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 말에 태경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김광연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여유 넘치던 태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던 상체까지 뻣뻣하게 곧추세웠다.

“그 말인즉슨 형님께서 돌아가신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태경의 물음에 김광연은 미묘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찰나에 허공에서 부딪쳤는데, 그는 눈빛으로 태경에게 까불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는 살벌한 눈초리에 태경은 위축되어버렸다. 넘치던 자신감은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세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율이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낙동강 오리알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주화를 위해 과거의 그는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영의정 김광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태경은 극도로 혼란스러워하였다.

“형님께서 살아계신 것이라면 어째서 지난 팔 년 동안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건 전하께서 직접 물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형님께서 지금 궐에 와 계시는 겁니까?”

태경은 팔걸이를 밀며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서둘러 옥좌에서 내려오며 김광연의 앞까지 단숨에 걸어왔다.

“지금 형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당장 형님을 만나야겠습니다.”

“전하.”

김광연은 제 팔을 잡고 흔드는 태경의 손을 간단히 떼어냈다. 그리고 짧은 탄식을 뱉으며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실종된 줄 알았던 세자저하께서 살아 계신다는 소식이 그렇게 기쁘십니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형님께서 살아계신 일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축배를 들고 싶을 정도로 기쁩니다.”

그의 말에 김광연은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 그런 일을 겪고도 배운 점이 없으십니까? 도승지와 그 삿된 무리는 어떻게든 전하께 흠집을 만들어 왕위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한데 실종된 세자저하께서 살아계신 일은 전하껜 흠집을 내는 정도가 아닌 일입니다. 지난 팔 년을 그렇게 겪어 놓고도 형님께서 살아계신 게 기쁘다,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김광연은 들끓는 부아를 참지 못하였다. 결국에 그는 태경을 따끔하게 혼내었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저들은 정통성을 운운하며 전하를 왕위에서 내려오게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난 팔 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전하의 형님을 저 자리에 앉힐 것이옵니다.”

김광연은 허공에 손을 들어 좀 전까지 태경이 앉았던 옥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때 가선 소신도 더는 전하를 지켜드릴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자리에 계실 때 소중함을 알고 지키십시오. 이미 일이 벌어진 후에 후회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할아버지…….”

태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물결쳤다. 그러나 김광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호하게 입매를 여민 그는 태경의 약점을 공략하였다. 그래야만 그가 정신을 번쩍 차릴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저들은 곱게 전하를 왕위에서 끌어내리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테지요. 그렇게 되면 그 여파가 중전마마께 어떻게 미치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중전’이라는 말에 태경의 동공이 자잘하게 떨렸다.

“전하께서 목숨보다 더 지키고자 하는 중전마마께서는 대비마마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실 것이옵니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태경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세워둔 채 김광연은 편전을 빠져나갔다. 태경은 한동안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만약 그때 내금위장 유도한이 밖에서 김서진이 태경을 기다리고 있단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밤이 새도록 멀거니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태경의 정신은 멍하였다. 김서진이 옆에서 무어라 말을 하곤 있었으나, 그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대화를 시작한 이후로 눈길도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김서진은 혼자서만 재잘재잘 떠들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리곤 민망함에 찻잔을 쥐었다. 그리고 홀짝이며 차를 마셨다.

태경은 김서진이 말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후궁 간택 문제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터져버릴 듯한데, 거기에 율의 일까지 더해져 버렸다. 이젠 왕위가 흔들리는 수준이 아니라 뿌리가 뽑힐 지경이었다.

“전하.”

김서진은 어두운 얼굴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그의 모습에 김서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처음에는 자신을 밀어내는 듯하였으나, 조금씩 태경이 마음을 열고 있다고 여겼다. 그녀의 아버지인 우의정 김석민은 이런 때일수록 더욱 전하를 찾아봬야 한다고 하였다. 마침 중전마마께서 피접을 나가고 궐에 없으니, 이 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며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어찌 그런 일을 자신이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막상 태경과 마주하자 걱정보다는 설렘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의 훤칠한 외모가 김서진의 마음에 불을 지른 탓이었다. 고혹적인 눈빛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하여 김서진은 태경을 만나러 온 걸 곧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타고나길 선하게 태어난 사람이라 그런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분명 마뜩잖은 부분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하여 김서진은 태경에게 더욱 애정이 샘솟고 말았다. 또한 그가 극진히 중전을 대하는 걸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중엔 시샘이 났다. 자신 역시 그에게 그러한 애정을 담뿍 받고 싶어졌다.

자신과 함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만을 하는 그에게 약간이긴 하지만 서운하면서 화도 났다. 태경이 자신을 보게 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하였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던지, 김서진은 손을 뻗어 덥석 태경의 손을 잡았다.

태경이 화들짝 놀라서 커진 눈으로 김서진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심오하게 하십니까? 소녀, 벌써 여러 차례 전하를 불렀사옵니다. 한데도 대답은커녕 눈길조차 안 주시니, 전하의 관심을 받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러다 불편하단 듯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였다. 그리고 잡혀 있던 손을 비틀며 빼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소. 그러다 누가 보고 오해라도 하는 날엔 어떤 가문에서도 혼담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오. 궐에는 보이지 않아도 지켜보는 눈과 귀가 많으니 행동을 조심하시오.”

김서진의 돌발행동에 기분이 상하였으면서도 마냥 나쁘게 말은 하지 못하는 태경이었다. 자신이 이러는 건 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는 듯 돌려 말하였다.

그 모습에 김서진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 과인이 농으로 하는 말인 줄 아시오?”

태경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을 하였으나, 김서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가문이 무에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녀, 곧 전하의 후궁이 될 사람인데요.”

