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더운 햇살이 짙푸른 하늘마저도 삼킬 것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적한 동네에는 어르신들이 평상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고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듬직한 소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조금이나마 막아주고 있었다.

듬성듬성 보이는 가게라 해도 겨우 20개 정도.

이제 막 거처를 구하러 다니는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아, 더워.”

부채를 한 손에 들고 캐리어를 끌고 향한 곳은 월세방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곳이었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그녀는 유난히 흰 피부와 새까만 눈동자가 수수해 보였다.

대림 부동산.

조그마한 부동산 앞에 다다르자 그녀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곤 그곳을 향해 곧장 들어갔다. 약 40분여쯤의 대화 끝에 자신이 원하는 가격대와 비슷한 방을 구하고는 그 집을 살펴보기 위해 짐을 잠시 부동산에 맡겨둔 채 부동산관계자와 함께 그 집으로 향했다.

와인 빛깔의 2층 벽돌집이었다. 부동산관계자가 2층은 주인집이고, 1층에 방이 3개 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외지로 다 나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덧붙여서 설명했다.

방을 찬찬히 둘러보니 깔끔한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부동산으로 곧장 돌아가 계약서를 쓰고 돈까지 지불하자 그제야 은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여기서 잘 지내야겠구나.”

씁쓸한 표정을 짓던 은서는 전에 같이 살던 슬미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짐을 보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선 갖고 있는 짐부터 차분히 풀었다.

똑똑.

2층에서 인자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께서 은서가 세든 방으로 내려왔다.

“아가씨인가 보네. 내가 아들놈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연락받고 방금 왔어. 그래 이름이 뭐예요?”

“아, 안녕하세요. 이은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래요. 은서 양. 듣고 보니 서울에서 왔다던데. 이 시골까진 무슨 일로 온 거야?”

아주머니의 질문에 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애써 뭉뚱그리며 말했다.

“아…, 서울은 답답하기도 하고 여기서 일단 일하면서 돈 좀 모아서 다시 올라갈 생각이에요.”

“그래요? 남들은 대도시로 나가려고 다들 안달인데, 그나저나 나이가 어떻게 돼요?”

“올해 스물다섯이에요.”

“어머, 우리 아들놈이랑 동갑이네.”

연결 고리를 찾은 듯 주인아주머니는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밖에 궁금한 걸 하나둘 물으시고는 쉬라고 하며 2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꼬박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걸어온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은서는 캐리어에 담겨 있던 얇은 담요 위에서 그대로 휙 고꾸라져 깊은 잠에 빠졌다.

*

이틀 뒤.

원래 쓰던 짐들이 택배로 하나둘 도착했다. 무더운 여름을 낀 변덕스런 날씨에 갑자기 비가 흠뻑 내렸다. 미처 안으로 들이지 못한 짐들이 바깥에서 아슬아슬하게 비를 피하며 놓여 있었다.

“빨리 안으로 들여야 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네.”

어제부터 쫄쫄 굶은 탓인지 그제야 배고픔을 감지한 은서는 동네 구경도 할 겸 투명한 비닐우산을 들고 길을 나섰다.

작은 동네라 그런지 길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고 서글픈 빗소리만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은서는 대충 위치 파악이라도 해둘 겸 찬찬히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학원-제과점-옷가게-분식집-중국집-책방-은행 등등.

그래도 꼭 필요한 가게들이 다행히 이 동네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다.

촤악.

그때였다. 웬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오며 은서의 바지에 빗물을 잔뜩 튕겼다.

“악.”

은서가 비명을 지르자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남자는 놀란 듯이 오토바이를 한쪽에 세웠다. 그는 헬멧을 벗고 그녀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미안해요. 급하게 배달을 가느라.”

배고픔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터라 빗물이 바지에 튕겨 그리 많이 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솟구쳤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좋지 않은 한숨 소리가 마른입에서 새어 나왔다. 은서의 고운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보아하니 옷도 그렇게 안 젖은 거 같은데 노여움 푸시는 게 어떨지요? 제가 배달이 지금 밀려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남자는 밀린 배달 때문에 몹시 바빠 보였다.

“지금 장난해요? 그쪽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고요.”

형식적인 사과만 하고 바빠 보이는 그의 행동에 괜히 심술이 난 은서가 언성을 높였다. 더 이상 마주하기 싫다는 듯 남자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오토바이가 시야에서 멀어져가자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하아, 뭐야 이게.”

