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베어 무는 것

침대에서 뒹굴면 다 베드 신인 줄 알았더니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꼭꼭 씹어서 보라며 출판 담당자가 빨간색 USB에 담아 준 야동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뭐 숨 쉬는 것부터 침 삼키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끈적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혼자 사는 집에서 귀신이라도 볼까 두려운 어색함에 집 안을 몇 번을 두리번대다가 결국 정지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아니, 연애를 하면 꼭 그걸 해야 해? 부모님이 주신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걸 한낱 사랑 놀음에 함부로 막 굴리고 그러나 그러길?”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알지만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USB를 빼내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후드 티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이깟 야동 따위! 이딴 걸 본다고 없던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좋아, 본능에 충실해 보자. 오늘은 기필코 쓰고 말리라!”

며칠째 한 줄도 써 나가지 못한 베드 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을 써야 하는데 이야기의 흐름상 19금까지는 아니라 해도 상상을 유발하는 언어의 구사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평소 스타일대로면 키스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다행히 담당자는 영은이 쓰고 있는 로맨스 소설 ‘빛 조각’이 점점 재미있어진다고 말을 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스킨십을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현실감이 없다며 태클을 걸었다. 심지어 모쏠이라는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님 소설 속 대사가 얼마나 차지고 현실적인지 알죠?”

“자기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고마워.”

“근데 장르가 로맨슨데 만담도 아니고 어째서 맨날 대화만 잘하느냐고요.”

“체! 그럼 로맨스 소설은 대화 안 하고 맨날 뽀뽀만 해야 하나?”

“적당히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고, 싸웠다가 화해하고 그러다 베드 신도 하는 게 정상적인 로맨스의 구성이라고요.”

“정상적인 구성은 무슨 얼어 죽을!”

투덜대며 입을 삐죽이는 영은을, 지윤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 왜? 왜 쳐다보는데?”

“나한테만 고백해 봐요, 작가님 모쏠이죠?”

“허! 모쏠? 하! 웃겨! 내가 어딜 봐서 모쏠이야? 그리고 키스 신 그거 수시로 썼잖아!”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남주가 드라큘라예요? 뭘 자꾸 베어 물어? 누가 키스를 그렇게 하느냐고요.”

그러면서 야동이 담긴, 취지와도 딱 어울리는 새빨간 USB를 내밀고 가버린 지윤의 말을 떠올리자 짜증이 솟구쳤다. 거지 존에서 발라당 뒤집힌 머리카락들을 제 손으로 힘껏 헝클었다.

“아, 연애 그깟 게 뭐라고 글로 쓰는 게 이렇게 힘드냐….”

이건 뭐 연애를 해봤어야 사랑싸움도 할 수 있는 건데, 사실 영은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차진 말장난과 달달한 신에서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로 끝내는 것뿐이었다.

미스터리나 판타지 소설은 사건에 기인해서 감정을 풀면 그만이었다. 위기에선 안기고 두려울 땐 울고, 울면 안아 주고. 그러다 연애 분위기만 만들어 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웹 소설 ‘빛 조각’을 쓰면서부터는 취미가 숙제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출판사 담당자인 지윤의 지적을 자신 있게 무시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10년이 넘도록 영상 그래픽 일을 해온 영은이 오랜 꿈이었던 소설을 취미로 쓰기 시작한 건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다. 그녀가 쓴 미스터리 판타지 웹 소설이 놀랍게도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며 기본 인세를 보장해 주는 특별한 출판사 ‘리딩’과 계약을 맺었고, 전자책이 출판되면서 많진 않았지만 통장에 현금이 들어오자 큰맘 먹고 방 하나가 딸린 제법 넓은 오피스텔로 옮겼다. 그것도 투자에 유리하도록 회사 근처로.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버렸다.

돈이라는 건 버는 만큼 쓰기 마련이라 씀씀이가 커지자 주머니 사정은 크게 나아질 것도 없이 여전히 빈털터리였고, 가난은 한꺼번에 오는 거라더니 재계약을 앞두고 집주인의 청천벽력 같은 월세 인상 통보가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오피스텔 1층 상가에 집값을 좌지우지한다는 바로 그 커피숍이 들어오면서 거짓말처럼 월세가 인상되었다. 재계약을 한 달도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보증금을 3천만 원 올리겠다는 집주인과의 통화를 떠올리자 또다시 뒷골이 뻐근해졌다.

[보증금 3천을 올려주든가 월세를 30만 원 더 내든가. 것도 싫으면 방을 빼는 걸로 하자고.]

