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가루

#1장

여의도 증권가 숯불구이 갈빗집엔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냄새, 탁한 숯불 연기 냄새가 가득하고 테이블마다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아가씨, 여기 불판 좀 갈아 주세요.”

“네네, 가요.”

“상추랑 마늘 더 주세요.”

“소주 한 병 추가요.”

“고기가 타잖아요!”

“여기, 계산이요.”

하루 중 가장 바쁜 저녁 타임에는 사장이며 직원들이며 너나 할 것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빙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 좁은 테이블 사이를 날쌔게 뛰어다니는 알바생, 서은재.

긴 생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한 손에는 커다란 반찬 쟁반을 다른 한 손에는 소주병 세 개를 집었다. 아주머니들이 두 번에 걸쳐서 할 일을 한 번에 거뜬히 해내는 그녀는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이미 베테랑이 되었다.

특히 고기를 굽는 솜씨는 극히 예술이었다. 불판 위에 고기가 겉은 바삭하고 안은 살살 녹게 정확한 타이밍을 귀신같이 포착해서 뒤집고 조각조각 잘라 다시 한번 불판에서 뒤집고, 입안에 넣고 씹는 순간 배어 나오는 달콤한 육즙!

삐리릿 삐리릿 삐리릿, 알람 소리에 은재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10시네.

그리고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휙 벗어 던지고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사장니임, 저 갈게요!”

식당 안이 하도 시끄러워서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사장니임, 여기요! 두 팔을 번쩍 흔들며 또 한 번 불렀다. 멀리서 고기를 자르던 갈빗집 주인이 그제야 보고 은재를 쫓아 왔다.

“수고했어. 가다가 뭐라도 사 먹어.”

저녁도 못 먹고 다음 알바를 하러 가는 식당 막내가 안쓰러웠던 사장은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은재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은재는 꾸벅 인사를 하고 식당 문을 열고 나와, 몇 걸음 걷다가 만원을 펴서 보았다. 킁킁… 고기 냄새가 잔뜩 밴 돈 냄새를 맡으니 입이 째지게 벌어졌다. 오! 횡재다.

행여 잃어버리진 않을까 돈을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15분. 은재는 가방끈을 양 손으로 붙잡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여의도 KBC 방송국 내에 편의점 테이블에는 두 남자가 앉아서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아우, 죽겠다. 쪽대본으로 찍는 것도 지친다, 지쳐.”

“배우들도 힘들어. 사전 제작으로 가라니까.”

“우리라고 안 그러고 싶겠냐. 현실이 따라주질 않으니 어쩌겠어. 시청자 게시판 봐가면서 스토리 수정해야지, 인물 구도 바꿔야지, 그게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의 현주소라고. 시어머니가 너무 많아. 그거 무시하고 사전 제작했다가 폭망한 드라마가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연일 이어지는 밤샘 촬영에 초췌해진 몰골로 앉아 있는 사람은 박 PD,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광고 대행사 민우주 실장이었다.

“넌 모델 섭외는 끝났어?”

“아직이다. 몇 명 추천은 했는데 광고주한테 퇴짜 맞았어. 성형외과에서 틀로 찍어낸 것 같은 얼굴 말고 참신한 마스크 어디 없을까?”

“최수연은 뭐래? 연락은 해 봤어?”

“출연료를 너무 높게 불러서 안 맞아. 아역 시절부터 노출이 되어서 식상한 이미지에 그 돈을 쏟아 붓기는 아깝지.”

“뉴 페이스가 필요하겠군.”

“맞아. 광고주도 고가 모델 보다는 뭔가 신선한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 모델을 찾아 달라네. 신개념 초콜릿에 맞는 새로운 마스크를 찾으면 딱인데.”

아…. 피곤하다. 언제 이 생활을 접을 수 있을지.

광고 제작을 앞두고 계속되는 야근에 우주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때 박 PD가 발로 그의 다리를 툭 쳤다.

“뭐.”

박 PD가 턱 끝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쟤, 어때?”

한 여자가 편의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거침없이 휘날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사이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눈코입이 오목조목, 예쁘게도 들어찼다.

170센티의 큰 키에 청바지를 입고도 늘씬한 다리의 각선미까지, 시원한 비주얼이었다.

우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한 촉을 작동시켰다.

