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혼돈

JK필름 사옥 20층 대표 집무실.

말끔히 정리된 책상 옆으로 도심의 야경을 통째로 삼킨 듯한 큰 유리창이 보였다.

어둠이 한낮의 빛을 삼키고 내려앉은 시간. 남자는 집무실에 홀로 앉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도시의 또 다른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날렵하면서도 탄탄한 상체를 가죽 의자에 깊게 묻었다.

매끈한 이마 위로 정갈하게 뻗은 짙은 눈썹.

음영을 만들며 자리 잡은 눈꺼풀 아래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흑암의 눈동자는 빛의 각도에 따라 회색빛을 띠기도 했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콧날은 높고 반듯했으며 선명한 입술은 매혹적인 선을 그리고 있었다.

강인한 성정을 말해 주듯 곧게 뻗은 턱선이 날렵하고 단단했다. 빈틈없이 날카로운 인상 속에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품은 듯 보였다.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 한순간 거세게 일렁이다 가라앉았다. 단단하게 내리뻗은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며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의 얇고 가는 천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원단은 손수건을 일부 잘라낸 것 같았다.

천의 한쪽 면 가장자리에는 크림색으로 작은 꽃무늬들이 잔잔히 수 놓여 있었다.

큰 손바닥 위에 올려진 천을 그의 긴 손가락이 우아하게 쓰러 내렸다.

옅은 향기에 감촉이라도 있듯이 몇 번을 만지며 한곳에서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천의 모서리에 새겨져 있는 이니셜을 만지는 손가락이 길고 우아했다.

남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은 적막이 몸을 감싸며 어두운 물속을 부유하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후각이 예민해지며 은은한 향이 남자의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떨림을 주는 향기. 푸른 사과의 풋풋함과 은은한 라일락의 잔향이 몇 개월째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기억 속의 향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그의 감각을 끝없이 흔들고 있었다.

겨우 한 번뿐이었는데.

손끝 깊숙이 박힌 가시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여태껏 주변 모든 것을 무심하게만 대하며 살아왔다.

그만큼 감흥 없는 세월이기도 했다.

늘 고독한 시간이었지만 그에 따른 불만도 괴로움도 없었다.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유일한 길이었고 답이었으니까.

힘겨운 감정은 불필요하다 여겼다.

하지만 몇 달 전의 그 기억은 어둡기만 한 그의 삶에 작은 불씨를 던졌다.

아니, 빛이라고 해야 하나.

밝고 따뜻한 빛. 만져지지 않아도 포근할 것이 분명한, 화사하고 밝은 햇살.

그 빛을 따라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작년 12월 31일 금요일.

서한은 올해의 마지막 영화제가 끝난 후 H 호텔에서 열리는 애프터 파티에 참석 중이었다.

사람이 많은 장소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그였지만 오늘의 파티는 제작사의 대표인 그가 빠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영화제와 관련된 파티에는 사업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서한이 대표로 있는 JK필름이 업계에서 최고라 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대외적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기도 했다.

업계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자리는 참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천만 관객의 영화가 꾸준히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영과 관리에 더욱더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 보다 그 자리를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이 더욱 힘들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이유였다.

긴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고된 노력으로 일궈낸 사업체이니만큼 자신이 대외적인 자리도 잘 챙겨야 한다는 걸 인지하며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런 파티는 여전히 피곤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에게 사람이 많은 장소는 숨 돌리기 힘든 업무량보다 피로감을 배로 던져주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라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연말엔 영화제나 축제 및 파티 등 영화 관련 모임이 워낙 많은 시즌이었다. 비즈니스를 생각한다면 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평소에도 기업을 이어가기 위한 크고 작은 모임들이 많긴 하지만 연말에는 빠질 수 없는 공식 석상이 몰려 있어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최근 얼마간 연이은 공식 스케줄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그의 피로감이 오늘은 극에 달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쉴 틈 없이 이어지던 대화에서 잠깐 틈이 났다. 매끈한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가식적인 얼굴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인사와 대화, 소란스럽고 답답한 공기에 지쳐버린 서한은 잠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용히 혼자 있을 장소를 찾던 그의 눈에 홀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작은 유리문이 보였다. 어두운 밤이 문 너머로 보이자 그곳을 향해 시원한 걸음을 뻗었다.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에 리셉션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가니 호텔의 넓은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작은 발코니가 나왔다.

“하…….”

발코니의 난간을 붙잡은 그가 깊은숨을 뱉어냈다.

숨을 들이쉬는 만큼 크게 확장된 가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 속도를 따라 답답하고 탁한 실내 공기가 차가운 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겨울이라 대리석 난간이 꽤 차가웠지만, 그 서늘함이 리셉션장의 꽉 막힌 열기를 식혀 주었다.

