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너, 최대한 빨리 집 구해 줘.”

“…네?”

“어차피 원룸 구할 거였잖아.”

그의 음성을 따라 해별은 몸을 굳혔다.

구하긴 할 거였는데….

“혹시 제가 잘못한 거 있어요?”

“아니.”

무표정한 그의 얼굴엔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도한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성 소수자든, 말든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됐다고.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 편하게 쓰고 싶어.”

“아.”

뭐 이렇게 허무한 이유가.

“아 예에. 다음 주에 바로 갈게욥.”

“응.”

“정말 가요.”

“안 잡아.”

해별은 잠시나마 어색했던 분위기를 희석시키고자 대답에 장난을 섞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원룸을 구하려고 한 건 맞는데, 이렇게 친히 가라고 하시니 괜히 섭섭하네.

“누룽지 맛있네.”

도한은 괜히 말을 돌렸다.

그녀가 끓여준 누룽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앞으로 누룽지 보면 네가 많이 생각날 거 같아.

그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

“강 변호사님, 안녕….”

“어.”

민준이 인사를 잘라 먹은 도한은 자신의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오셨어요, 이 변호사님?”

“역시 사무장님이 1등으로 오셨네요!”

“오, 제가 1등으로 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방금 강 변호사님 들어가셨잖아요. 뒤에서 봤어요.”

일부러 도한과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들어온 해별은, 민준과 친근하게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강 변호사님, 오늘 기분 안 좋으신가 봐요?”

“왜요?”

“분위기가 냉랭하길래.”

민준의 말을 따라 해별은 도한의 방을 슬쩍, 쳐다보았다.

재킷을 벗는 그가 보였다.

아침 먹을 때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아침 일을 떠올리던 해별은 잠시 생각했다.

“나, 점심 약속 있어.”

“다녀오세요.”

그리고 점심때도 그는 해별을 쳐다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이 변호사님! 뭐 드실래요?”

“전 아무거나요….”

시무룩해진 해별의 시선은 도한이 나간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 변호사님은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뭔갈 단단히 잘못한 게 아닐까.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강 변호사님, 원래 저런 분이잖아요.”

“오잉? 저 지금 강 변호사님 신경 쓴 거 아닌데요?”

“오잉? 아닌데요? 표정에서 다 티 나는데요?”

그렇다고 사무장님한테 아침에 있던 일을 말할 순 없잖아.

해별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곤 지갑을 챙겼다.

점심을 먹기 위해.

*

“너는 내가 밥 먹으러 왔는데 구내식당을 와야겠냐.”

“야, 이래 봬도 오늘 특식이야. 오리 훈제.”

“구내식당에서 먹는 오리 훈제가 뭐가 특식이야.”

“그럼 약속이나 잡고 오던가. 통보가 뭐야, 통보가.”

“아, 그건….”

석호의 타박에 도한은 할 말을 잃었다.

도한은 오늘, 해별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 석호가 있는 법원을 찾았다.

덕분에 법원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오리 훈제 맛있어. 먹어 봐.”

“고맙다, 그래.”

“그래도 점심 내가 사는 거다.”

“아이고, 고오맙다.”

허무함을 뱉는 도한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해별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만 이렇게 지내자.

집에서만이라도 얼굴을 안 본다면… 가능할 거야.

“어?”

“왜.”

“저 사람들은 여기서 왜 밥 먹지. 볼일 있나.”

석호가 도한의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도한이 돌아본 곳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저 사람들 알아?”

“너 몰라? 악덕 로펌으로 엄청 유명하잖아. 수습들한테 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기들 일 떠맡기고.”

도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언젠가 술집에서 해별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뚱뚱한 남자.

같은 변호사라고 말하기도 창피했던 그 남자였다.

“아아, 저 사람들이 그렇게 유명하다 이거지.”

“응. 저 로펌에서 여러 명 온 거 보니까 큰일 맡았나 보… 어디 가!”

석호의 외침을 뒤로한 도한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뚱뚱한 남자를 향해.

“아! 아이씨, 내 옷!”

툭.

남자에게 다가간 그가 남자를 가볍게 밀쳤다.

그 덕에, 그 남자는 식판에 받았던 반찬을 흘렸고, 하얀 와이셔츠를 더럽혔다.

“아. 미안합니다.”

“미안하면 어? 당신…! 지금 일부러 그랬지?”

“물 마시려다 실수로 쳤는데… 어? 우리 구면이죠?”

도한은 뻔뻔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상대했다.

“반가우세요? 지금 일부러 친 거죠.”

