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민법 837조 2의 1항에 따라 피고는 자녀의 복리에 해가 되지 않으므로, 면접 교섭권 제한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원고 측의 입장은요?”

“수용하겠습니다.”

도한의 방청 아래 해별의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별이 이곳에서 두 번째로 만난 의뢰인의 양육권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민법 제 837조 이혼과 ‘자’의 양육 책임에 따라,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는 자녀 양육에 관한 사항을 협의에 의해 정해야 합니다.”

해별 측은 자녀가 남편을 만날 수 있는 면접 교섭을 입정하는 대신, 양육비를 받기로 했다.

“판결합니다. 원심은 피고에게 60만 원의 양육비를 부담하도록 하고, 새로운 예금 계좌를 개설하도록 하여 양육비를 위 예금 계좌에 매월 입금토록 할 것을 명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양육비가 책정되었다.

“원고는 피고에게 지출 내역을 매년 분기별로 해당 분기 말일에 알릴 것을 명한다.”

*

“고생했어, 별아.”

“내 에너지가 보러 와서 그래요.”

“그래서 그런가, 판사님보다 날 더 많이 보더라.”

“앗, 들켰다.”

“다음부턴 나 보지 말고 판사님 봐, 판사님.”

“알았어요.”

좋아서 본 건데… 틀린 말은 아니니까, 뭐.

양육권이 깔끔하게 해결이 되어서인지, 도한이 와준 덕분인지 해별의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의뢰인 자녀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한대?”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하신 걸 알아서, 별로 반응은 좋지 않대요. 피고는 자녀들한테만은 진심이었던 거 같긴 한데 안타깝죠, 뭐.”

“자업자득이지.”

도한은 딱 선을 그었다.

“의뢰인한테 말씀드려. 자녀분들 선택에 맡기라고.”

“네.”

맞는 말이었다. 누가 강요해선 안 될 일이니까.

“강도한.”

“아….”

그렇게 나란히 법원을 나오던 두 사람은 영진과 딱 마주쳤다.

“이젠 아예 대놓고…!”

언제 봐도 무서운 눈빛이었다.

놀란 해별이 도한을 바라보자 도한 역시, 예상치 못한 만남인 듯 굳은 채로 영진을 바라보았다.

“볼일 있으셔서 온 거 같은데, 볼일 보세요.”

“얘기 좀 하지. 셋이서.”

“싫은데요.”

부자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텐데.”

답답한 공기 속에서 도한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형 로펌의 대표가 이런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얘는 빼죠.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신 거 같던데.”

“그 여자는 그다지 겁 많은 스타일은 아닌 거 같던데. 같이 와.”

영진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역시 연륜이 있으셔서 제 성격을 정확히 알아보시네요.”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농담을 던진 해별은, 도한의 걱정 담긴 눈빛을 보곤 무안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사실 겁 많은데… 그쵸?”

“싫으면 안 가도 돼.”

“갈래요.”

도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혜은을 만났을 때도 용감하게 나서더니….

그냥 선택권을 주지 말걸 그랬나.

“상처받을 수도 있어.”

“강 변호사님 혼자 상처받는 건 더 싫어서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의 눈빛이 이토록 비장하고 단호할까.

해별은 겁을 먹는 대신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자, 그럼.”

“네!”

*

법원 근처의 카페를 찾은 세 사람은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 분위기에 목이 타는 해별은 빨대로 커피를 마셨댔다.

쪼오옥.

그러다 그 소리가 너무 커 무안함에 헛기침하는 그녀였다.

“이렇게 부르신 거 보면 하실 말씀 있으신 거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네가 네 애비한테 그딴 식으로 대하니, 그 여자애가 우리 집안을 우습게 알지.”

영진은 도한을 노려보는 대신, 해별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해별은 지난날 자신의 행동들을 떠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참… 맹랑하더구나.”

도한은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아닌 해별에게 말로 또 상처를 줄까 봐.

“저한테 말씀하시라구요.”

입술 안을 깨문 도한은 영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진의 입에선 예상했던 뻔한 말이 나왔다.

“두 사람, 앞으로 계속 못 만나는 건 알 테고, 이 여자도 네 신분을 아냐.”

“네, 압니다.”

“그럼 더더욱 네 상황을 제대로 말했어야지!”

영진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갔다.

“네가 우리 집에 온 그 순간부터 넌 우리 집안이 살아온 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이해별 변호사라고 했나. 아가씨도 나름 변호산데, 우리한테 이런 취급 받아서 좋을 게 뭐가 있나. 그쪽에서 먼저 그만두게.”

