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서 이게 최선입니까?
“그래서 이게 최선입니까?”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차가운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중 홍보팀 김영한 부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실 찍어 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씀해 주시면 수정해서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영한의 말에 상석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는 눈썹이 살짝 찌푸려 언짢음을 한껏 얼굴에 올리곤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회의실에 있던 임원들은 빠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눈알을 둥글리고 있었다.
“지금 시장의 흐름을 알고 있는 겁니까? 이번에 새로 출시되는 립스틱 런칭 홍보를 이런 식으로 하겠다? …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됩니까?”
“어느 부분이….”
쾅!
김영한 부장의 말이 다 끝맺기도 전에 그는 손바닥으로 회의실 책상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이 32세. 이름 김유현. 태진 그룹의 재벌가 승계를 빠르게 밟은 본부장 역임.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어 다수의 직원은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성격이 괴팍하다, 냉혈인간이다, 에비, 에미도 모를 만큼 일을 할 때는 위아래 없이 막 지르고 보는 성격이다. 등등의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는 존재였다.
“공격적인 홍보 전략으로 전면 수정해서 다시 올리세요!”
유현은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담아 그들을 향해 언성을 높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가 이토록 화를 낼 때는 일이 뭔가 크게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책임을 떠넘기듯 모두의 시선이 영한을 향해 있었고 무거운 침묵 속에 그는 천천히 회의실을 벗어났다.
***
회의를 마친 영한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하얗게 질려 굳은 얼굴을 본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감싸고 누군가를 향해 입을 떼려 하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유 대리, 외근 잘 다녀왔나?”
“부장님, 외근 잘 다녀왔습니다.”
영한에게 똑 부러진 목소리로 보고하는 그녀의 이름은 홍보부 대리 유해수. 170cm 가까이 되는 큰 키의 그녀가 하얀색 블라우스와 짙은 남색으로 된 랩 오버 치마를 맵시 나게 입고 있었다. 그런 해수를 곁눈질로 쳐다본 영한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향해 딱딱하게 뱉어내었다.
“유 대리, 바로 본부장실로 좀 올라갔다 와.
“네? 본부장님 실이요?”
“그래, 지체하지 말고 지금 올라가 봐.”
해수가 영한을 향해 의아한 눈빛으로 질문을 대신했으나, 아무런 부연 설명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재차 본부장실로 향하라는 말을 던진 후 부장실로 몸을 돌렸다. 해수는 소문만 무성한 본부장실로 갑작스럽게 불려가게 되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지만 지체하지 말라는 영한에 말에 서둘러 본부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의외로 부드러운 음성의 남자 목소리에 긴장으로 어깨가 아려왔던 해수는 잠시 호흡을 내뱉은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불타는 고구마처럼 붉게 타오르며 그 열기로 진땀이 흘렀다. 이유인즉, 조금 전 본부장실로 들어왔을 때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책상에 앉아있는 남자는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지만, 자신을 불러올린 본부장 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는 의자를 뒤로 돌린 채 미동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10여 분의 긴 침묵 끝에 해수는 먼저 입을 떼어 말을 걸었다.
”본부장…님?“
“…누가 내 방으로 오라고 했지?”
“……!”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내뱉은 그의 차가운 중저음이 가미된 목소리에 해수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히 그런 반응일 것이라는 듯 이어진 그의 말에 해수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이번 안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올린 거지?”
“어떤 안건을 말씀하시는 건지….”
“본인의 무능력을 남에게 전가하려 하는 건가?”
분명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 해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더 뇌리에 박히는 것 같았다. 해수는 알 수 없었지만, 유현은 창문에 비치는 해수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삐딱한 눈빛과 말로 화살을 정확히 쏘고 있는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본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 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됐고, 전.면.수.정.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닐 테니 그만 나가 봐.”