화가 나 씩씩대던 은서는 바로 앞 분식점에 들려 우동과 떡볶이를 배불리 먹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동네의 번화가와 은서의 집은 고작 10분 거리. 걷는 동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기다렸다는 듯 날씨가 쨍쨍해지자 들고 있던 투명 우산을 곱게 접고 물기를 마저 털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은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깥에 있던 짐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문을 여니 분명 잠그고 갔던 문이 쉽사리 열렸다. 밖에 있던 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실에 놓여 있었다. 은서는 대체 누가 짐을 옮겼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층 주인집으로 찾아갔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자 주인아주머니 대신 제 또래 남자가 불쑥 나왔다.

깔끔한 베이지색 티에 면바지 차림의 말쑥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진밤색 눈을 한 남자는 한눈에 봐도 180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와 묘하게 어울리는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스쳤다.

“누구시죠?”

“며칠 전 1층에 세 든 사람인데요. 주인아주머니는 안 계시나요? 뭐 좀 여쭈어보려는데.”

“어머니 지금 시장에 가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저한테 말씀해주셔도 되는데.”

그제야 자신이랑 동갑인 아들이 있다는 말을 한 아주머니의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남자가 바로 집주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니 다름이 아니라 제 짐이 분명 밖에 있었는데 안으로 다 옮겨져 있어서요. 한두 개도 아니고 꽤 많은데 누가 대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은서를 응시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시장 가시기 전에 저보고 안으로 좀 넣어달라고 하셔서 제가 옮겼습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야 궁금증이 해결됐네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무튼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별로 무겁지도 않던 데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만 쉬세요.”

“아, 네네. 그럼 이만… 실례했습니다.”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린 은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다시 돌아왔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땐 낯선 눈빛이 차갑다고 막연히 느껴졌는데 몇 마디 대화를 해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 걸까.

잠깐 마주한 남자였지만 이내 그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짐 박스를 하나둘, 풀었다. 방을 닦고 먼지를 게워내니 마음도 덩달아 말끔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짐 정리가 끝나자 저절로 은서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느덧 날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구슬프게 들리는 매미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멍하니 귀에 맴돌았다. 문득 별이 보고 싶어진 은서는 옥상으로 향했다.

“어?”

옥상에 올라가니, 주인집 아들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피우던 담배를 끈 후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짐 정리는 다 하셨나 봐요?”

“네. 대충은요.”

“어머니 말로는 저랑 동갑이라던데.”

“네. 저도 주인아주머니께 들었어요.”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말 놓기로 하는 거 어때요?”

“아, 네. 뭐 그러던가요.”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말 놓을게. 난 김한성. 넌?”

“…이은서.”

그날 마주 보며 서로의 이름을 나눴다. 유난히 진한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간질이던 한여름 밤이었다.

#1.

며칠이 지났다. 은서는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동네 신문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몇 장 넘긴 결과 눈에 띄는 문구를 발견했다.

[느낌표 책방. 여직원 급구]

책방은 마음을 가라앉힐 최적의 장소였다.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은서는 문구를 보자마자 신문에 기재되어 있던 번호로 당장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책방 주인인 것 같은 여자가 받았다.

“네. 느낌표 책방입니다.”

“여보세요? 신문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직원 혹시 구하셨나요?”

“아뇨. 광고를 오늘 내놔서요. 그쪽이 하시게요?”

“네.”

“그럼 일단 오늘 2시까지 가게로 와볼래요? 위치는 아시죠?”

“네. 이따가 뵐게요.”

저번에 지나다가 본 기억이 있던 은서는 간단히 샤워를 한 후 책방으로 향했다. 중국집 옆에 위치한 책방은 생각보다 꽤 넓어 보였다. 이 동네에선 유일한 책방이라고 했다. 여주인은 30대 후반쯤으로 보였고 간단한 면접을 거친 결과 내일부터 당장 출근해도 좋다고 흔쾌히 말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월급은 120만 원. 뭐, 나름 만족했다. 방세 내고 이것저것 생활비를 쓰면 80만 원씩은 적금을 넣을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 외로 집도 빨리 구하고 일자리도 구했으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은서는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배가 조금씩 고파오자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는 바로 옆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곧 은서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그곳엔 비 오는 날 자신의 옷을 더럽혔던 그때 그 남자가 떡하니 서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식탁 위를 걸레질하던 그는 은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얼마 전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듯 무심히 인사를 한 후 제 할 일에 집중했다. 앞으로 자주 마주치겠다고 생각하니 아까의 좋았던 기분이 금세 옅어졌다.