뜨거운 조명과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답답함을 차가운 겨울 공기가 모두 가져가길 바라듯이 그가 짧은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몇 번, 밤하늘을 향해 다시 몇 번.

한동안 쌓였던 피로가 사라지길 바라는 듯 까만 하늘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겨울밤이었다. 그렇게 짧은 자유를 만끽하던 그가 미세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테라스의 반대편에 아담한 체격의 여자가 그를 바라보며 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티 참석자 중 한 명인가.

파티에 온 여자치곤 차림새가 단아했다. 둘 사이가 그리 멀진 않았지만 모든 것이 선명할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엔 그녀의 모든 것이 사진처럼 선명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깨를 감싸듯 부드럽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은 한겨울의 밤하늘만큼 짙었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마를 따라 적당히 솟은 코는 매끈한 선 끝에 귀여운 콧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너무 짙지 않은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 아래로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그를 보고 놀란 건지 동그랗게 커진 덕에 아름다운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티 없이 하얀 조약돌에 새겨진 까만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맑고 깊은 눈이었다.

바디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블랙의 니트 스커트와 허리춤이 짧은 모던한 디자인의 모직 카디건이 그녀의 가늘고 여린 체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이 가는 어깨가 움찔하는 것도 같았다.

실내에서 나오는 옅은 불빛이 그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머리카락 아래 뽀얀 피부는 새벽녘의 하얀 꽃잎처럼 맑았고 아름다운 호선의 짙은 눈썹이 부드러운 인상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유난히 까만 눈동자는 맑은 공기 속 밤하늘의 별처럼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선이 뚜렷하고 도톰한 입술은 붉은 빛깔을 간직한 채 빛나고 있었다.

아담하고 우아한 정취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아!

살짝 벌어진 작은 입술을 다시 꾹 다물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여린 움직임을 따라 서한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옅은 복숭앗빛 뺨이 조금 더 붉어진 듯도 했다. 떨릴 듯 가늘어 보였지만 단단한 고집도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마티니 잔을 들고 있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손에서 가는 손목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색 모직 카디건은 팔꿈치 바로 아래에서 길이를 다하고 있었다.

가디건 아래로 나와 있는 여린 팔이 하얗고 하얗다.

꽤 추울 텐데.

처음 보는 여자의 추위 따위가 무슨 상관인지, 실소를 삼키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옅은 달빛과 차디찬 겨울 공기가 넘실거리는 물결이 되어 그들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물속에 잠긴 듯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서로의 존재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적막이 감도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둘의 시선이 한순간 얽혀들었다.

놀란 건가, 왜……. 그녀의 잔잔하고 맑은 눈이 더욱 커졌다.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며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서서히.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훑어 내리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눈에 담고 가슴에 하나하나 새기듯 천천히,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이건 뭐지…….

문 너머의 머리 깨질 듯한 소음도 텁텁하게 죄어오는 열기 가득한 공기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그녀만 보고 있다. 시공간을 넘은 듯 주위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녀만이 보였다.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새기고 있었다.

회색빛 두 눈에, 냉철한 머릿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가슴속에.

보고, 담고, 새기고 있었다.

깊이 담고 짙게 새기고 있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듯 그녀를 향한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한순간 강하게 휘몰아치다 금세 잠잠해졌다.

그저 바람일 뿐이었지만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만큼 강했다.

그렇게 빠져들던 시선 그대로 서한이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발짝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 대표! 이서한! 서한아.”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문 쪽을 향했다.

친구이자 JK필름의 제작 기획을 총괄 하고 있는 지수혁 전무가 서한을 부르고 있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부름에 수혁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너 계속 찾고 있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

“빨리 와.”

“……그래.”

서한이 짧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움직이며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서한은 업계 관련 인사들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서둘러 발코니를 다시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갔지만, 당연히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서한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이끌리듯 걸어갔다.

테라스의 모서리에는 그의 허리보다 낮은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그녀가 들고 있던 마티니 잔이 놓여 있었다. 손잡이에는 얇고 가는 검은색의 천이 묶여져 있었다. 서한이 가는 천의 매듭을 풀어 든 순간 바람에 실리듯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그의 주변에 스며들었다.

그 향기마저 가슴속에 새겨지고 있었다.

뭐지…….

그에겐 너무 낯선 감정이었지만 무언가 그의 깊은 의식을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고 자신에겐 더 이상 없을 거라 믿고 있었던…….

아련하게 스며드는 생소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처럼 자신을 덮치는 그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혼돈이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서한의 시선이 다시 제 손으로 향했다.

“……Y.H.”

그가 속삭였다.

