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요즘 나 너한테 새삼 놀라고 있다. 자! 여권이랑 대충 속옷이랑 옷가지 몇 개 챙겨왔어.”'경은이 빵빵한 배낭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지윤은 경은이 내려놓은 배낭에 손을 가져가 괜히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녀는 머뭇머뭇 물어보았다. '“아빠는?”'“아저씨는 새벽녘에 휑하니 나가신 모양이야. 일어나 보니 너처럼 안 보이시더라. 아직은 네가 사라진 걸 모르실 걸?”'“다행이다.”'“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아저씨 몰래 도망가는 거면서 끝까지 착한 딸로 남고 싶어?”'툭 하니 내뱉는 경은의 말에 가슴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지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경은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걱정할 자격이나 있을까? 아직은 내가 한밤중에 그에게로 도망치듯 와버린 것을 모른다는 것에 안도하다니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행동인가?’ '지윤은 씁쓸하게 웃으며, 닉과 함께 창가에 서있는 루크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경은이 호텔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뚫어져라 그녀들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크를 등지고 서 있던 경은은 슬쩍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인상을 쓰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나 참, 뒤통수 따가워 못살겠네. 야, 루크․마이어는 내가 너 데리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아주 잡아먹을 듯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뭐? 설마.”'경은이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등 뒤를 가리켜 보이면서 물었다. '“그나저나 영국으로 바로 가는 거야? 가면 저 인간이랑 같이 지내겠네?”'“모르겠어. 내가 영어를 잘 못하니까 그냥 널 부르라는 소리와 여권이라는 말만 알아들었을 뿐이야. 복잡한 건 몰라. 그냥 같이 있고 싶어.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난 이미 한 번 그를 포기하려 했었는걸. ……나 한심하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따라가려 하다니.”'“아니. 한심한 건 아닌데,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네 말대로 서로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데, 게다가 넌 태환 오빠 아니면 영국에 연고도 없잖아. 집도 절도 없이, 돈도 없이 오로지 남자 하나에 의지해서 낯선 곳까지 간다는 게 난 다만 너무 걱정이 돼. 게다가 평범한 남자도 아니고.”'“돈은 우선 영국 여행 가기 위해서 모아뒀던 거 예상외로 빨리 돌아와서 좀 남은 게 있어.”'“흠.”'경은은 턱에 손을 대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루크가 아닌 닉을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네 일정이 어떻게 돼? 오늘 출국한다며? 바로 영국으로 가는 거야?”'“아니. 일본에서 2박 3일, 홍콩에서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갈 거야.”(註-비자면제협약이 맺어진 나라들은 관광과 간단한 방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별도의 비자가 없어도 여권만으로 입국이 가능하며, 최대 90일 동안 체류할 수 있다.) '“영국에 가면 전에 가르쳐줬던 당신 연락처로 바로 연락 가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