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삐꺽 열고 영준이 표정 없는 얼굴로 여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여자가 누워 있는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그녀의 얼굴을 덤덤히 내려다봤다. 핏기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 메마르고 건조해서 터지고 찢어져 각질이 일어나는 입술, 초췌해 움푹 들어간 눈. 한 달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꼴이 말이 아니군.”'남자의 건조한 목소리에 그때서야 방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눈치 챈 보리가 힘겹게 눈을 떴다. 한 달 전, 어둠에 싸인 캄캄한 곳에서 언뜻 본 적 있는 남자였다. 가냘프고 힘이 없어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 보리가 눈살을 꼿꼿이 세우고 영준을 뚫어질 듯 쏘아봤다.'“이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많을 텐데……왜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지? 생각보다 미련한 여자였군.”'기분 나쁜 남자의 말투에 보리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애써 지탱하며 험악하게 내쏘았다.'“죽이고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얼른 와서 날 죽이라고 해!”'표정 없던 영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쪽 입가를 쓱 올리면서 그가 이기죽거렸다.'“왜 거추장스럽게 우리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거지? 뭐, 빨리 죽는 방법도 있긴 하지.”'그러곤 그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총알을 발사하는 흉내를 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개자식들, 두고 봐. 내가 이곳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너희들을 모두 지옥에 처넣을 거니까.”'그렇게 말하는 보리를 향해 비웃음을 피식 흘리던 영준이 슬며시 비꼬았다.'“근데, 너한테 그럴 만한 힘이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부실한 몸으로 말이야.”'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보리는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너무도 화가 나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약한 마음을 저런 나쁜 놈한테 드러냈다는 사실이 마냥 창피스러운 듯 보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한참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섬뜩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넌, 그 잘생긴 얼굴이 참 아깝다. 그런 완벽한 얼굴로 겨우 한다는 게 다른 사람의 뒤나 봐주는 똘마니였니?”'그 말에 영준은 다소 흠칫했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곤, 그녀 가까이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러고는 손으로 그녀의 야윈 얼굴을 꽉 잡고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스캔하듯 찬찬히 살펴보았다.'“놔! 뭐하는 거야?”'당황한 듯 버둥대며 보리는 영준에게서 벗어나려고 악을 썼다. 그런 그녀를 가볍게 제압하며 영준이 잇새로 차갑게 내뱉었다.'“윤보리, 그 하찮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서로의 눈빛이 깊이 마주쳤다. 왠지 익숙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 그런데 왜 이 순간에 한 달 전 혜성처럼 불쑥 나타나서 친구들을 구해 주었던 복면을 쓴 남자의 눈빛이 언뜻 스쳐 가는지 몰라서 그녀는 움직임을 우뚝 멈추고 영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칼처럼 단호하고 명확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죽고 싶지 않으면 까불지 마라. 난 까불고 우는 여자는 딱 질색이니까.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고 싶으면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미련하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지 말란 말이야. 시체를 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꽉 잡고 있던 보리의 얼굴을 놓아주고 영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냘프고 메마른 그녀의 모습에 영준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나직하게 덧붙였다.'“몸이 허약해 보이니 의사를 부르든가, 밥을 많이 먹어 두는 게 좋을 거다. 도망치거나, 죽고 싶더라도 힘이 있어야지 않겠나?”'''“난 더 이상 낭비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얼른 입고 나와. 내가 무척 신경을 써서 준비한 거니까, 당신한테도 잘 어울릴 거야.”'대충 훑어보아도 가슴이 훤히 노출된 민망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였다. 마치 적나라하게 알몸으로 서 있다는 느낌에 그녀는 수치심이 밀물 듯이 밀려오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사악하게 느껴지는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을 보자, 참았던 화가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보리는 손바닥에 온 힘을 주어 그의 뺨을 때렸다. '“야, 내가 창녀야?”'짝,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를 윤후에게 건네주고 돌아서서 걸어가던 영준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금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그녀의 돌발 행동에 보리 스스로로 멍해졌지만, 윤후는 의외로 차분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윤후가 차갑게 입술을 비틀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곧장 침실로 걸어갔다.'