“아버지!”

영진은 도한 대신 해별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와. 마지막 기회다.”

“제가 그럴 것 같으세요?”

“이 아가씨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한다면 모를 일 아니냐. 뻔히 힘든 길이 펼쳐져 있는데 계속 만난다? 말도 안 되지.”

영진은 앞날은 불 보듯 뻔하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그러곤 자신의 명함을 꺼내 해별에게 내밀었다.

“혹 돈이 아쉬운 거면 연락하게.”

“하, 지금 드라마 찍으세요? 방법이 참… 올드하시네요.”

“돈은 언제나 먹히지. 명함 받게, 아가씨.”

“가자, 해별아. 더 들을 것도 볼 것도 없어.”

결국, 해별에게 상처를 줬다.

귀가 잔뜩 붉어진 도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해별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해별은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뭐, 뭐…?”

“저한테 아버님 소리 듣는 거 싫어하실 거 같아서요. 원하시면 아버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도한은 당황한 채로 굳어 서 있었고 영진 역시, 황당함에 이마에 핏발을 잔뜩 세웠다.

“죄송한데 저 못 헤어져요.”

“내가 선택하라고 한 말로 들렸다면 곤란한데?”

“제가 공부를 막 잘했던 편이 아니라서 지방대 로스쿨을 나왔어요. 시험도 바로 합격 못 했구요. 그런데 우리 아빠는 그런 딸이라도 절 많이 아껴 주세요.”

입매를 굳힌 영진을 보고도 해별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아빠고, 편해야 아빤 거잖아요. 그런데 강 변호사님이 저랑 헤어지고 돌아가면요? 다시 지옥에서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우리 아들이 지옥이라고 했나.”

“어떤 아빠도 아들한테 아저씨처럼 말하지 않아요. 이런 말들을 듣는 환경이 지옥인 거죠.”

“그냥 가, 해별아….”

도한이 한 번 더 해별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이번에는 해별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제가 강 변호사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지옥으로 다시 보낼 수 없어요.”

해별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고, 분명했다.

“주신 명함은 받겠습니다. 강 변호사님한테 정말 아버지가 필요할 때, 그때 연락드릴게요.”

해별은 할 말을 다 끝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영진의 명함을 챙겨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그 자리를 떠났다.

“실례하겠습니다.”

도한의 도움 없이 그녀는 당당하게 걸어서 카페를 나갔고 잠시 당황하던 도한 역시, 곧 그녀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영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

“으어어어!”

“해별아!”

해별은 카페를 나오자마자 벽을 짚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해별보다 조금 늦게 카페를 나온 도한이 주저앉는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허허헝, 망했어요. 안 그래도 절 안 좋게 보시는데 망했어요오…!”

틀렸어요, 강 변호사님 색시하기는 틀렸다구요!

이미 백년해로 계획을 다 짜 놨는데 다 틀렸어!

해별은 절망감에 얼굴을 감쌌고, 도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아버지도 곧 나오실 거 같은데, 계속 여기 있을래?”

“아니요! 안 되죠! 내가 얼마나 당당한 척했는데! 가요, 얼른 가요.”

방금 전까지는 망했다고 울상이더니.

이내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해별을 본 도한은 영진이 했던 말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같이 가!”

잠시 뒤, 카페를 벗어나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죄송해요, 강 변호사님.”

“뭐가.”

“부모님한테 좋은 이미지 못 보여드렸잖아요.”

카페에선 그렇게 당당하던 해별은 뒤늦게 걱정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좋은 이미지 보여줬어.”

“네?”

“네가 그렇게 말할 건 예상하지 못하셨을 거야.”

“그러니까요! 얼마나 당황하셨겠어요.”

“그 당황스러움 덕에 이젠 널 만만하게 못 보시겠지.”

도한은 확고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고마워.”

“고, 고맙다구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려 줘서.”

해별은 쑥스러워하는 대신,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진심이에요, 그 말은.”

해별은 알면 알수록 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숨기는 법 없이 애정이 가득한 사람.

“봤죠? 저 숨기는 거 없는 거? 그러니까 강 변호사님도 힘든 일 있으면 다 말해요.”

“어.”

단답이었지만, 그는 실금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큼! 아, 누룽지가 먹고 싶네.”

“갑자기요?”

“응. 누룽지 당겨.”

다음 날, 해별이 로비에 있는 프린트기 앞에서 서류를 뽑고 있을 때였다.

민준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그는 ‘누룽지’를 강조하며 잠시 해별을 쳐다보았다.