“가, 갑자기요?”

[응, 갑자기. 비싼 커피숍이 1층에 들어온 걸 나도 갑자기 알게 됐거든.]

빌어먹을!

방을 구하는 사이트란 사이트는 모조리 뒤져도 옷이다 뭐다 예전보다 많아진 짐이 들어갈 수 있는 저렴한 방은 근처에 없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나는 기회가 있기에 어른들은 인생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거짓말처럼 그녀에게 부업일 뿐이었던 출판사에서 로맨스 소설 세 편을 쓰는 조건으로 선인세 3천만 원을 제안했던 것이다.

고정 구독자가 있다고 해도 인기 작가라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미천했고 고작 두 편의 소설밖에 쓰지 못한 그녀에게 선 인세를 줄 거라 생각지 못했지만 절실하게 필요했던 돈 3천만 원을 갑자기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급한 마음에 덥석 돈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집주인과 재계약까지 끝내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은은 로맨스 소설을 쓸 수 없는 감정적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식이라면 소설만 쓰기에도 하루가 짧을 것 같았다. 이쯤이면 본업과 부업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해야 했지만 상황도 좋지 않았다.

자존심도 세고 일할 때는 까칠하다고 소문이 난데다가, 심지어 나이까지 많은 모션그래퍼의 지랄 맞음을 감당해 줄 만큼 영은의 실력이 미친 듯이 감각적이지도 못했기에 그녀가 프리랜서를 선언한다고 해도 일을 맡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언제나 내가 문제야. 내 성격이 문제라고. 이놈의 급한 성격을 고쳐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커서가 이틀째 같은 곳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안경을 꼈다.

＃뛰쳐나가는 그녀를 동혁이 돌려세웠다. 커다랗게 큰 눈이

“아냐, 아냐!”

백스페이스 바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자 몇 개의 글자가 지워졌다.

＃갈망하는 두 개의 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다가서던 남자가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아, 또또 베어 물었다! 키스에 대한 표현이 이것뿐인가?”

‘베어 물었다’보다 좀 격한 표현이 뭘까 생각을 했다.

“덮쳤다? 삼켰다? 입술로 감쌌다? 어떤 표현으로 키스를 시작해야 격정적일 수 있지?”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하아…… 뭘 알아야 쓰지.”

이틀 동안 유명하다는 여러 편의 로맨스 웹 소설을 읽고 야동까지 봤음에도 감정적인 동요가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달달한 감정을 느끼며 글을 읽는 것과 그 달달함을 내가 표현하는 건 확실히 다른 관점이 존재했다.

영은에게 키스라는 행위는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불필요한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10년 전 잠깐 느꼈던 연애 감정 이후로 그녀의 인생에서 남녀 간의 애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였을 뿐, 영은에게 사랑은 참으로 쓸데없는 그저 그런 감정의 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무의미한 허상에 불과했다.

“하아… 하아…. 내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쉴 새 없이 한숨만 났다.

“아, 몰라, 몰라, 몰라!”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다가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자 쥐가 내려 다리를 절며 냉장고를 열었지만 보이는 것은 마시다 만 생수 한 병이 전부였다.

“하아… 우울하다. 나를 위로해 줄 것은 편의점에나 있는 것인가.”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그래 봐야 슬세권이다 싶어 현관에 놓인 슬리퍼에 맨발을 밀어 넣었다. 대문을 열자 이사를 오는지 앞집 715호 문 앞에 몇 개의 전자제품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한동안 시끄럽게 퉁탕거리더니 드디어 이사 들어오나 보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다가 통 넓은 바짓부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편하다는 이유로 빅 사이즈만 고집하는 탓에 늘 제 옷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빅 사이즈 티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자 얼굴이 깊숙이 가려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물, 과자, 라면 등 생각나는 대로 바구니에 쓸어 담아 계산대에 올렸다.

“비닐봉지 드릴까요, 20원인데.”

“겨우 7층인데요, 뭐.”

“담아 갈 곳 있으세요? 그냥 들고 가기엔 좀 많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대충 쌓아서 가면 돼요.”

후드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달처럼 웃었다.

훌렁훌렁하는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라면 위에 맥주를 올리고 과자는 손과 입에, 그리고 커다란 생수 두 병은 한쪽 겨드랑이와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손에 든 물병을 내려놓고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7층이 눌러져 있었다.