어벙하게 가만히 서 있다가 거의 떠밀려 나오다시피 나온 해수는 그제야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바로 비상구와 연결된 계단으로 거칠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본부장실에서 당했던 울분을 미친 듯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 진짜 뭐야! 부장님이 올라가 보라고 했을 때부터 내가 어쩐지 기분이 싸하다했는데… 들어오래서 들어갔더니 10분이나 사람을 아무 말 없이 세워두는것도 모자라서 뒤통수도 안 보이게 의자는 뒤로 돌리고 앉아있고 또 뭐더라…? 아, 맞아! 누가 본부장실로 오라고 했냐고? 지가 오라고 했으니까 올라온 거지 내가 마음대로 올라왔겠어? 그래 놓고 무안을 줘? 진짜 미친 또라이 아냐!”
***
그녀는 한참을 유현의 욕을 한 뒤에야 감정을 추스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본부장실로 자신을 보냈던 영한을 찾아 상황을 물어야 했기에 그를 애타게 찾았지만, 영한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유해수 씨.”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해수를 불러 세우는 해수의 직속상관 류여진 팀장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박힌 듯 뾰족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회사에서도 내노라할 정도의 서구적인 얼굴과 몸매의 소유자로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여자였다. 오늘도 역시 몸매가 다 드러날 정도로 쫙 붙는 원피스를 입고 조심성 없이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있는 여진을 마주하자 해수의 눈살이 빠르게 찌푸려졌다.
“네, 팀장님.”
“오늘 부장님께서 발표했던 안건 유해수 씨가 담당자로 되었으니,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네? 원래 팀장님께서 진행하던 프로젝트 아니었나요?”
갑작스레 담당자가 본인으로 바뀌었다는 통보로 해수는 당황하며 여진을 향해 질문했다. 분명 류여진 팀장이 단독으로 맡아 진행하던 프로젝트였기에 그 부분을 콕 집어 물은 것이다. 하지만 여진은 해수의 질문에 앙칼진 목소리로 대응했다.
“누구의 프로젝트가 뭐가 중요하지? 유해수 씨는 하라는 대로 하기나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해수 씨?”
“네, 팀장님. 그런데 저는 유 대리입니다. 호칭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앞뒤 설명 하나 없이 그저 자신의 프로젝트를 가져가라는 여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해수는 더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번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이 오늘은 귓가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 당당하고 야무진 어투로 여진에게 말을 던졌다.
‘아니, 대리발령 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해수 씨, 해수 씨, 일부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나이도 나랑 동갑이면서 얄미워, 정말.’
해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어지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여진은 해수의 당돌함에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맞는 말이었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늦깎이 신입사원 해수가 두각을 나타내며 빠른 승진까지 거머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여진은 일부러 눈치를 주며 그녀에게 과중한 업무를 떠넘겼다. 또한, 야근하도록 없는 일까지 만들어 넘겨주었고 가지 않아도 되는 외근 업무까지 모조리 해수에게 시키던 중이었다.
‘흥.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일부러 대리 호칭을 안 불러 주는 거였는데, 이상하게 신경이 거슬린단 말이야… 짜증 나게… 하긴, 저깟 거 이용만 하면 되지 뭐, 훗.’
더 여기서 그녀에게 여러 말을 했다가는 자신이 망쳐 놓은 이 일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던 여진은 빨갛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화를 눌러 내었다.
“유해수 대리, 앞으로 본부장실에 올라가는 보고 문건들은 나에게 보내도록. 보고는 내가 할 테니까.”
처음부터 갈아엎어야 하는 이 프로젝트의 고생은 해수가 전부 도맡아서 하게 시키고 자신은 문건을 들고 본부장실에 들락날락하며 유현과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그녀의 계산적인 말에 해수가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팀장님… 그건, 안 되겠는데요?”
“뭐라고? 유해수 씨, 아니… 유 대리 지금 내가 하는 말 무시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직원들이 웅성대며 해수와 여진에게 시선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초리에 여진은 흥분이 범벅된 째지는 목소리로 사무실을 흔들었다.
“본부장님께서 모든 보고는, 저, 에, 게 꼭! 직접 하라고 하셔서요.”