둘러보다가 구석진 자리에 골라 앉으니 곧 그 남자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짬뽕 한 그릇 주세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한 후 가게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적당한 공간에 사람들 몇몇이 요기를 하고 있었고 서빙을 하는 사람은 이 남자 한 명뿐이었다. 15분쯤 기다리니 꽤 먹음직스러운 짬뽕이 나왔다.

매우면서도 얼큰한 게 딱 입맛에 맞을 정도로 맛있었다. 뚝딱 한 그릇을 비우곤 계산하려는 찰나, 그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그때 비 오는 날… 맞죠?”

기억하나 보네.

“네.”

“아아, 맞구나. 그땐 정말 미안했습니다. 오늘은 그냥 음식값 안 받을 테니 가세요.”

옷을 더럽혔던 게 이제야 기억이 나고 미안했는지 짬뽕값은 안 받는다고 그냥 가란다.

“그쪽 맘대로 그렇게 해도 돼요?”

“네. 괜찮으니 다음에 자주 찾아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한 은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짬뽕값이 굳었으니 이걸로 과자나 사서 먹어야지. 그리 다짐한 은서는 동네 슈퍼로 곧장 발걸음을 향했다.

이것저것 대충 가지고 있던 돈에 맞게 산 과자를 들고 집으로 오는데 대문 앞에 웬 낯선 여자가 주위를 서성거렸다. 창백할 정도로 희고 고운 피부에 긴 생머리를 한, 가련한 느낌의 여자였다.

‘누구지? 이 집에 세 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여자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 여자가 은서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어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네? 저요?”

“네. 저기 여기가 혹시 김한성 씨… 집 맞나요?”

김한성? 주인아줌마 아들?

“네. 여기 주인아주머니 아들인데요.”

“아아, 제가 제대로 찾아왔네요. 감사합니다.”

“네.”

가볍게 묵례를 한 후 은서가 집으로 들어가자 여자도 뒤따라 들어와 2층으로 곧장 향했다. 밖에선 구두 굽 소리가 또각거렸다.

‘누구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집 아들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자 은서가 문 가까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누구세요?”

“나.”

한성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은서가 경계심을 풀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은 서로 어색했지만 반말이 이제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 엄마가 같이 저녁 먹자고 올라오래.”

“감사하지만 난 밥 먹어서 배부른데.”

짬뽕 한 그릇에 후식으로 과자까지 다 먹은 은서는 배가 불러 노곤한 잠이 올 지경이었다.

“그러지 말고 올라가자. 삼겹살이 기가 막히게 구워졌어. 너도 같이 먹으려고 많이 구웠거든.”

아줌마가 초대하는 저녁이라 배가 불러도 더 이상 거절할 순 없었다.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던 은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삼겹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줌마는 반갑게 자리에 앉으라며 재촉했다. 아까 본 낯선 여자와 그 옆엔 한성이 앉았고 아줌마 옆에 은서가 앉았다.

“아까 잠시 뵌 분이네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네.”

한성과 아주머니가 의아하게 자신들을 바라보자 은서가 재빨리 말했다.

“아까 이분이랑 요 앞에서 마주쳤거든요.”

“아 그렇구나. 자 은서도 많이 먹고, 아, 이쪽은 우리 한성이 친구.”

“정진아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이은서예요.”

친구라고? 그렇게 안 보이던데.

“참, 일자린 구했고?”

“네. 내일부터 근처 책방에서 일하려고요.”

“잘됐네. 그 책방이 하나뿐이라 장사는 좀 될 거야. 이 동네가 워낙 작아서 일자리 구하기 힘드니까 한 번 열심히 잘해봐.”

“네. 그래야죠. 감사합니다.”

“자. 다들 많이 먹어.”

은서는 삼겹살을 한두 점 집어 먹다가 앞에서 앉아있는 진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현듯 진아의 눈이 참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서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한성의 보통 친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은서는 삼겹살을 한두 점 집어 먹다가 앞에서 앉아있는 진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현듯 진아의 눈이 참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서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한성의 보통 친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