작은 소리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짙어졌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천을 꼭 쥐었다 다시 품속으로 담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서한은 나른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밤은 두텁게 내려앉고 도심의 불빛들은 더욱 화려해 지고 있었다.

JK필름 사옥 12층 제작지원팀.

유하는 오늘도 야근 중이다.

제작이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영화의 촬영 스케줄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며칠째 야근을 하며 스케줄을 다시 조정하기 위해 하루 종일 진땀을 뺀 유하는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

어느새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엔 혼자 남아 있었다.

한숨을 돌리며 모니터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등받이에 가는 어깨를 기대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점심도 저녁도 먹지 못했다. 잠시라도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감은 눈 밑으로 얕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뺨 위에 살짝 흩뿌려진 옅은 주근깨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오히려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JK 필름에서 근무를 한 지도 어느새 2년이 지나고 있었다.

몇 해 전, 일하던 회사가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하게 되면서 유하도 원치 않게 직장을 잃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집안 생계를 혼자 책임져 온 상태라 그녀의 퇴사 소식은 가족에겐 물론 유하 자신에게도 큰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불안과 막막함을 안고 이리저리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십 년이 넘도록 친하게 지내온 재희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의 채용공고가 떴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지원을 하게 된 회사는 업계에서 최고라 알려진 곳이었다.

외식업이나 규모가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근무를 다양하게 했던 터라 새로운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 크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JK필름은 한국에서 이 분야 최고의 회사였다.

그만큼 합격의 벽도 높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받아줄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같은 분야의 회사 중에서도 근무 조건과 직원 복지가 좋은 곳이라 입사 지원조차도 어려운 곳이었다. 불안한 마음과 걱정을 안고 영혼을 갈아 넣듯 작성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냈는데 면접까지 보게 되었고 최종합격을 하여 어느새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작은 회사들에서 이 일, 저 일 다양한 업무를 해 본 것들이 합격의 이유가 아닐까 하고 유하는 생각 했다.

워낙 취직이 어려운 상황에서 입사하게 된 좋은 회사이다 보니 유하는 마지막 직장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업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야근이 잦은 편이긴 해도 그에 대한 보상도 만족스러운 편이라 불평 없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였다.

한 번 시작 된 불평과 불만은 끝을 모른다. 유하는 가능한 좋은 생각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영화를 보고 관련 자료나 책을 보는 것도 좋아해 영화제작사에 다닌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연결고리를 지어 보기도 했다.

늘 힘겹고 팍팍한 삶 속에서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하는 것들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아끼고 아껴서 가끔씩이었지만.

책이야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었지만 영화는 큰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씩 정말 보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만 영화관을 이용하곤 했다.

생활비, 월세, 엄마의 병원비는 끝이 없는 지출이었다. 거기에 아버지가 남긴 빚까지.

많은 고정비를 해결하기엔 유하의 월급은 빠듯하기만 했다.

그 모든 것을 버텨낸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 포기라는 것만 남도록 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을 살아왔다.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청승맞다거나 답답하다 하겠지만 이런 삶도 정말 있었다.

그 삶이 왜 하필 자신의 삶인지는 정말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JK필름에서 일을 하게 된 후 연봉이 조금 오르고 가끔씩 나오는 보너스도 적지 않다 보니 그녀의 일상에서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녀 인생의 처음이자 유일한 일탈이었다.

정신없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늦은 퇴근을 했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엔 유하만 남아 있었다.

야근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유하는 늦은 밤 사무실에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곤 했다. 그녀에겐 늘 조용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어떤 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부러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글을 끄적거리거나 소소한 취미 활동을 하였다.

오래된 주택에 엄마와 단둘이 세를 들어 사는 그녀에겐 조용한 자신만의 공간이 없었다.

유하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만, 현재로선 여의치 않은 꿈이었다. 큰 집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나만의 방이라도 가질 수 있으면 하고 늘 바라지만 이번 생은 그마저도 불가능해 보이는 게 그녀의 현재 삶이었다.

유하는 체념하듯 씁쓸한 숨을 뱉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새해를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벌써 2월의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완전히 끝나고 또 봄이 오겠지. 내 인생은 여전히 겨울이겠지만.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가 긴 머플러를 입 언저리까지 돌돌 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복도에 있는 창을 통해 닿을 수 없는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분명 함께 존재하지만, 저와는 다른 세상 속 화려한 사람들. 그녀는 꿈도 꾸지 못 할 인생.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잠시 공허해졌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이 보였다.

그녀가 다니는 JK필름의 대표이자 영화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사람.

그러나 주변에선 '악마의 심장'을 가졌다고 할 만큼 냉혹한 성격의 이서한 대표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주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