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제가 비밀 하나 말해드릴까요?”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말해드릴까요?”

한 번에 봐도 눈에 띄는 이목구비를 가진, 아무리 모자로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빛이 나는 외모의 청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남성이 부러워할 만한 굵고 낮은 음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야.”

그 옆에 앉은 여성이 말했다.

"밖에서는 존댓말도 쓰지 않기로 했잖아. 너희 엄마가 부탁해서 과외 하나 해주는 것 가지고 선생님이라니. 너랑 나랑 나이 차도 여섯 살밖에 안 난다니까?”

입 밖으로는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외모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는 옆에 앉은 남성과 동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동안인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깨끗한 피부, 새카만 머리, 쌍꺼풀이 짙은 큰 눈. 모든 남성이 이상형으로 삼을만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깨끗하고 청순한 외모. 장밋빛의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이 마시던 물에 젖어 반짝 빛났다.

누가 봐도 선남선녀인 이 둘. 남자는 계속 여자를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그래도 선생님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잖아요.”

“나는 네 사촌 누나뻘 이야. 그럼, 말은 그렇게 해도 사촌 누나라고 생각해.”

여성이 다시 한 번 물 컵을 입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아무튼, 비밀이 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봤다. 마이클은 시선을 아래로 떨군 후 비밀을 꺼내 놨다.

“이건 저희 부모님만 아시는 건데요, 사실 제가 작년에 미국에서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

“…뭐?”

-쨍그랑!

여전히 물 컵의 가장자리를 입에 대고 있던 그녀가 깜짝 놀라 컵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일본에서 공수해온 초록 자기 컵은 일식 집 바닥에 굵은 유리 파편을 만들며 여기저기 흩어졌다.

-찰싹!

민은 깨진 물 컵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른손으로 마이클의 팔뚝을 때렸다. 선선한 초가을. 얇은 바람막이를 입은 그의 팔에서 찰진 마찰음이 났다.

“너, 무슨 미친 짓이야?”

“하하하.”

큰소리로 화를 내는 민의 외침에도 그는 눈꼬리가 내려가게 눈웃음을 치며 웃을 뿐이었다. 그의 미소는 한없이 선량한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너무 괴로워서요. 룸메이트들도, 친구들도 저를 다 배신하고 정신병자 취급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교통사고까지 당하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모든 게 다 싫어서… 충동적으로 그랬어요.”

“그래도 자살은…!”

민은 아직도 목소리를 낮추지 못했다. 회전하는 접시 위에 놓인 초밥들. 한숨을 푹- 내쉬며 빨간 연어 초밥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왼쪽 끝에 앉은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소란스럽게 굴었네.’

갑자기 일어나서 직원에게 가는 민.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치울게요.”

“아, 아닙니다. 앉아 계시면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흰 모자와 가운을 입은 직원이 말했다. 그가 쓰레받기를 가져와 마이클의 옆에 바짝 서더니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는데요.”

“뭐를?”

“제 얘기를요.”

“내가 말하고 다닐 거 같아?”

“그게 아니라요.”

마이클은 곁눈질로 직원을 힐끗 바라봤다. 민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 먹던 음식을 마저 먹었다.

“이제 배불러. 그만 나가자.”

그녀가 마이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커피 한잔 사도 될까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민의 얼굴.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하늘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잠긴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고민은 아주 잠시라는 듯, 그녀는 그의 물음에 ‘응’ 이라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확신이 깃든 대답은 아니었다.

둘은 일식 집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계속 얘기해봐. 정말 자살 시도를 한 거야?”

“네. 허리띠로 목을 졸랐어요. 사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아줄까…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실수로 버클이 잘 안 열리는 허리띠를 골랐지 뭐예요.”

어린 시절 행복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

“게거품을 물고 응급실로 실려 갔어요. 그리고 나흘 만에 깨어났는데 사람들이 저를 더 정신병자 취급하지 뭐예요.”

“누가…? 친구들이?”

민의 짙은 검정 눈썹이 지렁이의 몸처럼 꿈틀거리더니 아래로 확 찌푸려졌다.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도… 친구들도… 주변 모두 다요.”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대학을 안 간 거구나. 나는 22살이나 됐는데, 그것도 미국에서 학교를 나온 애가 왜 한국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어.”

“귀국해서 바로 대학을 준비할 수 있으면 그게 이상 더 이상할 거 같아요.”

“그렇지…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저, 누나들 되게 좋아해요.”

“뭐?”

사고의 회로가 정지된 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재차 다시 한 번 마이클이 말했다.

“여태까지 사귄 여자 친구들도 다 누나들이고요.”

어쩔 줄 모르는 민의 눈동자가 카페의 구석까지 여기저기를 훑었다.

#2. 세 사람-준형과 민

카페를 나온 마이클과 민. 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9시가 넘은 시간,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컴컴했다. 이따금 듬성듬성 하얗게 빛나는 별들이 눈에 띄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 자식… 아까 그 말만 안 했어도….’

괜히 마이클이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 민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서 그를 마주 봤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나는 이쪽으로 갈 건데 너는?”

그녀는 등 뒤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화장실에 들렀다 가려고요. 선생님 먼저 들어가세요.”

‘또 선생님은….’

민은 양쪽 입꼬리를 더 길게 늘였다.

“그래. 알겠어. 오늘 커피 잘 마셨어.”

“제가 감사드리죠. 제 얘기 들어주셔서요.”

“그래. 우울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그리고 절대 나쁜 생각은 하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마이클이 풋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민은 그런 그의 웃음을 보며 참 아기 같다고 느꼈다.

“잘 가!”