침실에 들어서자 윤후는 보리를 침대 위로 거칠게 팽개쳤다. 두려움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는 매고 있던 넥타이를 끌렀다. 그러곤 발버둥 치며 저항하는 그녀를 완력으로 제압하고서 사악하게 내뱉었다.'“네가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건방지게 행동하지 마라. 난 그렇게 배려심이 많은 남자는 못되니까.”'그리고는 그녀의 뒷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아파오는 통증에 그녀의 입이 조금 벌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그의 혀가 매끄럽게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갈증 끝에 시원한 물을 만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맛보기 시작했다. 작고 예쁘게 생긴 그녀의 입술을 물고 빨고 핥으면서 그는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타액을 모조리 들이켰다.'“읍…….”'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그를 밀어내려 버둥댔지만, 윤후는 좀처럼 보리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힘주어 그녀를 껴안고서 그녀의 블라우스 앞섶으로 손을 밀어 넣어 둥글고 모양 좋은 가슴을 유린했다.'“네가 반항하면 할수록, 그건 나를 자극하는 것밖에 더 안 되니까, 얌전하게 있는 게 좋을 거다.”'수치와 모욕감에 보리는 몸을 오스스 떨면서 윤후를 험악하게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는 우악스런 손길로 그녀의 옷을 거침없이 벗겨 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굵은 눈물이 그의 손등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코앞에 두고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욕구를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한 달 전, 사방이 어둠에 싸인 곳에서 그녀를 만났었다. 워낙 그가 노리던 목표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아랑만 잡아들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웬걸, 부하들은 난데없이 엉뚱한 사람마저 납치해 왔었다. 다들, 바보 아냐고 그가 호통 쳤지만, 부하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몸을 꽤 쓰는 자들이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서 죄다 잡아왔습니다.”'“꽤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도 있더군요.”'족제비처럼 생긴 다른 부하가 끼어들었지만, 그때까지도 윤후는 솔직히 족제비가 말한 계집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캄캄한 지하창고에서 그녀를 만난 후, 윤후의 생각은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깊고 정기로 차 넘치는 새까만 눈동자, 떨지 않고 또박또박 내뱉던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에 윤후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랑을 죽인다면 나머지 친구들은 다 풀어 주겠다는 자신의 으름장에도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여과 없이 도전적인 눈빛을 내보냈다. 게다가 가냘프고 청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는 미친 자식이라고 험악한 욕설도 스스럼없이 내뱉으며 자신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자신을 변태라고 취급할 정도로 그때 윤후는 그녀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짜릿하고 자극적인 쾌락을 느꼈고, 흥분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그녀의 존재가 반가웠고, 깊게 잠들어 있던 영혼이 벌떡 깨어나는 듯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발칙하게도 그녀는 눈앞에서 도주하다가 그만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만약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윤후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었다. 그녀 때문에 아랑을 놓친 건 몹시 안타깝고 허무했지만, 계속 피를 쏟으면서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창백한 모습에 그는 언제 그런 것 따위를 자세히 따질 정신 같은 건 없었다. 지금껏, 자신에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거나, 한 번이라도 자신을 배신한 자는 가차 없이 잘라 버렸고 파멸시키거나, 생매장 방식으로 처리했던 것이 그의 잔인한 원칙이었다. 그런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헨리 박사의 이마에 그는 총구를 겨누고 위협했다. 그것도 얼굴을 한 번밖에 보지 못했던 여자를 위해서…….'하지만 지금, 눈물에 젖은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그는 잠시 주춤거렸다. 잔뜩 흥분한 자신과는 반면 그녀의 몸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도 젖지 않은 여자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건 아마도 몹시 불쾌한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든 그는 순간 극심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때마침 시끄러운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차 대기했다고? 알았어. 곧 내려갈 테니까, 좀 기다려.”'“내 몸이 탐나서 여태껏 날 여기에 붙잡아 둔 거였니? 그토록 여자에 굶주렸어? 어? 이 나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