“일부러 친 거처럼 보일 만큼 제가 나쁜 인상이었나 봅니다? 같은 업계 사람끼리.”

도한의 말에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

누가 들어도 움찔할 차가운 말투.

“이해별인가? 수습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또 수습 거리네.

“저랑 반말할 만큼 친하시면서 이런 실수도 못 넘기시나 봐요.”

“뭐?”

구내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도한에게 쏠렸다.

무심하게 팔짱을 낀 도한은, 아랫사람 보듯 뚱뚱한 변호사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김 변… 어? 가, 강도한 변호사!”

“아는 사람이에요?”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할 때, 뚱뚱한 변호사의 직장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곤 도한을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섰다.

“하하, 예, 예전에 본 적 있는데 기억하세요?”

“글쎄요. 낯이 익은 거 같기도 하고.”

“따로 사무실 차렸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그, 그런데 김 변은 꼴이 왜 이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도한은 기억을 더듬는 척 연기했다.

“누군데 이렇게 건방져요? 일부러 쏟았다니까요.”

“법무법인 ‘강일’ 대표님 몰라? 그분 아들이시라고.”

직장 동료의 설명에 뚱뚱한 변호사는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이내 ‘헉’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일의 대표라면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한… 강영진 선배님?

“어, 어… 이, 이 사람이?”

“실수였는데. 세탁비 드릴게요.”

“에이. 이 정도면 물 칠 몇 번 하면 돼요. 그지, 김 변?”

“그, 그렇죠….”

도한이 지갑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뚱뚱한 남자의 직장 동료가 대신 말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꼬리를 내렸다.

와이셔츠의 단추 속에 꽉꽉 채워진 목살들이 시뻘게진 채로.

“그럼 저는 일행이 있어서 가 봐도 될까요?”

“아, 네네.”

“그럼.”

그리고 도한은 목 인사를 살짝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보니까 연기하는 거 너무 티 나던데 뭐야? 원수?”

“아니.”

이 변을 괴롭힌 사람.

석호의 질문에 도한은 단답 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일부러 안 나섰어.”

“잘했어. 네가 나서도 도움 안 됐을걸.”

해별 대신 복수한 것 같긴 한데, 밥알을 넘길 때마다 뒷맛이 썼다.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받지 않으려고 독립한 건데.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 뭐가?”

“아니야.”

석호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는 도한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별아. 내일 저녁엔 집으로 와. 해성이 시험 치니까 누나가 와야지.]

해성이 시험이 벌써 이번 주구나.

엄마의 문자를 받은 해별이 시간의 빠름을 실감했다.

“난 오늘 늦게 가.”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해별은 차마 도한에게 잔소리할 수 없었다.

우리한텐 늦게 남아 있지 말라고 했으면서.

하지만 그녀는 달라진 도한의 눈매에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강 변호사님 유난히 저기압이긴 하네요.”

“그러게요….”

“그럼 이 변호사님, 조심히 가세요!”

“네. 내일 금요일이니까 오늘 밤만 버텨요!”

그러면서도 해별은 민준과 파이팅을 다지며 헤어졌다.

그리고 사무실에 홀로 남은 도한은 CCTV를 계속 돌려 보았다.

스프레이 테러 때문에 혼자 있는 게 살짝 겁나긴 했지만, 경찰차가 바깥을 돌고 있었기에 사무실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CCTV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이상한 거야, 대체.”

그다음 날도 해별은 도한과 출근길을 함께하지 못했다.

“강 변호사님.”

“어.”

“오늘도 늦게 가세요?”

“약속 있어.”

“아. 그럼 저 집에 좀 다녀올게요. 일요일 밤에 들어갈 거 같아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해별은 도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그럼 가보겠습니다.”

해별은 꾸벅 인사를 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도한도 안다.

자신의 태도에 해별이 눈치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함은.

*

“아, 돼지 왜 왔어. 시험 쳐야 하는데.”

“지난번에 누나라고 부른다며!”

“아, 쏘리. 돼누로 합의 보자.”

“시험 전날이라 참는다. 자, 엿. 엿 먹어.”

“왜 은근 멕이는 거 같지.”

남동생은 시험을 앞두고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누나가 건넨 엿을 받아드는 그다.

“그럼 누나 새벽에 온 거야?”

“밤늦게. 너, 자더라.”

“아아.”

토요일 아침부터 해별의 집은 분주했다.

해별의 엄마 유경은, 수능 날 아침처럼 밥을 차렸다.

“이거 챙겨가서 나중에 먹어. 간단하게 쌌어.”

“감사합니다, 어머님.”