민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아쉽지 않은 듯 인사를 한 지 십 초도 안 되어 뒤를 돌아 헤어지는 둘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200m쯤 떨어진 지하철역을 향해 가는 민의 표정은 마이클과 반대 방향으로 돌자마자 어둡게 굳었다. 그녀는 오른쪽 손을 입고 있던 황토색 트렌치코트 안에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밝아진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흔들렸다. 그녀의 동공은 정처 없이 밤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같았다.

**

두 시간 전.

“그럼 어머니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 있으니까 내가 일 층으로 내려가면 오 분 있다가 내려와.”

마이클의 건너편에 앉은 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선생님.”

“말끝마다 선생님은, 진짜. 하지 말라고 오늘만 몇 번 말한 줄 알아?”

“네, 선생님.”

짙은 검정 머리와 눈썹. 그 남자다움과 대조되는 여성스러운 얇은 쌍꺼풀이 있는 두 눈. 그가 그 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민은 방문을 열며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마이클의 어머니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웃음은 서글픔이 깃든 것 같았다. 민과 함께 마이클도 방을 나와 현관 앞에 섰다. 그는 목이 높게 올라온 검정 스웨이드 구두의 지퍼를 내리는 민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다시 한 번 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 마이클이 민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

‘엄마 앞에서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민의 두 귀가 빨개졌다. 그녀는 그 상태로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의 아래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스르르-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두 문,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1층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를 빠져나온 그녀는 계단 앞의 인도에서 마이클을 기다렸다. 정확히 5분 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마이클이 그녀의 눈에 포착됐다.

“선생님.”

“그래. 어머니께 뭐라고 말했어?”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온다고요.”

“아무 말도 없으셨어?”

“네. 원래 별로 터치 안 하세요.”

“그래. 그럼 오늘만 저녁에 밥 사주는 거야. 네가 우울하다고 해서.”

민은 목소리의 높낮이에 별 변동이 없게 말했다.

“알겠어요.”

“뭐 좋아해?”

“저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러면 저기 지하철역 근처에 내가 자주 가는 일식집이 있는데, 괜찮니?”

“네.”

마이클의 두 눈은 줄곧 민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가고 추워진 초가을, 서늘한 밤공기가 민의 긴 머리를 휘날리게 했다.

**

지하철역 앞, 계단을 내려가기 전 민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한 칸, 두 칸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눈앞에 개찰구가 나타났다. 그녀는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승강장까지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 한산한 승강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의자에 그녀는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휴-하고 한숨을 크게 쉰 뒤, 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눌러 다시 빛나는 화면을 확인하는 그녀의 두 눈은 실망한 듯 꾹- 감겼다. 그녀는 이번엔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풀어 메신저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이 친구 목록의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여러 번 반복했다. 열 번째 즈음 반복을 할 무렵, 한 남자의 이름이 나타나자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준형’

그녀는 준형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몇 년째 그의 프로필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녀는 메시지 보내기를 클릭했다. 그러자 둘이 전에 나눈 대화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

-준형오빠, 이번 주에 몇 시에 만날 거예요? 답장 주세요.

-준형오빠, 왜 답이 없어요?

-오빠, 연락 주세요.

대화라기 보단 며칠 동안 그녀가 혼자 보낸 메시지들뿐이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나타난 준형의 메시지.

-미안, 어제 일이 늦게 끝나서 대답하는 걸 잊었어.

그녀는 한참 위에서 찾은 그의 메시지의 ‘미.안’이라는 글자를 보자 채팅창의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텅 빈 스크린 도어의 안쪽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의 동공에서 빛나던 눈빛이 흐려질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승강장에 도착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급하지 않게 지하철에 오른 민은 오래된 유선 이어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핸드폰에 연결했다. 그리곤 양손으로 이어폰을 끝을 잡에 귀에 꽂고 핸드폰의 음악 목록에 들어가 오래된 홍콩 영화의 주제곡들을 반복 재생했다.

그녀의 귓가에 ‘꿈꾸는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가사였지만 이미 그녀의 18번곡이 되어버린 곡의 후렴구는 귀에 익숙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음을 흥얼거렸다.

“이번 역은 종합운동장, 종합운동장역입니다.”

종합운동장역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하는 민은 문이 열리자마자 한쪽 발을 내디뎌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디링-! 하고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음이 울렸다.

-민아, 미안해.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이제 답장해.

그녀는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 확인한 메시지의 보낸 사람의 이름은 이준형이었다.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메시지를 클릭해 답장을 치기 시작했다.

-많이 바빴어요?

민은 전송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바로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안다는 듯 그녀는 앞만 보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예상과 같이 10분 가까이 흘러서야 그의 답장이 도착했다.

-응. 회의가 계속 있어서 답장 못 했어.

여자의 촉은 무시할 수 없다고.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의 거짓말을 눈치 챘다. 그녀는 메신저 채팅창의 목록에 미리 보기로 뜬 메시지를 눈대중으로 읽었을 뿐, 클릭하지는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파란 360번 버스가 멀리서 그녈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두 눈빛은 넋이 나가 총기를 잃은 상태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 도착한 버스, 그 위로 그녀가 발길을 옮기며 주머니에서 교통카드를 꺼내 찍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맨 뒷좌석의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핸드폰을 켜고 준형이 즐겨하는 SNS에 접속했다. 그의 친구 목록에 빼곡한 여자들. 그중에서도 그녀는 가장 위에 있는, 그녀와 같은 새카만 긴 생머리를 가진 여성의 프로필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준형과 그녀가 함께 있는 사진이 전날 업로드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준형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