<7층입니다.>

안내 멘트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밖으로 한 걸음 옮기던 영은이 통 넓은 바짓부리에 발이 걸리며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라면 위에 올려 두었던 캔 맥주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커다란 물병이 신나게 굴렀고 라면과 과자는 그녀의 몸 아래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후드가 눈 아래까지 내려와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던 영은이 다시 한 번 바짓부리에 걸리며 넘어졌다.

“돌겠네! 이젠 엘리베이터까지 태클을 걸고 지랄이야?”

<문이 닫힙니다.>

후드 너머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는 소리가 들리자 후다닥 몸을 일으켰지만 채 일어서지 못한 영은의 상체를 사이에 두고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문이 열립니다.>

“우와, 미쳐 돌아가시겠다!”

거의 기다시피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지만 결국 슬리퍼 한쪽을 싣고 문이 닫혔다.

“와씨, 슬리퍼 너마저.”

기진맥진한 채 바닥에 주저앉은 영은이 손끝을 덮고 훌렁훌렁하는 소매를 걷어 올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고 시야를 가린 후드 아래에 나타난 커다란 발이 엘리베이터 속에 있던 영은의 슬리퍼를 밖으로 툭 찼다. 그리고 긴 다리로 마치 걸리버처럼 영은을 성큼 넘었다.

“가관이다.”

자신을 넘어가는 걸리버의 다리를 따르던 눈동자가 그 한마디에 짙어지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이, 어이, 이봐요! 지금 어딜 넘어가요? 그리고 뭐라 그랬어요?”

성큼 걷던 걸리버가 우뚝 멈춰 서서 제 옷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영은을 돌아보았다.

“낮술은 집에서 마시든가,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에에! 내가 어딜 봐서 술을 마셨다는 거예요? 넘어진 사람 도와주진 못할망정! 그리고 초면에 반말은 곤란하지!”

“난 사람한테만 존대를 하거든. 술 취한 멍멍이한테는… 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혀를 차며 성큼성큼 사라졌다. 마침내 모자를 벗었을 때 앞집 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집 근처에선 터진 맥주 캔에서 맥주가 새어 나오고 있었고 물병은 복도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썩을! 아까운 맥주가 다 쏟아졌네.”

슬리퍼를 끌어다가 발을 끼우고 일어서서 떨어진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들었다. 맥주를 쏟아내며 구르던 맥주 캔을 주워 들고는 소매로 쓱 닦아낸 후 한 모금 마셨다. 씩씩대며 비번을 누르다가 불현듯 화가 치솟아 고개를 돌려 앞집 대문을 노려보았다.

“뭐라도 걸리기만 해봐 아주!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동해가 서재에 놓인 심플한 원목 책상에 커다란 모니터 상자를 올려놓았다. 웜톤의 컬러와 원목의 조화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스탠드를 활용한 간접조명이 편안함을 더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 전체가 책장으로 꾸며졌고 커다란 창이 차지하고 있는 다른 쪽 벽에는 전동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책상에 놓인 리모컨을 누르자 블라인드가 닫혔다. 모든 조명도 버튼 하나로 조절할 수 있도록 설정해 놓았는지 리모컨을 누를 때마다 반응하는 조명을 확인하는 동해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나쁘지 않군.”

슬라이딩 도어를 확인한 동해가 성큼 다가가서 문을 열자 은은한 조명이 설치된 너른 침대가 보였다. 그 옆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과 안락의자 하나가 그 방에 놓인 가구의 전부였다. 일에 빠지면 잠자는 것조차 잊는 성격 탓에 일부러 방 두 개를 확장해 그의 책상에서 언제든 침대를 볼 수 있도록 슬라이딩 도어로 공간만 분리한 것 같았다.

사무실로 쓸 곳에 침대가 왜 필요하냐는 동해의 의견을 무시하고 동생 일이라면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한의 배려와 고집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얼마 전 동해가 바이러스성 안면마비를 겪은 후부터 형은 동생 일에 더 예민해졌다.

“오버하기는….”

형의 진심이 느껴지는 인테리어가 어색하면서도 고마웠다. 회의실 용도로 쓰일 심플한 인테리어의 거실 중앙에는 길쭉한 회의 탁자가, 그리고 벽 쪽으로는 패브릭 소파가 길게 놓여 있었다. 화이트의 거실 분위기와 달리 그레이 톤으로 인테리어 된 주방은 최소한의 취식이 가능한 정도의 식기가 구비되었고 수납장마다 레토르트 식품이 채워져 있었다.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에도 다양한 먹을거리들로 가득했다.

“쳇!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남은 방 하나는 게스트 룸의 용도인지 침대와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남의 집처럼 집 안을 둘러본 동해가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