동갑이에요.”

고개를 홱 돌리는 두식의 눈빛이 번뜩였다.

“뭐? 이 자식이 어딜 봐서 91년생이야, 구라치는 거 아냐? 야, 민증 까.”

늘어진 피부, 망가진 몸매, 흐리멍텅한 눈빛. 누가 보아도 두식이 8살은 더 들어 보였다.

두식이 먼저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너도 까봐'

그가 턱 끝으로 까딱, 신호를 보냈다.

“없는데, 지금.”

실명을 공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거봐, 구라치는 거 맞네, 쉐끼. 앞으로 나한테 존댓말 써. 어딜, 하늘 같은 선배님 앞에서 반말을 찍찍 해대?”

구라? 누굴 사기꾼으로 몰아.

가만히 생각하다가 준혁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탁, 하고 내려놓은 건 유학 시절 가입했던 로터리 클럽 회원증. 영어로 Stanford University라고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그 아래에 Rotary International

그 아래에 Dale Kang

헉,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스. 탠. 포. 드!

모두 머리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머리 뒤에 후광이 보였다.

매니저 중에서 최고 학력 아이가!

두식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매니저 중에서 최저 학력인 그는 준혁의 신분증을 보고 영혼이 탈탈 털려 버렸다.

“됐어?”

준혁은 자신만만한 눈빛을 두식에게 꽂아 내렸다.

“아아, 시끄럽고!”

두식은 손을 뻗어 소주병을 집었다. 뚜껑을 따고, 콸콸콸 잔을 채우고, 하나를 준혁 앞으로 밀었다. 제일 자신 있는 것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