“과인은 낭자의 생각만큼 좋은 사내가 아니오.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 지금이라도 달리하시오.”

깊지는 않으나 김서진과의 정을 생각하여 태경은 충고하였다. 자신의 왕권을 위하여 아무런 죄 없는 여인을 희생양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분명 다른 좋은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소녀, 전하께 중전마마에 대한 애정만큼 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김서진은 은근한 눈빛으로 태경을 응시하며 말하였다. 그녀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태경이 중전에게 주는 걸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모든 걸 차지하고 있을 테니 처음부터 과하게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니 말이다.

“과인에게 무얼 원하시오?”

“딱 하루. 전하께서 소녀를 품어주시면 됩니다.”

태경은 순간 자신이 김서진의 말을 옳게 이해한 게 맞는지 헷갈렸다. 그러다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전이 아닌 다른 여인을 품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순 없소.”

“소녀에게 전하의 씨를 잉태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그 길만이 전하의 위태로운 왕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소.”

“소녀를 거절하시면 영상 대감께선 다른 규수를 알아볼 것입니다. 영상 대감께선 곧 어렵지 않게 다른 규수를 전하의 후궁으로 들이겠지요.”

김서진의 말에 태경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태경은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설마 소녀만이 유일한 후궁 후보라 생각하신 건 아니시겠죠?”

“과인은…….”

“차라리 전하를 이해하는 소녀를 택하십시오. 다른 건 바라지 않겠사옵니다. 소녀를 통해 전하의 후사를 잇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김서진의 눈빛은 욕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나면 그때엔 그녀가 무엇을 요구해 올지 태경은 알 듯하였다. 애초에 그녀의 욕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했으나, 그녀의 제안은 너무나 솔깃한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어쩌면 본래 이런 여인이었을지도 몰랐다. 한 번만 손을 뻗으면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걸 놓치게 생기자 조바심이 나서 일찍 본색을 드러낸 건지도 몰랐다.

‘하긴 우의정의 자식이니, 꼬리가 아홉 개라 하여도 이상할 게 없지. 아니면 할아버지께서 형님에 대한 이야길 살짝 귀띔해 주었을지도.’

자신에 대한 연모의 감정 때문에 김서진이 후궁이 되려 한다는 걸 태경은 알지 못하였다. 그저 지금은 율에 대한 화제가 그의 머릿속에 너무 컸다. 하여 모든 생각을 율과 연관 지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태경의 고뇌가 깊어갔다. 그리고 김서진은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단은 태경의 곁에 있기라도 해야 그가 제 생각을 한 번이라도 더 해주지 않겠는가. 그러다 어떤 날은 자신이 가여워서라도 찾아 줄 테고. 그러면 자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그의 애정을 자신에게 향하게 만들면 되었다.

‘어차피 중전마마께선 전하를 연모하지 않으시잖아.’

그러니 김서진은 태경을 자신이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

평화로운 날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그걸 사람들이 모를 뿐이었다. 한양으로 커다란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건 율이 몰고 오는 것이었다.

율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윤영수가 다가왔다.

“이제 곧 한양입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설레는 것도 같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저하, 언제까지 소인에게 말씀을 높이실 생각이십니까?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그러는 나리께선 언제까지 제게 저하라 하실 생각이십니까? 전 나리께서 찾는 저하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곧 저하께선 모든 일을 기억해 내실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윤영수가 찾는 세자라는 사람이 실종된 시기와 자신이 기억을 잃은 시기가 겹쳤다. 그뿐만이 아니라 생김새도 무척이나 흡사하였다. 몸에 난 흉터도 일치하였으나, 율은 자신이 세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제가 기억을 되찾아도 그건 저하의 기억이 아니라 제 기억입니다. 그러니 큰 기대 마십시오.”

율의 말에 윤영수는 그저 싱긋, 웃어 보이기만 하였다.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오는 동안 같은 주제로 이미 여러 번 의견 차이를 보였던 탓이다. 그때마다 율은 자신이 세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그는 세자였다. 그러면 된 것이라고 윤영수는 방금 결론지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언쟁은 필요치 않았다.

“한양에 가시면 만날 분이 계십니다.”

“그게 누굽니까?”

율의 목소리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

.

.

사대문 중 하나인 숙정문(肅靖門)을 통과하여 율과 그 일행들은 한양으로 들어갔다. 좀 전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쿵쿵거리며 뛰었다. 율의 얼굴은 지는 노을처럼 붉게 상기되었다.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오느라 지쳐버린 율의 가족들은 장한석을 따라 윤영수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율은 윤영수의 안내를 받으며 개암나무 언덕으로 향하였다. 햇발이 남아 있어서 언덕을 오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묵묵히 윤영수의 뒤를 따르던 율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시야 끝에 붉은 스란치마가 들어왔다. 고개를 지금보다 조금 더 위로 들자 중년의 여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귓가 근처의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세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인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슴이 뭉클하였다.

“율아!”

여인이 대뜸 누군갈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치마가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지, 여인은 이내 치마꼬리를 말아 쥐었다. 그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율은 뒤에 누가 오는 줄 알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을 때였다. 어느 틈엔가 율의 코앞까지 달려온 여인이 그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율아!”

그리고 그를 ‘율’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 소리가 율의 가슴에 깊은 파장을 일으키며 전율케 하였다.

**

겨울 초입의 으슥한 어느 밤이었다. 커다란 고목 뒤에 몸을 숨긴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림자는 영의정 김광연의 사주를 받고 예전에 세자 호위 무사였던 윤영수의 집안의 동태를 은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 갈 발견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북촌에 있는 영의정 김광연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