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앞으로 나와.'이튿날, 청아는 정민의 전화를 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민의 말에 의해 하루는 학교를 쉬었지만 계속해서 교실을 비울 수 없어 그를 설득했다. 이상하게 그는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어제, 그렇게 나가서 11시가 넘어서 들어온 그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온 그가 시트 안에 몸을 묻고 있는 청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시, 싫어. 못 하겠어.”'청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가치가 있었던 자신의 몸이, 이제는 그 흥미마저 떨어진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한심한 사실이었다. 그런 정민의 비인간적인 생각에 길들여지는 것도 우스운 것 아닌가.'그러나 욕정조차 두 사람의 사이에 없으면 앞으로 대체 어떤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 사람 사이에 남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두려워 그를 밀어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이 멀어 서로를 원하고 가지려던 그때가 더 편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의미를 지울 일은 없을 테니.'“어떻게 하려는 것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술을 마셔 그런지 뜨거운 정민의 몸, 열이 나고 있는 그 심장 소리를 들으며 청아는 입술을 닫았다. 곧 그녀를 안은 채 침실 문을 나선 그가 청아를 내려놓은 곳은 거실의 소파였다. 청아는 소파에 내리자마자 다리를 끌어안은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정민이 등을 돌리고 주방으로 갔다.'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넓은 등을 보는 순간 눈물이 울컥 올라오며 그 등을 돌려세우고 싶었다. 그를 잡고 싶었다.'어쩌면 그의 냉담한 표정 이면에 숨겨진 그 열정적인 뜨거움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와 자신을 잇는 유일한 것인 섹스에의 끈을 붙들려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본능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가 아닌 자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돌아서는 정민이 아련했다.'그러나 다행히 정민은 주방에서 오래 있지 않았고 곧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드러나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들에 시선이 가는 순간, 청아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민이 없는 동안 혼자서 꾹꾹 누르고 있던 눈물이 결국 터져 버렸다.'가만히 앉아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청아를 본 정민의 눈이 커지며 들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놓고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청아의 턱을 쥐었다. 까만 눈동자에 가득 차 있는 맑은 눈물, 그게 너무 가슴 아파 정민은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 가슴에 안아 버렸다. 한 뼘 정도도 안 되는 그녀의 머리였다. 자신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몸이었다. 일부러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몇 시간 전, 그는 무턱대고 그녀를 안지 말아야 한다고 수없이 자신을 설득했었다. 적어도 불안한 그녀의 상황을 먼저 봐주라고 스스로를 닦달했었다. 아직 어머니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집 안에만 붙들어 놓고 있었다. 학교조차 못 나가게 하는 자신을 그녀는 또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겠는가.'그러니 그녀를 다독여 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침실로 들어가 죽은 듯 누워 있는 그녀의 등을 본 순간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전날, 그를 미친 듯 밀어내며 두려워하던 그녀의 영상이 겹치며 괴로워졌다. 그리고 결국 그가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너무나 서늘한 것이 닿은 듯 그렇게 움츠리는 것이다.'너무나 가여워서 그를 화나게 하는 여자였다.'결국 그녀를 안고 말았다. 키스를 하고 그녀의 몸을 만지며 그는 통제를 잃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가 다른 곳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들었다. 강제로 그녀를 끌고 와 가둔 자괴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보내는 것만큼 쓰리겠는가.'그런 마음이 휘몰아치며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더욱 그녀가 간절해졌다. 순간 그는 몸으로 묻어나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 들킬까 두려워져다. 그녀를 가둬 놓고 쾌락을 맛보면서도, 마치 한없이 걱정하는 척, 생각해 주는 척 하는 자신이 빌어먹게도 한심해졌다. 진심인 척 가증을 떨고 있는 자신에게 경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