“뭐라…고?”
당황하는 여진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서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표독스럽게 뜨고 있는 그녀의 눈과 마주하면서 해수는 여유롭게 한 방을 날렸다. 이때 마침 김영한 부장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가까이 붙어있는 여진과 해수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류 팀장, 부장실로 들어오게.”
“지금요?”
“그래.”
여진은 조금 전 해수에게 한 방 제대로 당해 얼굴이 달아올라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데 부장의 말에 화가 더욱더 치밀어 오른 상태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류 팀장이 부장실로 들어가자 해수의 주변으로 직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부장님 봤어?”
“어때, 정말 실물은 얼굴선이 칼에 베일 것 같고, 심장이 막 튀어나올 정도로 잘 생겼어?”
“생긴 것만 보면 사람한테서 빛이 난다던데.”
다들 궁금한 게 한 번에 몰아 터진 듯이 해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모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한 마디를 기대하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얼굴인데… 목소리가….”
“목소리가 왜, 너무 멋있었어?”
“칼날을 입에 물고 내뱉는 단어가 어찌나 날카롭게 빛나던지,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바닥에 착 붙어서 아주 가슴에 팍팍 꽂히던데? 저 대신 담당자 할 분?”
류 팀장에게 여유롭게 대응하던 때와는 다른 해수의 다소 흥분하고 화를 참는 듯한 모습에 직원들이 움찔하며 조금씩 흩어졌다.
“부장님, 지금 저를 부르시면 어떻게 해요? 마무리를 못 짓고 들어와 버렸잖아요, 제가 직원들 앞에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세요?”
김 부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여진은 자신이 피해자인 듯 부장에게 고해바쳤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김영한 부장은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류 팀장, 아직 사람 다룰 줄 모르는군…그 프로젝트의 담당자를 유해수 대리로 바꿨던데? 그 점에서 오늘은 류 팀장이 진 게 아니라 이긴 거네.”
“그게 무슨?”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김 부장의 말에 여진의 눈이 커졌다. 알 수 없다는 듯의 표정을 짓는 여진에게 부장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한 마디를 읊조렸다.
“잘했어.”
싸늘한 한마디였다. 그동안의 김영한 부장은 사람은 좋지만 일 처리가 야무지지 못한 그런 성격의 소유자로 유현과 마주할 때마다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찍어 냈던 유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서는 그동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장의 눈동자엔 이글거리는 불꽃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해수가 본부장실을 떠난 후, 유현의 시선이 한 사람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이 실장이 보고한 담당자가 유해수 씨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네, 제가 담당자라고 보고 드렸던 사람은 류여진 팀장입니다.”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건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과 망설임 없이 쏟아내는 유현의 말들에 이 실장은 허리 뒤쪽까지 힘이 들어갔다.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실장은 간단한 목례를 한 뒤, 본부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즉시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기본자체가 안 되어 있는 안건의 담당자로 나타날 줄이야… 그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거지?”
유현은 목에 메여 있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려 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태진 그룹 홍보부 정규직 신입사원 채용 현장 지원했던 500명 중, 단 5명만 남아 최종 임원 면접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실장, 언제쯤 마무리되나?”
“네, 이제 마지막 지원자입니다.”
면접관으로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유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 실장은 유현의 심기가 불편한 느낌의 표정에 주변을 살핀 후 대답했다. 면접장 안과 밖을 오가던 인사팀 담당자가 기다리고 있던 대기자를 향해 말하자 자리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288번 지원자, 들어가세요.”
288번 지원자는 바로 현재 홍보팀 대리로 일하고 있는 유해수였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H라인 검정 스커트, 검정 하이힐, 전형적인 면접 복장을 한 해수는 면접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면접은 순조롭게 이어갔는데 처음에 들어올 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에 내려놓았던 긴장이 다시 어깨 위로 올라타는 것 같았다. 해수는 의식적으로 그쪽을 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며 끝까지 잘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뭐야, 자꾸 왜 이렇게 빤히 보기만 해… 질문이라도 하던지.’
