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 속 행동에 자취가 있다면

“후우…. 더는 못 가겠다.”

신후는 깊숙이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느새 땀방울이 엉겨 있었다. 새벽녘 한강변의 공기가 꽤나 상쾌했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공원이며 산책로를 보니 지난 학기 내내 거닐던 캠강이 떠올랐다.

“어? 에단리 씨 아니세요? 새벽에 여기서 운동하시는구나.”

“아, 네. 안녕하세요.”

강아지와 산책 중이던 중년 여자가 알은 체를 했다. 신후도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에단 씨 노래 참 좋아요. 요즘 가수답지 않게 깊이가 느껴져요. 오죽하면 제 나이에도 공감이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강아지 참 예쁘네요.”

공감.

타인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신후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단어다.

누군가의 마음을 같은 울림으로 어루만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음악을 시작하면서 뼈저리게 고민하는 것 역시 바로 ‘공감’이었다.

“음악에다 학업까지 병행한다니 참 대단해요. 어린 나이에 어찌 그리 믿음직한지….”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많이 부족하죠.”

“에단 씨 부모님이 참 궁금하네요. 뭐든지 척척 해내는 아들로 키우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말이죠.”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후는 중년 여자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데뷔 이래 자주 들어온 칭찬의 말들이었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서울에 머물 때만큼은 함께 지내자던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립한 지 한 달 여, 한국에서의 생활도 그럭저럭 익숙해져갔다. 두 분은 어떻게든 독립을 늦춰 보라셨지만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입지조건은 딱 두 가지. 강남 한복판의 본가와 가까운 듯 떨어진 곳, 그리고 운동과 산책이 가능한 한강변에 인접한 곳, 더 정확히는 캠강을 연상시키는 곳이기를 바랐다.

“휴우….”

오피스텔로 가려면 한강변과 연결된 작은 터널을 지나야 했다. 신후는 연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터널쯤 다다르면 제법 녹초가 되고 만다.

쓰르륵.

거칠게 내몰던 숨이 일순간 멈추었다. 무언가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 신후는 제 귀를 의심했다.

터널 입구로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신후의 동공은 자꾸만 커져갔다. 쪽진 머리에 한복 차림을 한 앳된 얼굴이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어, 도련님.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네?”

차림새는 그렇다 치고 이 여자 말투는 왜 이렇담.

신후는 일순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시는 길을 방해하게 되어 송구하오나 제가 길을 잃은 듯하여….”

비좁은 통로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겨우 마주할 수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쪽진 머리와 대비되는 묘한 분위기였다.

“어디로 가시는 길인데요?”

“둑제를 지내는 둑섬 근처에 제 집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이곳이었습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요?”

“여기는 뚝….”

문득 매니저 지범이 형의 말이 떠올랐다.

“신후야. 그거 알아? 뚝섬을 옛날에는 둑섬이라 불렀대. 조선시대엔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 섬에 둑기를 세우고 둑제를 지냈다지.”

형이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둑기? 둑제는 또 뭐야?”

“여기서 ‘둑’은 말이다. 일종의 깃발 같은 거야. 왕이 타던 가마나 군대 대장 앞에 세우던 큰 의장기 말이야. 둑제는 전쟁에 출정할 때 승리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를 말하고.”

둑제와 둑섬. 분명 형 입에서 나올 법한 단어들인데…. 이 새벽, 뚝섬 한강변에서 마주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둑제… 둑섬…

**

『약속을 해 놓고 임은 어찌 이리 늦나. 뜰에 매화는 다 지려고 하는데.』

옥봉은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움에 목이 메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대로는 안 될 터.”

열어놓은 문 틈새로 달려드는 봄바람마저 야속하기만 했다. 떠난 이를 그리며 사는 삶은 한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행복할 줄 알았다. 언제까지고 평온할 줄 알았다.

어린 날에는 아비의 사랑에 늘 목말라 있었다. 서녀라는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위안했었다.

그러나 혼인한 지 얼마 안 돼 청상과부 신세가 됐을 때는 더 이상 위안조차 할 수 없었다.

떠난 이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약 없이 지속되는 그리움의 나날은 그 어느 때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아씨, 방에만 계시지 말고 저와 꽃구경이라도 가시겠어요?”

친정에서부터 시중을 들던 몸종 정순과는 둑섬에 자리를 잡으며 다시 만났다.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요즘, 옥봉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는 고마운 아이였다.

“괜찮다. 나는 마음이 동하질 않는구나.”

“아씨. 울적하다고 집안에만 계시면 마음의 병세가 더 깊어지십니다.”

“아니다. 난 괜찮다. 이참에 시나 마무리 지어야겠어.”

옥봉은 다시 붓을 들었다. 다음 행의 첫 구절이 내내 맴돌기만 했다.

『갑자기 가지 위에서… 까치…』

옥봉의 머리와 몸이 아득해져왔다. 몸이 쇠한 탓일까. 부쩍 노곤함이 더해갔다.

『까치소리…』

귓속이 웅웅대기 시작했다. 옥봉은 더 이상 붓을 들 기력조차 없었다. 튕기듯 붓을 내려놓았다. 가녀린 두 손을 앞섶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천천히… 천천히… 두 눈이 감겼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온통 낯선 것뿐이었다.