“누룽지가 당기네. 화장실 갔다 올게.”

그 말을 끝으로 도한이 나가자 민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래? 이상하시네.”

“그, 그러게요! 하하. 아… 아까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프린트는 어떡하구요!”

“이따 들어오면서 들고 갈게요.”

‘누룽지’의 신호를 받은 해별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을 나가자 복도에는 벽에 기댄 도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 변호사님!”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변호사님도 진짜! 사무장님이 알면 어쩌시려구요!”

‘누룽지’를 집에서도 쓰고, 사무실에서도 쓰고.

암호가 곧 들통날 것 같단 말이지.

“오늘따라 민준이가 자리를 안 비우잖아.”

“못 살아, 진짜.”

“얼른.”

도한은 자신의 팔을 ‘콩’ 때리는 해별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입술을 내밀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지만.

쪽!

매우 정확하고 스피드하게 그녀의 입술이 날아왔다가 사라졌다.

“끝이야?”

“여기 뭐, 사무장님만 있나? 다른 사람들이 오다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구요!”

“아쉬운데.”

“전 조금 더 있다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얼른! 라잇놔우!”

쪽.

서두르는 그녀에게 그의 입술이 한 번 더 부딪쳤다.

“뽀뽀 받았으니까 내가 돌려주는 거야.”

햇살 받은 나뭇잎의 이슬처럼 그가 투명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홀로 남아 영혼을 가출시킨 그녀는 입매를 벌렸다.

*

“누나!”

“어? 왜 나와 있어?”

“강 변호사님이 누나랑 퇴근 못 한다고 연락 주셔서.”

“굳이 데리러 안 와도 되는데.”

그날 저녁, 해성이 큰길까지 해별을 마중 나와 있었다.

법원 갔다가 오는 길에 차가 퍼진 도한이 해성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건물에서 나올 때는 민준이가 같이 있지만, 집에는 해별이 혼자 가야 하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왔구나?”

“응. 그래서 나왔다.”

“오이고, 예뻐라.”

해성이 팔을 뻗어 해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해성은 재빨리 누나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런데 누나.”

“어?”

“나, 사실 누나가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거든?”

“무슨 거짓말?”

“나한테 동거 사실 들키니까 위험하다고 거짓말한 게 아닐까 하고.”

“그런 거짓말을 왜 하냐! 스물아홉 살에 동거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닌데.”

“아니, 위험한 것치곤 너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럼 넌 나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좋겠냐?”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 해성은 누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 생기지 말라고 내가 여기 사는 거잖아.”

“고맙다, 그래.”

“사실 너무 조용해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강 변호사님 하는 거 보니까….”

“거짓말 아닌 게 믿어지지?”

“응.”

해성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동생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는 것 같은 해별이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출, 퇴근할 때 강 변호사님이랑 꼭 붙어 다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도 별론데.”

“네 앞에선 최대한 안 붙어 있잖아.”

“됐네요, 조심이나 해.”

“알았어.”

그렇게 남매가 공동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 정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해별아. 지금 옥상에서 보자♡]

카페에 갔다 돌아온 해별의 사무실 모니터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어? 웬일로 옥상이야?”

사무장님도 사무실에 없는데 옥상에서 보자고?

해별은 이 건물의 옥상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헐, 옥상 뷰가 좋은가?”

쪽지를 본 순간부터 헤죽헤죽 웃던 해별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접견을 갔다 오면 바로 일을 하는 남자가 옥상에서 보자니.

[문이 열립니다.]

“어? 이 변!”

“작가님!”

“어디 가요?”

“옥상에 잠깐이요.”

“옥상? 아아, 강도 만나러 가는구나? 쓰읍, 변호사들이 너무 업무 태만 아니에요?”

준엽은 놀려댔지만, 해별은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옥상은 어떻게 가요?”

“엘리베이터가 7층까지 밖에 없는 거 보면 7층에 내려서 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아아. 아! 따라오지 마세요!”

“됐네요! 치사해서 안 가지.”

“그럼 지금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니까 여기요.”

해별은 준엽에게 사무실 키를 넘기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힙니다.]

“좋을 때다, 진짜.”

준엽은 싱글벙글하던 해별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처음 와보는 7층은 주거 공간으로 리모델링을 한다더니, 마무리 단계라 그런가 어둡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 저 인형….”

그런 해별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 복도에 덩그러니 놓인 인형이 눈에 띄었다.

찝찝해서 책장에 놔뒀는데 사라진 그 분홍색 토끼 인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