잘생겼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해 보이는 남자는 멋있으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젊은 면접관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힐끔 쳐다보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앉아있던 한 임원이 해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딱 봐도 개기름이 줄줄 흘러내리고 능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가 있는 눈빛에 불쾌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를 하나 들어줄 테니 답변해 봐요, 회사에 입사 했는데 접대를 하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꼭 성사시켜야 하는 계약 건이 걸려있는 상태이며, 거래처 담당자가 술을 한잔 따르라고 말하면서 과도한 신체접촉이 들어오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충분히 고민한 후에 대답하셔도 됩니다.”
“혹시, 지금 예로 들어주신 일들이 현재 태진 그룹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까?”
당황스러운 질문을 일부러 하나 꺼내 든 그 능구렁이 임원의 생각과는 달리, 해수는 망설임 없이 당차게 발언을 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면접관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면접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젊은 면접관의 입이 떼어졌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며 면접을 이어갔다.
“만약에 그렇다면?”
“아… 그렇다면, 잠시만요~”
해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왼쪽 가슴 부근에 붙어있는 면접표를 살짝 힘주어 떼어내었다. 그리고 면접관들의 눈높이까지 올린 후 두 손으로 면접표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마구 구겨버렸다.
“아니!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녀의 행동에 흥분한 면접관 중 한 명이 언성을 높이자 해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어 그 이유에 관해 설명을 덧붙였다.
“면접표가 휴지처럼 구겨졌죠? 저는 한 번 뽑아 쓰고 버리면 그만인… 일회용 휴지처럼 사용될 마음이 없습니다, 전 아직 태진 그룹 직원이 아닙니다,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는 것만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대답할 이유도, 대답할 마음도 없다는 뜻입니다. 태진 그룹이 직원을 아끼지 않는 회사라면 파도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래성 같은 수많은 회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면접비는 필요 없으니 회사 운영에 보태 쓰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할 말을 했더니 속이 다 후련해서요.”
해수는 폭포수처럼 제 생각을 쏟아 놓고서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면접관들은 너도나도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봤고 젊은 면접관인 유현 또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다시 정신을 차린 뒤 서로 의견을 맞추려 입을 모으려 했다. 그러다 간단하지만 명료한 유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휴지, 합격.”
“휴지? …라면 조금 전, 288번 저 여자 말입니까?”
“저런 기본도 안되어 있는 사람을 채용한다니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나이도 29살인 것부터 신입 사원과는 맞지 않습니다.”
임원들은 다들 한마음이 된 것처럼 유현의 말끝에 ‘안 된다’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다들 하실 말씀은 다 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양 이사가 말을 잇자 유현은 단박에 그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얹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흘렀지만, 말에는 서슬 퍼런 칼날이 숨어있었다.
“양 이사님, 제가 왜 갑자기 이 면접 자리에 면접관으로 참석했을까요? 신입사원을 직접 보려고? 시간이 남아서? 그럴 리가요, 그동안의 계약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진행되고 있었는지…아까 너무 여실히 드러내 주셔서 저도 놀라긴 했습니다만.”
“아니…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참고로 저는 받는 것이 익숙지 않은 편입니다. 해주는 것을 더 좋아하죠. 제 뒤에서 저를 위해 많이 생각하시고 움직임을 보이고 계시던데요, 저도 임원분들의 노고를 생각해 드리려 합니다, 저를 생각하시는 것의 두 배로요. 그리고 저는 일회용 휴지를 귀하게 쓸 생각입니다만, 다들 생각이 어떠신지요?”
유현은 ‘받은 것을 두 배로 돌려주겠다.’는 강력한 경고와 함께 해수의 말을 인용하여 임원들에게 달라져야 할 태도들을 꼬집어 주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고 늘 차가운 말투와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던 유현이 오늘따라 가늘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속 시원하게 할 말 다했으니 면접비는 됐다라, 참 묘한 여자군….”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