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출발한 마차는 어스름한 밤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정말 시기적절하지 아니한가. 새벽에 몰래 떠나 한밤중에 남몰래 숨어든 것이다. 그것이 내 신세를 단번에 대변하고 있었다.'비록 다음 날 날이 밝아 다른 이들에게 보인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어둠이 고마웠다. '“어서 준비를 하고 빨리 주인님께 가야 합니다.”'나를 데리고 함께 온 남자는 내게 무척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막상 마차를 타자 자신을 행스라 소개하는 단 한마디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묵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께 일곱 번이나 찾아와 ‘거래’를 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설마 여독을 풀 시간도 없는지도 몰랐다. 멀리 성이 보이자마자 ‘행스’가 내게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걸었다. '“다 도착했습니다. 벌써 도착이라……, 주인님이 힘을 더 쓰신 모양입니다. 주인님이 기다리신지 오래되었으니 당장 준비하셔야 할 듯합니다.”'“네?”'그가 중간에 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말한 ‘준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런 나는 아랑곳없이 행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에 타는 순간부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내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행스가 앞장서며 안내한 곳은 욕실이었다. 그 앞에는 푸짐한 인상의 중년 여인 둘이 대기 중이었고 왠지 초조해 보이는 행스가 여인들에게 말했다.'“서둘러 주세요. 더는 참기 어려우실 겁니다.”'‘참아? 무얼……? 설마, 그……것을 말하는 것일까?’'나는 생각으로나마 첫날밤, 잠자리에 대해 떠올리는 것도 조금씩 두려워지고 있었다. '행스의 채근에 그중 한 여인이 답했다.'“네, 저도 압니다, 벌써 한 달이 넘었으니.”'무슨 대화인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행스가 나가자 재빨리 나의 옷을 벗기고 몸을 씻기는 여인들의 손길이 바빴다. 여인들은 솜씨 좋게도 짧은 새, 온몸을 씻기고 금세 머리까지 감겨 주었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동그란 이상한 통 안에 밀어 넣어 당황했더니 휭 소리가 나며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머리를 말리는 기구였나 보다. '나는 능력자의 힘이 발휘되는 신기한 물건을 보는 것으로 잠깐이나마 이 상황을 벗어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여인들은 말린 머리를 하나로 묶고는 속이 환히 비치는 가운 하나만을 입혀 주었다. 그 위에 발까지 덮는 두꺼운 가운을 입은 나는 여인들의 안내로 욕실을 나서게 되었다. '그녀들의 바쁜 손길에 나는 이 낯선 곳에 도착하여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백작의 침실 앞에 서게 되었다. '도착한 이래로 나에게서 계속 눈을 돌리는 행스를 보아하니 그는 철저히 내외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감히 주인의 여자를 넘보지 않는다는 표시였다.'나는 아직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침실을 두드리는 행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준비가 되었습니다.”'“들어와!”'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자 행스가 문을 열고 비켜나자 뒤에서 여인들이 나를 살짝 밀었다.'저도 모르게 내디뎌진 발걸음에 어느새 방 안이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나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았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감히 혼례를 바라지는 않았다. 아무리 죄 있는 몸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남자의 침실에 도둑처럼 몰래 들어와야 할 줄은 몰랐다.'무언가 머릿속을 내리치며 이것이 정말 현실이라는 걸 강하게 인식시켜주고 있었다. 발아래 부드러운 양탄자도 벽에 붙어있는 난로에서 아른거리는 불빛도 이 모든 상황을 확실하게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앞의 사내, 그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향취가 나를 어지럽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지만.'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러자 눈물이 고여 눈앞이 앞을 뿌옇게 변했지만 그 속에 타이가 떠올랐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삼킬 수 있었다.'이상하게도 그를 처음 본 순간 든 생각은 무언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가 똬리를 튼 것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나의 엉뚱한 생각을 날리려는 듯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가운 하나만 걸친 그는 벽난로의 불빛 하나만 의지한 채 보아도 너무나 잘생긴 사내였다. 짧은 가운 아래로 보이는 그의 날씬하며 탄탄한 다리가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잘생기고 잘난 사람으로 보였다.'‘이런 사람이 왜 나 같이 볼품없는 여자를……?’라는 의문도 잠시.'“이리 오라니까.”'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딘 나는 그와 한 발짝 사이로 다가가 섰다.'그가 나의 턱에 대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흠칫하며 놀라는 나는 그렇다 치고, 그가 숨을 헉, 하고 들이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 턱을 들어 올린 손가락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 건 내가 떨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일까. '“이름이…… 뭐지?”'하지만 정말 나만 떨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나의 이름을 묻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팸, 팸입니다.”'굳이 가문의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면의 ‘그런 계약’이야 행스라 불리는 그 남자가 알아서 했을 테고 백작은 내가 어디에서 온 여자인지 알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어차피 난 그가 거치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리라. 나중에 이름이나 기억할까.'“그렇군, 팸…….”'그가 속삭이는 나의 이름이 너무나 에로틱하게 들렸다. 내 이름이 이렇게도 들릴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이 나의 두려움을 떨쳐주지는 못하였다. 아직 가늘게 떨고 있는 나의 어깨를 잡은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거세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착각일 게 분명하지만 나는 이 남자가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생각은 잠시 뿐, 나는 당면한 현실에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리깐 눈 아래로 그의 맨발이 보이면서 머리 위로는 그의 숨소리로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팸.”'“……네.”'간절한 그의 목소리에 난 억지로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은 목소리가 왠지 나의 두려움을 씻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떠……. 눈을 떠서 나를 봐.”'간청과도 같은 목소리에 살그머니 고개를 든 나는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당장 나를 삼킬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떨지 마……. 네가 싫다면…… 물러날…….”'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는 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과는 반대로 그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의 고통스런 눈빛은 순간 내 두려움을 이기고 연민을 자극하였다. 일렁이는 불빛에도 꽉 쥔 그의 주먹이 떨고 있는 것은 충분히 비춰주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인지 생각하고 의무를 상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은 핑계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무언가 그를 옭아맨 것이 내 손에 잡힐 듯한 느낌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그것은 실수였던 것 같다. 그는 내가 무의식중에 한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겹쳐지는 입술에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입술을 겹치며 그의 재빠른 손은 어느새 나를 감쌌던 두툼한 가운을 벗겨내었다. '흠칫 놀라는 나를 그가 더욱 세게 잡아당기며 깊게 키스했다.'그리고 오로지 한 겹 남은 잠자리 날개 같은 엷은 가운도 찢기듯 그의 손에 벗겨지고 말았다. '“네가 손을 내민 거야, 그렇지?”'“…….”'나는 내 입술에 대고 속삭이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확실한 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쳤지, 내가 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아냐, 더 이상은……. 첫날이니 배려해 줘야겠지만 나의 이성이 남아나지 않았어. 이건…… 네가 너무 늦게 온 탓이야!”'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나를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