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반월지가 1권


#프롤로그

그 날은 달빛조차 시렸다. 서로의 흔적이 가득한 후원에서 그를 기다렸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길 발걸음 속에서도 그를 구별해 낼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 마음에 새긴 흔적은 쉬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숨 한 번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쏟아질 듯한 별빛이 머리맡에 내렸다. 우린 참 먼 길을 걸어왔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먼 길을 돌아왔다.

쉽게 걸어올 수 있는 길을 이렇게 멀리 오래 돌아온 것은 어리석고 나약한 나를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국, 그 무수한 선택의 시간이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떠나고 싶다 하면 언제나 보내주었다. 거절한다면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모든 순간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의 마음은 침묵 속에서 서로에게 절실히도 닿았다.

보내기 싫은 마음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풀지 못한 감정의 얽힌 조각들이.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벨 수는 없는 법이니, 누가 그를 대신하겠는가.

차마 잡지 못하는 그도, 그 마음을 아는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라. 늘 그랬지 않느냐.”

“폐하를 믿습니다.”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것은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몫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떠나는 것을 택하였다. 이젠 모든 것이 버거운 어리석은 도망일 수도, 이기적인 결정일 수도 있으나, 그를 위한 결정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내게 어찌 이럴 수 있느냐.”

그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황명을 번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데, 헌데도….”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 눈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뒷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함께 떠나자는 말을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강하다는 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굳세고 단단한 사람이었고, 난 그 모든 걸 버티기엔 너무나 나약했다.

그는 나약함을 들키지 않고 싶을 때마다 입을 꾹 닫아버렸다. 가끔 그도 평범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리곤 했다.

웬만했으면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려도 남을 사람이었다. 돈이나 권력에 속박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제왕의 자리에 있는 한 다른 이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떠날 사람 또한 아니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어린 날, 네가 왜 날 그런 눈으로 보았는지.

어차피 내정되어있는 태자비. 욕망이 가득한 어른들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춤을 추고 싶지 않았던 나만큼 너도 그 자리와 지위가 많이, 아주 많이 버거웠구나.

우린 서로를 보며 어리고 나약한 자신을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린 그 멀고 먼 길을 함께 달려왔다.

서로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때론 다투기도 하면서 그 길을 함께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처음부터 계획된 하늘의 장난인지도, 불쌍하고 어린 영혼들이 그럼에도 함께하길 바라는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서로를 본 순간 외면해야 했을까. 아무리 도망가도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하여도 결국 세상이란 노름판 위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한바탕 놀고 있는 광대에 불과했다.

왜 너여야만 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가 없기에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잊으셨습니까. 당신은 이 나라의 황제, 저는 황후입니다. 애초부터 전 이곳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오래 끌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대체 어찌할까. 널 밖으로 내보내기라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너와 비슷한 자를 찾아내어….”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얕은 수를 떠올리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리,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 그럼에도 우린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어쩌면 처음부터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했던 건 황제가 아닌 그였고 그가 원했던 건 황후인 나였다.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었으니,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나약한 인간의 마음으로 너무도 찬란한 것을 원했다.

“…어찌 내 손으로 널 죽이게 하느냐.”

그는 살짝 건드려도 중심을 잃을 만큼 휘청였다. 평소 같았으면 잡아주었겠지만, 오늘은 손도 대지 않았다. 한 번 더 본다고, 한 번 더 잡아준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폐하께선 저 없이도 잘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없이 살 수 없었다. 도대체가 멀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천하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너는 누구보다 나에게 잔인하다. 아느냐?”

타박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닿았다. 익숙하고도 늘 그리웠던 목소리.

그가 부르는 저 이름을 이제는 들을 수 없겠지. 슬프게도 우리는 이번 생을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미워했던 시간보다 사랑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으니, 그조차 다행이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투정을 받아줄 수 없는 자리였다.

“절 잊으면 안 됩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걸 꼭 그리 해야만 아냐는 듯, 타박하는 눈빛이었다.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파할까, 많이 슬퍼할까. 어쩌면 그냥 그렇게 살아갈까.

아니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강하고 멋지게 앞을 헤쳐 나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많이, 아주 많이 좋아했다.

고요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흘러갔다.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앞날을 향해 나아가셔야지요.”

닦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흘러가는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날 위해 죽어… 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를 향해 웃었다. 누구보다 환하고 아름답게. 그를 만났던 처음처럼.

“…기꺼이.”

아무것도 몰랐던 당신이어서 행복했던 그 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나의 그대여. 안녕히.

**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즐겁게 머리를 간질였다.

나뭇잎이 오색으로 물들고 곡식은 여물고, 동물들은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날.

황후가 사사 당하는 날,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평온하고 평탄해서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바람 따라 흘러온 구름이 흘러갈 뿐이었다.

“폐하.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휘의 표정은 멍했다. 이곳이 어딘지조차 잊은 사람의 눈이었다.