해성은 능청을 떨며 유경의 도시락을 챙겼지만,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긴장하지 말고! 긴장할 거 같으면 초콜릿 챙겨 가서 먹어.”

“응.”

“삼수는 없다! 파이팅!”

“시험 치는 날 아침에 삼수 같은 소리 하지 말아 줄래.”

“아, 쏘뤼.”

*

“사람 한 명 없다고.”

조용한 토요일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엔 익숙했던 적막이 이번만큼은 도한에게 크게 다가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 적막을 이기지 못한 도한은 드라이브를 하다 카페를 찾았다.

커피를 받아든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해별이 가득했다.

해별이… 집을 구해서 진짜 나가게 된다면, 이 적막에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데.

“몇 개월을 산 것도 아닌데.”

그가 씁쓸함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

“강도한….”

해별을 떠올리던 그가, 카페로 들어오던 이서를 보곤 깜짝 놀라 몸을 세웠다.

도한을 발견한 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네가 왜….”

“나, 잠깐 드라이브하다가….”

서로 놀람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리액션들만 나오는 사이, 먼저 앉을 것을 권유한 사람은 도한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 안 할게. 어떻게 지내? 걱정했어.”

그래도 오랜 친구니까.

그의 진실 된 눈빛에 이서가 도한과 마주 보고 앉았다.

“넌 내가 안 미워?”

“우리 서로 원했던 결혼이 아니었잖아.”

이서는 시선을 바닥에 깔곤 말이 없었다.

“너 불편하라고 앉으라고 한 거 아니야. 그냥, 그 뒤로 넌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났으니까. 대단…하기도 하고.”

“너도 참 너다. 차라리 욕을 해. 아니 때릴래? 한 대 맞아 줄 수 있는데.”

시원시원한 키와 이목구비만큼 이서는 말하는 것도 시원시원했다.

변함없는 친구의 모습에 도한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서 역시 그를 따라 웃었다.

“변호사 사무실 낸 거 들었어. 축하해.”

“덕분에 용기 냈어. 내 사정… 알잖아, 너.”

“그렇게 결혼식을 깼는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웃음이 진정되고 도한은 고민했다.

이서는… 해별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지금은 애인이 있을까, 하고.

“애인은. 있어?”

“편견 없는 변호사님이시네. 응. 있지. 5년 다 되어 가.”

“뭐…? 5년?”

5년이라니? 해별은 헤어졌다고 했는데, 5년이라니.

“이해별은… 그렇게 말 안 하던데….”

도한이 놀란 눈으로 묻자 이서도 덩달아 놀랐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혹시 내 뒷조사했어?”

“어어, 아니야! 우연히 만났어. 나랑 같은 변호사라.”

인상을 구기는 이서를 향해 도한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만났을 수도 있겠네. 같은 변호사면….”

이제야 이서는 납득이 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한은 같은 사무실을 쓴다는 사실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아니야. 우리 결혼식을 깨준 사람일 뿐이지.”

“…뭐?”

해별은, 이서랑 헤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서는… 5년 다 되어 가는 애인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아니야. 우리 결혼식을 깨준 사람일 뿐이지.”

그 혼란함 속에서 이서가 뱉은 말은, 도한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뭐?”

“말 그대로야. 그 사람은 우리 결혼식을 깨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자, 잠깐만… 나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도한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이서는 그런 도한을 보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럼 그날, 네가 커밍아웃한 게 거짓말이었다고.”

“아니야. 나 여자 좋아해. 레즈 맞아. 애인이 거짓말인 거고.”

“애인이…?”

“이해별 씨 안다며. 친한 거야?”

친한 건 아닌데, 같이 살아.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나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

“친하겠네, 그럼. 그런데도 서로 결혼식에 대해선 아무 소리도 안 한 거야?”

“응.”

홍이서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그냥 헤어졌다는 사람한테 집요하게 물을 순 없잖아.

“하긴. 내가 동성애자인 것도 밝혔는데, 이게 무슨 비밀이라고. 이해별 씨는 내 부탁받고 결혼식을 깨준 사람일 뿐이야.”

도한은 머리가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해별이라는 여자는… 성 소수자가 아니란 말이야?

“성 소수자도 아니겠네, 이 변.”

“내가 아는 한은 아니야.”

그렇게 고민했는데.

사람 마음은,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성 소수자가 아니면….

“대, 대체 왜? 어차피 커밍아웃할 거였으면, 네 애인을 밝혔어도 됐잖아.”

“내 애인을 지키고 싶었거든.”

“뭐?”

“혹시나 우리 부모님이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