광고계에서‘마이다스의 손’이라 불리우는 민우주 실장. 매력 포인트를 귀신같이 잡아내는 능력을 갖춘 그가 발굴한 신인들은 A급 스타로 성장했다. 덕분에 그는 젊은 나이에도 실장으로 고속 승진을 했다.

드디어 편의점 문 앞에서 멈추어 선 여자는 숨이 차서 손으로 허벅지를 짚으며 허리를 굽혔다. 헉, 헉…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30분. 허리를 펴고 일어선 그녀는 혼자서 싱긋 웃음을 흘렸다. 손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데.

샤라라랑… 하늘에서 별 가루가 쏟아지는 모습에 우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천사인가? 황홀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손등으로 연신 눈을 비볐다. 방송가에서 수많은 미인들을 접했지만 이 여자, 어딘가 달랐다.

“저, 저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걸려고 했지만 여자는 편의점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한 달쯤 되었나? 여기서 알바 하는 것 같던데 오며 가며 눈에 띄더라고. 네가 보기엔 어떠냐? 나보단 네가 전문가잖아.”

우주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가 들어가 버린 문에 꽂혀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시커멓던 얼굴엔 이미 화색이 돌았다.

심… 봤다! 갑자기 기운이 펄펄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박 PD의 어깨를 툭하고 때렸다.

“아퍼, 자식아.”

“살다 살다 네 덕을 보는 날도 있구나!”

“벌써 마음 정한 거야?”

“당연하지. 여기서 기다려.”

그는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박 PD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식, 되게 급했나 보네. 이 시각에 현장 캐스팅이라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은재는 카운터를 지나 뒤편 사무실로 들어갔다. 동료 알바생은 그녀가 지나가자 코를 벌름거렸다.

“오, 좋아. 고기 냄새.”

그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은재 뒤를 따라갔다.

“이리 와. 고기, 고기!”

“그만해. 무섭게 왜 그래?”

웃으면서 은재는 걸음을 재촉해서 얼른 사무실 안으로 숨었다.

“갈비 냄새 풀풀 풍기고 들어오면 어쩌라고. 매일 이게 무슨 고문이냐?”

“여기 있네, 숯불갈비 김밥! 이거나 먹어요.”

은재는 기한이 지나 수거한 식품 박스에서 김밥을 집어 알바생 얼굴에 들이밀었다.

“됐거든. 교대자 왔으니 난 간다.”

은재는 유니폼 조끼를 찾아 입고서 카운터로 나왔다.

“저녁 못 먹었으면 박스에서 아무거나 꺼내 먹어.”

“이건 뭐예요? 웬 초콜릿, 맛있겠다.”

카운터에 놓인 초콜릿을 발견한 은재가 물었다.

“그것도 기한 지난 건데 내가 먹다가 남은 거. 먹으려면 먹고 아니면 치워도 돼.”

카운터에 서 있는 은재를 확인한 우주는 천천히 편의점 안을 돌면서 그녀를 관찰했다.

상품을 고르는 척하면서, 섬세하게 여러 각도에서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는 시선은 매의 눈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화장도 안 한 수수한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났다. 하얀 피부 때문일까,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 났다. 쌍꺼풀이 뚜렷하게 눈매를 덮고 도톰한 붉은 입술에는 윤기가 흘렀다.

희한하게도 그녀의 얼굴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였다. 순수한 소녀이면서도, 달리 보면 성숙한 여인의 모습. 게다가 볼륨감 있는 S라인은 편의점 조끼를 입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은재가 데스크 위에 놓여 있던 박스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초콜릿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입 베어 물고는 입맛이 도는 듯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맛을 음미하며 귀엽게 오물거리는 입술, 살포시 깜빡이는 눈매, 보조개가 살짝 패이며 행복하게 웃는 표정!

그것은 세상의 모든 달콤함을 가득 담은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런 데서 찾게 될 줄은.

우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시 후,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두 개 꺼내 들고 카운터로 온 그는 은재가 바코드를 찍는 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이 남자 뭐야…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이래.

아까부터 남자의 시선을 눈치 채고 있던 은재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몇 번이나 일부러 눈을 마주쳐서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이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런 부류의 남자들이 있다. 그녀가 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익히 겪었던 응큼하고, 음흉하고, 예의 없는 남자들.

알바생이라고 쉽게 여기고 무례하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을 겪으면서 퇴치하는 법도 스스로 터득했다.

편의점 알바라고 만만하게 보지 마란 말이야.