“벌써 그리되었느냐….”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화려한 황궁의 지붕이 빼곡했다. 이 넓은 궁이 처음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멀어지는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또 한 사람이 떠났다. 이 자리를 지킬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녀를 뒤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에서 처참한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답을 찾는 건 의미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 사람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찾아온 하나뿐인 사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함께한 모든 순간이 영원과 바꿀 만큼 찬란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하늘 끝으로 구름이 흘러갔다.

아, 일장춘몽(一場春夢)이어라. 왕의 사랑은 얼마나 덧없는가. 완연한 가을의 정취는 갈수록 깊어지는데, 사랑은 연기처럼 흩어질 뿐이니.

높다란 궁궐의 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싸우고 화내고 울며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낸 것만 같다.

집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황궁은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죄인 연세연은 황명을 받들라. 폐후, 연세연은 반역을 꾀하고 나라의 근간을 흔든 것이 첫 번째 죄이며, 후궁을 올바르게 통솔하지 못하고 투기와 잔혹함으로 그들을 다스린 것이 두 번째 죄이다. 태자를 낳고 오랜 시간 황후로 지낸 정을 생각하여 마지막 자비를 베풀려 했으나 악독한 성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였으며 마지막까지 패악을 저지르고 술수를 부린 것이 세 번째 죄이다.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으나 황후의 체면을 생각하여 자결을 명한다. 황명을 받들라.”

한 단어, 한 단어가 귓가에 쿡쿡 박혔다. 역모, 투기, 악독한 성정. 비웃음이 흘렀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고작 자신을 서술하는 것이 그뿐이라니. 그 말들은 인생의 신산함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사랑은 투기였고 의리는 역모였으며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은 악독할 뿐이었다.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태평성대를 펼치는 성군이 되시옵소서.”

약을 받아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 곳곳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쓰디쓴 약은 감각을 마비시켰다.

삼키지 못해 목구멍으로 그저 흘려보냈다. 정신은 점점 몽롱해졌고 앞이 흐려졌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아… 세연아… 세연아!”

처절한 외침이었다. 황제의 체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의식이 사라져갔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연처럼 자꾸만 그를 마주했던 순간들, 서로 만나 사랑했고 아파했고 행복했던 우리의 과거가 찬란한 기억이 되어 천천히 지나갔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마지막 정신을 붙잡고 그에게 말했다. 흐려지는 시야에서 울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이번 생은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듯했다. 어쩌면, 나는 나보다도 더 그를 사랑하였다. 설령, 그가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나는 그를 용서하고 할 것이니.

나의 사랑은 참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었다.

#1. 지독한 인연의 시작

은나라의 수도, 건릉에는 이를 관통하는 큰 강이 있었다. 청천강은 은나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큰 강을 중심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어졌고 나루를 따라 상단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연화 상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했다. 많은 상인이 왕래하고 물건들이 오갔다. 다른 나라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상단이 있는 강가에는 언제나 상인들과 물건들이 바삐 오갔다. 이곳에서 바람을 맞으니, 가슴이 뻥 뚫렸다.

“역시 난 이곳이 좋구나.”

나루터에는 또 새로운 배가 들어오고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먼 곳에서 온 이국인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사람 사는 것 같은 이곳이 좋았다.

바삐 가는 그들 속에서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저 멀리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익숙한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

“안료가 있습니다. 한 번 구경하고 가시지요.”

밝은 목소리로, 안료를 들이밀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꽃이 놓인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을 힐끔거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안료는 제법 고운 색을 냈다. 특히나 안료가 담긴 함은 자개를 박아 넣어 반짝였다. 날아가던 나비도 꽃인 줄 알고 앉았다 갈 정도로 정교했다.

“거기 고운 아가씨. 이거 하나 장만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붉은색 안료를 환한 웃음과 함께 내밀었다.

“돌들만 고르고 골라 색을 냈습니다. 칠하기도 좋고, 함도 어찌나 어여쁜지. 한 번 보고 가시지요.”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도통 팔리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코를 박고 색을 보았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고르고 색도 어여뻤다.

한평생 옥석의 색부터 모든 것을 직접 고르고 개어 일 년간 만든 것이었다. 숨어서 만드느라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예쁜 결과물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과 고생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이리도 공을 들인 것들이 푸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파는 것도 지쳐가고, 털썩 주저앉아 구경이나 하기로 하였다.

나루터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경치가 참 좋았다. 들어오는 배와 내리는 물건들 강을 따라 부는 바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참 편해졌다. 여기가 마치 집인 것처럼.

“여기서 가장 좋고 비싼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다가와 안료를 가리켰다. 뭐가 저리 어색한지. 얼굴에 귀한 집 자제예요, 라고 쓰여 있었다. 귀한 분께서 주변에 사람도 없이 어찌 혼자서 왔을까.

곁눈질로 그를 훑었다. 사람을 보면 딱 감이 왔다. 값이 나가 보이는 비단, 숨기려 했으나 숨길 수 없는 기품, 남을 부리는 게 더 익숙해 보이는 얼굴까지 바가지 씌우기 딱 좋았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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