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에 착지하면서 기체가 흔들렸다. 빈은 비즈니스 석에 등을 기댄 채 창문을 통해 공항의 활주로를 내려다봤다. 미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장장 13시간도 넘는 장거리 여행을 한 탓에, 온몸이 뻑적지근한 게 당장이라도 뜨거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동안 대한항공, 아시아나, 일본항공, 싱가포르항공 등 타 항공사 비행기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공항 직원들, 그리고 공항을 누비는 차들이 보였다. 서서히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 건물에 다가가더니 멈췄다.'<승객 여러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저희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짐칸에서 가방을 꺼내고 내릴 차비를 서두르느라 기내는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빈의 좌석은 창가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승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기내가 한산해지자 빈은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칸에 넣어 둔 작은 기내 여행 가방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비행기 출구 옆에 서 있던 스튜어디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스튜어디스의 얼굴이 수줍은 색시처럼 홍조를 띠었다. 그런 스튜어디스의 반응에 빈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어리면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한국에 왔다는 벅찬 기쁨에 갓 시골에서 상경한 시골뜨기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는 고국이었다. 앞서서 걷는 사람들을 따라 미로와 같은 길을 묵묵히 걸어 입국 절차를 밟고 밖으로 나선 순간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행객들의 이름과 여행사 이름이 적혀 있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유니폼 차림의 가이드들을 보면서 빈은 마침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똑같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그리고 황색인종 특유의 피부를 보게 되자 ‘만세!’라고 외치고 싶어진 빈은 휘파람을 불면서 인천국제공항 건물을 빠져나왔다. 흰 구름으로 수놓아진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뜨기 힘들 정도로 따가운 햇살인데도 빈은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린 채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국의 하늘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다가왔다. '앞으로 한국에서 2년 동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조차 했다. 하지만 이곳에도 빈의 가족은 존재했다.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낯익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탈 수 있는 승차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빈은 쏙 들어간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기내에서 식사를 했지만 배 속이 허전했다. 하지만 학교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힘차게 택시 뒷문을 열었다.'“한강대학교로 가 주세요.”'그 말과 동시에 빈은 피곤을 못 이기고 눈을 감았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내내 의자에 앉아 있느라 몸이 불편하다 보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공항에서 학교까지 가는 거리 풍경을 보고 싶어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자 빈은 잠을 쫓으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힘껏 흔든 다음 뺨을 손바닥으로 톡톡 치면서 창문을 내렸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빈의 얼굴을 때리면서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봄이 오기 전이라서 바람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창문을 닫고 싶지는 않았다. 감회 서린 눈빛으로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거리 풍경을 지켜보던 빈의 눈은, 졸음에 겨워 몇 번씩이나 깜빡거리다가 마침내 서서히 감겼다. '한참을 내달린 택시는 한강대학교 입구에 멈춰 섰다. 택시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뒤에 앉아 있는 손님을 쳐다봤다. 얼굴을 옆으로 기울인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과 섬세한 턱선,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긴 목이 왠지 여린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쉽게 말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그는 창문을 내린 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려다가 담배를 입에서 빼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