“어? 여긴… 어디지? 우리 집은…”

**

“누나!”

다급한 신후의 목소리에 신영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잠이 덜 깬 듯 부스스한 신영과 달리 신후의 얼굴빛은 자못 어수선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그녀는 신후의 뒤에 서있는 여자를 보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저 여자 누구야?”

“있잖아, 누나.”

신후의 머뭇거림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야, 너 혹시 사고 쳤어?”

“뭐? 내가 그럴 사람이야?”

그건 그렇다. 신후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범생 중의 범생이었다. 제법 터울이 지는 사촌동생이지만 어릴 적부터 오빠 같은 듬직함이 있었다.

신후의 등 뒤에 서있던 옥봉이 모습을 드러내자 신영의 눈빛에 놀라움이 서렸다.

“옷이 왜 이래? 저 사람 누구야?”

“누나,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신영의 복층 형 원룸은 너저분한 옷가지며 책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파 위 수북한 물건들을 대충 걷어내고 나서야 세 사람은 비로소 차분히 마주앉았다.

“이름이 뭐라고요? 이옥봉이라고 한 거 맞아요?”

“네. 이름은 원, 호는 옥봉이라 하옵니다.”

신영은 민망하리만치 뚫어지게 옥봉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영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옥봉은 고개를 떨구었다.

“왜? 아는 이름이야?”

“응. 아주 잘.”

설마 아니겠지? 옷차림이며 분위기가 영 불길하지만 자신이 아는 그 옥봉은 아니리라 되뇌었다.

“정말? 어떻게? 이옥봉이 누군데? 그러니까 이 분이 언제 적 사람인데?”

“조선 중기쯤? 허난설헌 알지? 그 시기쯤 살았던 여류 시인.”

옥봉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초희를 아는 이가 여기 이곳에 있다니….

“초희를 아십니까?”

신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잘 알죠. 허난설헌 본명이 초희잖아요. 제 논문 주제이기도 하고요.”

신영의 눈이 일순간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아니지, 근데 이 상황이 뭐지? 그녀는 신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너 저 여자 어디서 만났어? 저 차림새는 또 뭐고?”

복층으로 오르는 비좁은 계단참으로 신후를 밀어붙인 신영은 폭풍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아까 새벽에 한강에서 만났어. 운동하고 가는 길이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을 묻더라고. 자기 살던 집이 없어졌다면서.”

“한강? 뚝섬 말이야?”

“응. 둑섬이 어디냐고 여러 번 묻더라고.”

신영은 계단 너머로 옥봉을 내려다보았다. 다소곳이 앉은 그녀의 옆모습은 조선의 여느 여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매니저 형한테 들었는데 둑섬이 뚝섬의 옛날 이름이라던데. 옷차림도 그렇고 말투도 좀 이상하지 않아?”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신영은 어쩐지 옥봉이 낯설지 않았다.

“누나.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일단 이리로 왔는데, 진짜 어떡하지?”

“나라고 무슨 답이 있겠냐? 휴우…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신후가 그녀와 처음 대면하던 순간만큼이나 신영 역시 당황스러웠다.

“설마 이옥봉을 사칭한 네 스토커나 사생 팬 같은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말투나 행동을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진 않아.”

말투나 행동은 지나치리만큼 깍듯한 축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어둑한 터널에서 마주한 그녀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떠올렸다. 나쁘거나 이상할 리 없는, 맑은 눈빛이었다.

“그렇긴 한데 왜 하필 네 앞에 나타났을까?”

“글쎄, 알 수 없지.”

이곳으로 오는 잠깐 동안 신후도 자문했던 것들이었다. 왜 하필 여기일까. 그녀는 정말 누구일까.

“경찰서로 데려가는 게 맞을까?”

신영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말 이옥봉이라면? 정말 조선에서 온 시인 이옥봉이라면?

“경찰한테 간다고 무슨 수가 있겠어? 기껏해야 노숙자 취급이나 하겠지.”

이대로 경찰서에 데려가면 옥봉을 사지로 내모는 게 아닐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자꾸만 신영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녀가 맞다고 말이다.

“일단 여기서 지내면서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래도 될까? 누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

잠시 침묵한 사이 느닷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놀란 신영이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옥봉의 표정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

“멈, 멈추지 못하겠느냐?”

“옥봉 씨, 무슨 일이에요?”

“이, 이게 무어란 말이요?”

옥봉이 가리킨 건 로봇 청소기였다. 예약돼 있던 청소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아요. 이건 그냥 청소하는 기계에요.”

“청소 기계라 하셨습니까?”

“네. 처음 보는 건가요?”

“난생 처음 봅니다. 기계란 게 무엇인지요? 그러니까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라 그저 물건이란 말씀인지요?

신영은 옥봉을 데리고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계단에 걸터앉은 신후가 난감한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옥봉 씨. 몇 가지 좀 물어볼게요.”

신후도 슬며시 소파에 끼어 앉았다.

“그러니까 뚝섬, 아니 둑섬에 집이 있었던 게 맞아요?”

“그러하옵니다. 눈을 떠보니 집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옥봉의 머리가 묵직해져왔다. 벼루며 종이, 문진 따위가 어지러이 놓인 서궤가 떠올랐다. 비좁은 방을 가득 채우던 묵향도 훅 끼쳐왔다. 그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