은재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인상을 더럽게 치켜떴다. 목소리도 까칠하고 도도하게.

“손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네?”

당황한 우주는 눈이 커졌다. 순둥이 같은 여자의 하얀 얼굴은 열렬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어색하게 위협적인 표정이 오히려 귀엽게만 느껴졌다.

제가 이상한 건가 싶어, 우주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 미안합니다. 나쁜 의도는 없었으니 오해 말아요.”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변명인 것을.

우주의 사과는 은재에게 먹히지 않았다. 은재는 고개를 계산대 모니터로 돌리고 새침하게 시선을 피했다.

“커피 두 개, 삼천 원입니다.”

“아까부터 유심히 봤는데 카메라가 잘 받을 것 같네요. 우리 같은 광고쟁이들은 새로운 마스크 발굴하는 게 일이라서, 혹시 광고 모델 일에 관심 있어요?”

“광고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손님, 삼천 원 결재 되었구요, 영수증 드릴까요?”

은재는 빈틈을 주지 않고 척척 계산을 진행했다. 자꾸 집적대는 이 남자를 빨리 내보내고 싶었으니까.

“일반인들에겐 낯선 세계죠. 하지만 재미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편의점 시급보다는 수입도 훨씬 낫죠. 잘 생각해보고 마음이 정해지면 연락해요.”

우주는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다가 은재가 받지 않자 명함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캔 커피 두 개 중에 하나를 은재 앞으로 스윽 밀었다.

“이건 그쪽 드리는 겁니다. 아깐 미안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은재는 쌔한 목소리로 그를 내보냈다.

우주가 나가고 나서, 은재는 명함을 집어서 가만히 읽어 보았다.

‘플래티넘 애드 민우주 실장’

명함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려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편의점 시급보다 훨씬 낫죠.’

광고 모델이라고? 얼마나 더 주길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명함을 주머니에 쑥 넣었다.

*****

일 년 후

샌프란시스코의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해변에서 바라보이는 바닷물도 같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웅장하게 뻗은 주황색 골든게이트 브릿지 밑으로 하얀색 럭셔리 요트가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려 갔다.

선상에는 시끌벅적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남자가‘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샴페인을 따고 쏴아아 쏟아지는 하얀 거품을 사람들에게 뿌려댔다. 빠른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미 한껏 취해서 옷이 젖어도 모르는 듯,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웃어넘겼다.

갑판 위에는 외국인들도 보이고 한국인 유학생, 교포들이 끼리끼리 모여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얀 바지에 프라당 남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걸친 그는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돛대에 기대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남다른 스타일.

185센티의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속 쌍꺼풀이 보이는 또렷한 눈매 안에서는 까만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명품 시계를 찬 팔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 앞 단추를 두 개 풀어헤친 사이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슬쩍슬쩍 비치고 쇄골마저 섹시했다.

시끌벅적한 무리 속에서 그는 홀연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수에 젖은 까만 눈동자에 샌프란시스코의 노을을 전부 담아가려는 듯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후우…. 그의 입술 사이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정말 끝이로군.

갑판 한쪽에는 여자들이 앉아 파티에 온 남자들을 놓고 품평회를 하는 중이었다.

환송 파티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온 그녀들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면 오늘 밤을 함께 보낼 심산이었다.

“저렇게 서 있기만 해도 화보 같지 않니.”

“이제 한국 돌아가면 못 봐서 어째.”

그녀들의 시선은 당연히 그에게로 향했다.

파티의 주인공, 그리고 언제나 유학생들 사이에서 VIP였던 그의 이름은 데일(Dale)이었다.

한국 이름은 강준혁.

“그런데 왜 그동안 여자가 없었대? 혹시 게이 아냐?”

“그건 확실히 아니야. 루이가 그랬어.”

“헉, 루이가 데일한테?”

“잘못 알고 접근했다가 된통 당했던 것 같던데. 락커룸에서 목 졸려 죽을 뻔했다고.”

“너희들 얘기 못 들었어? 예전에 끔찍이 아끼던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대.”

“설마! 데일 같은 남자를 차버리다니 제정신이야?”

“그 후로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고. 물론 소문이긴 하지만. 아무튼, 대시했다가 물먹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때까지 도도하게 듣고만 있던 멜라니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여자 나름이겠지.”

스탠포드대의 섹시 퀸으로도 불리는 그녀는 스페인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화끈한 기질과 외모 덕분에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